[작성자:] human0101

  • 왜 하나둘 연락이 끊어질까?

    왜 하나둘 연락이 끊어질까?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아침에 휴대전화를 켭니다.

    밤사이 문자 몇 개가 들어와 있습니다.
    대출 안내, 보험 광고, 쇼핑몰 할인 안내입니다.
    어디에서 번호를 알았는지 모를 홍보 문자도 하나 끼어 있습니다.

    읽을 것도 없이 하나씩 지웁니다.

    마지막 광고 문자까지 지우고 나니 새로 온 문자는 없습니다.

    화면을 끄려다가 잠시 멈춥니다.

    예전에는 아침에 휴대전화를 열면 답할 것이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들어온 메시지가 남아 있기도 했고, 어제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아침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몇 시에 볼 것인지, 어제 이야기한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점심은 어디에서 먹을 것인지 묻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몇 마디가 하루의 시작에 사람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드뭅니다.

    전화가 고장 난 것도 아닙니다.
    연락처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연락처를 열어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봅니다.

    익숙한 이름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한때 거의 매일 얼굴을 보던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주고받던 사람도 있습니다.
    점심때가 되면 별다른 약속 없이 함께 식당으로 향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름은 그대로인데 최근 통화목록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에서 손가락이 멈춥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언제였는지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다.

    두 달 전인지, 반년 전인지 기억도 흐립니다.

    이상합니다.

    서로 다툰 적도 없습니다.
    서운한 말을 주고받고 돌아선 것도 아닙니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연락은 끊겨 있습니다.

    한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둘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정확히 짚기도 어렵습니다.

    마지막 연락은 왜 기억나지 않을까

    연락이 끊기는 순간은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르고 마지막 전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한번 보자.”

    “그래. 연락할게.”

    그렇게 전화를 끊습니다.

    정말 다시 연락할 생각이었습니다.

    상대도 다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갑니다.

    그동안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싫어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다음 전화가 없었을 뿐입니다.

    전화 한 통이 오지 않은 하루는 별일 없는 하루입니다.

    이틀이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주가 지나면 다른 일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름 하나를 보고서야 알게 됩니다.

    아, 이 사람하고 참 오래 통화하지 않았구나.

    며칠 뒤 지인 몇 사람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오래전 함께 지내던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분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별생각 없이 들은 질문인데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잘 지내겠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숟가락을 듭니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 무엇인가 걸립니다.

    잘 지내는지 사실은 모릅니다.

    어디에 사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전화번호도 있습니다.
    얼굴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릅니다.

    예전에는 묻지 않아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들었고, 며칠 자리를 비우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사람의 하루가 내 하루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야 그 사람과 멀어진 시간을 알아차립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이름을 찾아봅니다.

    전화를 한번 해볼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부터 생각합니다.

    특별한 용건도 없습니다.
    부탁할 일도 없습니다.
    전할 소식도 마땅히 없습니다.

    전에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할 일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람에게 연락하려면 사람 자체를 찾아야 합니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한마디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갑자기 전화하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결국 화면을 닫습니다.

    나중에 하지 뭐.

    그 나중이 또 지나갑니다.

    내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연락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누구도 관계를 끝내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연락은 멈춰 있습니다.

    사람보다 먼저 사라진 것

    예전에는 전화 한 통을 거는 데 이렇게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연락할 이유가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어볼 것이 있었습니다.
    전해줄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맞춰야 했고, 함께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거 어떻게 됐어?”

    전화는 그런 말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용건은 몇 분이면 끝났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바로 끊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때?”

    그다음부터는 일이 아닌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점심은 먹었는지 묻고,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별것 아닌 일을 가지고 웃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전화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같은 곳으로 가면 만났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 사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섰습니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약속이라기보다 하루의 일부였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매번 약속을 잡으며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루가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을 잘 몰랐습니다.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오늘 못 본 사람은 내일 보면 되었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가면 되었습니다.

    관계를 유지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아침에 향하는 곳이 달라지고 시간을 쓰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함께 처리하던 일이 없어집니다.

    어제처럼 물어볼 일도 없습니다.

    그때 사람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를 찾게 만들던 이유입니다.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던 이유였습니다.

    그 이유가 사라지면 전화가 줄어듭니다.

    전화가 줄면 서로의 하루를 알 기회도 줄어듭니다.

    예전에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던 것을 이제는 물어야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 다녀왔는지 모릅니다.

    요즘 무엇에 시간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대화가 줄고, 그다음에는 서로에게 전할 이야기가 줄어듭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요즘 어때?”라는 질문부터 해야 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 질문 뒤에는 서로 모르는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연락은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늘어집니다.

    매일 하던 연락이 일주일에 한 번이 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연락이 가끔 생각날 때 하는 연락이 됩니다.

    그러다 생각은 났는데 전화하지 않는 날이 생깁니다.

    그날들이 쌓입니다.

    어느 순간 연락처에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처럼 저장되어 있는데 서로의 오늘은 알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가 서운한 것은 사람 하나가 멀어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내 시간도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 사람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함께 다니던 길이 있고, 자주 앉던 자리가 있고, 그때의 내 생활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연락하지 않은 이름을 보면 사람보다 먼저 지나간 시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때의 가까움까지 거짓은 아니다

    연락이 뜸해지면 마음은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나한테 연락할 필요가 없어졌나.

    그동안 일이 있어서 나를 찾았던 것인가.

    내가 생각했던 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가.

    이 질문은 전화 한 통이 오지 않는 것보다 무겁습니다.

    지금의 침묵을 가지고 지나간 시간을 다시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때 함께 웃었던 일도 달리 보입니다.

    함께 먹었던 밥도, 오래 나누었던 이야기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내가 관계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요할 때만 찾았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면 설명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줄로 정리하기에는 함께 지나온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일 때문에 처음 만났습니다.

    같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였던 것은 아닙니다.

    며칠 보이지 않던 사람에게 먼저 안부를 물었습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날에는 평소와 다른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반겨주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짧은 길에서 집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할 일이 있어서 걸었던 전화가 어느 날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되었습니다.

    함께 일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람과 일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일이 끝났는데도 자리를 바로 뜨지 않았습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한참 이야기를 더했습니다.

    그 시간에 누구도 업무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이 사람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까지 지금의 침묵으로 다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는 그때대로 가까웠습니다.

    그날의 웃음은 실제로 웃었던 것입니다.

    걱정해 준 마음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과거로 돌아가 그것들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다만 서로의 하루가 달라졌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가까웠던 관계가 계속 같은 모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자주 만나던 사람과는 계속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나를 자주 찾던 사람이 계속 나를 찾아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보다 먼저 하루가 움직입니다.

    어제까지 하루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하루의 바깥에 놓입니다.

    싫어진 것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됩니다.

    지금의 거리만으로 지나간 시간의 의미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모든 시절을 같은 사람들과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떤 시절에는 매일 보던 사람이 있었고, 또 다른 시절에는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 각각의 시간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이 되었습니다.

    나도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하루가 조용해진 뒤에는 전화 한 통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전에는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귀찮을 때도 있었습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른 전화가 오기도 했습니다.

    메시지에 답하다 보면 잠시 휴대전화를 꺼놓고 싶은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조용해지고 나면 사람 마음은 달라집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화면부터 바라봅니다.

    아는 이름이면 반갑습니다.

    별것 아닌 이야기인데도 금방 끊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별일 없지?”

    그 한마디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보다 방 안이 덜 조용하게 느껴집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락이 줄어드는 일은 단순히 통화 횟수가 줄어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따라옵니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의 하루에서 없어졌나.

    이 질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서운해집니다.

    그런데 연락처를 조금 더 내려보다 보면 다른 이름들이 보입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몇 사람의 얼굴이 바로 떠오릅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나면 무척 반가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봄에 한번 전화해야지 생각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떠올랐던 사람도 있습니다.

    밥 한번 먹자고 해놓고 날짜를 잡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게 연락이 끊긴 사람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연락이 끊긴 사람일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싫어서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잊어서도 아닙니다.

    오늘 할 일이 있었고 저녁이 왔습니다.

    내일 해야지 했는데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몇 주가 되었습니다.

    생각은 여러 번 했는데 전화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한번은 휴대전화에 이름까지 띄워놓았습니다.

    전화 버튼만 누르면 되었습니다.

    그때 다른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그 사람에게 전화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습니다.

    며칠 뒤 다시 생각났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늦었습니다.

    다음 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날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런 사소한 날들이 사람 사이에 쌓입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해집니다.

    나는 연락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잊지 않았으면서 그 사람은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연락이 없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상대가 멀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내 쪽에서 바라보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음에 남아 있으면서도 연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고 싶으면서도 약속을 잡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가운 사람을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휴대전화 속 이름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한쪽에서만 보던 관계가 달라 보입니다.

    누군가 나를 찾지 않은 시간과 내가 누군가를 찾지 않은 시간이 함께 놓입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남습니다.

    그것까지 억지로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웠던 사람에게 전화 한 통 오지 않으면 허전합니다.

    다만 그 허전함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말하기는 어려워집니다.

    나에게도 생각하면서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이 떠오르는 사람

    저녁이 되어 다시 휴대전화를 봅니다.

    광고 문자가 하나 더 들어와 있습니다.

    아침처럼 지우려다가 잠깐 웃음이 납니다.

    기다리지 않은 문자는 참 부지런히 찾아옵니다.

    광고 문자를 지우고 연락처를 다시 엽니다.

    아침에 보았던 이름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에서 손이 멈춥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언제 통화했는지 계산하지 않습니다.

    누가 먼저 연락했는지도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던 어느 날이 생각납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웃었던 얼굴은 떠오릅니다.

    또 다른 이름을 봅니다.

    그 사람과는 오래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조금 더 내려가다가 또 한 사람의 이름에서 멈춥니다.

    이 사람에게는 부탁할 일이 없습니다.

    전해줄 소식도 없습니다.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한번 듣고 싶습니다.

    손가락을 이름 위에 올려놓습니다.

    전화를 걸까 생각합니다.

    잠시 그대로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전화할 이유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함께 일하던 자리는 없어졌습니다.

    매일 마주치던 시간도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볼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남았습니다.

    연락이 뜸해지고 나서야 이런 차이가 보입니다.

    우리를 만나게 했던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마음에 남아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느 시절에는 무척 가까웠지만 이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여러 사람과 한 시절을 나눕니다.

    모두가 끝까지 같은 거리에 남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내 하루의 중심에 있다가 멀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보지 않아도 이상하게 가까이 남습니다.

    지금의 거리만으로 지나간 시간의 의미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때 내 곁에 있었습니다.

    나도 그 사람 곁에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최근 통화목록에서 이름이 사라졌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화면을 닫습니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합니다.

    아침과 같은 방이고 같은 휴대전화입니다.

    그런데 아침과는 조금 다릅니다.

    아침에는 연락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연락하지 않은 사람도 생각합니다.

    오래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반가운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목소리가 궁금한 사람도 한 명 떠올랐습니다.

    전화를 걸지, 오늘은 그냥 둘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보다 먼저 마음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연락이 끊겼다고 해서 함께했던 시간까지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 서로 찾지 않았다고 해서 그때 나누었던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전화번호는 그대로입니다.

    이름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은 서로의 하루입니다.

    그 달라진 하루 사이에서 멀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아무 용건도 없는데 문득 생각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지금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에는 스팸 문자 몇 개를 지우고 텅 빈 화면을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같은 화면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오래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에서는 안부 하나가 먼저 건너갔습니다.

  • 이제는 왜 만남이 예전 같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조금 허전했을까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 날이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날짜를 맞추고 장소를 정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습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무심코 고개가 그쪽으로 향합니다.

    잠시 뒤 익숙한 얼굴이 들어옵니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봅니다. 걸음걸이도 낯설지 않고,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드는 모습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대로입니다.

    “오랜만이다.”

    마주 앉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함께 알던 사람들의 소식을 나눕니다. 오래전 있었던 일을 한 사람이 꺼내자 다른 사람이 그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잊고 있던 이름 하나가 나오고, 그 이름을 따라 장소가 나오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 줄지어 따라 나옵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웃음이 터지고 시간은 금세 흘러갑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합니다. 늘 하던 인사입니다.

    분명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투지도 않았고 불편한 말이 오간 것도 아닙니다. 대화가 끊겨 어색하게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혼자 돌아오는 길에 작은 허전함이 남습니다. 반가웠고 즐거웠는데 예전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예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도 이야기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이야기했습니다. 별것 아닌 일을 두고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오늘도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오늘의 이야기보다 지난 이야기가 더 많았습니다.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함께 지나온 시간을 만나고 온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지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을까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마주 앉으면 꺼낼 이야기가 많습니다. 처음 만났던 때를 알고 있고, 함께 무언가를 시작했던 때도 기억합니다. 일이 잘되던 시절도 보았고 뜻대로 풀리지 않던 때도 곁에서 보았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말이야.”

    그 한마디면 이야기가 절로 열립니다.

    오래 만난 남자들 사이에서는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 자리도 있습니다. 제대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느 부대에서 지냈는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갑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했고 그전에도 했습니다. 듣는 사람도 이미 결말을 압니다. 그런데도 또 웃습니다.

    함께 알고 있는 과거에는 이런 편안함이 있습니다. 새로 설명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앞부분을 꺼내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채웁니다. 같은 기억 속에 두 사람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에만 남아 있던 시간을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대화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젊은 날에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을 시작할지, 어디에 가볼지, 다음에는 무엇을 해볼지 이야기했습니다. 앞에 놓인 시간이 대화 속으로 자주 들어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뒤를 돌아볼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졌으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두 시간을 이야기하고 헤어진 뒤 대부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만 남았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집니다.

    나는 오늘 그 사람의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을까요.

    오래 안다는 말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누군가를 오래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좋아하는 음식도 알고 말버릇도 압니다. 무엇에 쉽게 웃는지 알고, 어떤 일을 불편해하는지도 압니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꽤 많은 말을 막힘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요. 십 년 전 그 사람을 보며 알게 된 것도 있고, 이십 년 전의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멈추어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오래 남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소리 없이 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좋아하던 것에 관심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을 쓰는 방법이 달라지고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지 그 순서도 바뀝니다. 그 변화는 대개 요란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조금씩 생깁니다.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 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새로 시작했는지, 무엇을 그만두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마음에 품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익숙한 사람부터 찾습니다. 기억 속의 그 사람입니다.

    “넌 원래 그랬잖아.”

    많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동시에 오래전에 알게 된 모습을 오늘까지 억지로 이어 붙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자기 삶을 살았습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를 많이 안다는 뜻이지, 오늘의 그 사람까지 다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익숙함이 오히려 지금 눈앞의 사람을 가리는 벽이 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마주 앉으면 자연스럽게 질문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쉬는 날에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묻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묻고, 상대가 말을 하면 귀 기울여 듣습니다. 아직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 안에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사람 앞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질문하기 전에 짐작하는 일이 먼저 앞섭니다.

    “넌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너라면 그렇게 했겠지.”

    그 짐작이 맞을 때도 많습니다. 오랜 관계가 주는 편안함은 이런 데서 생깁니다. 하지만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묻지 않게 되는 것도 늘어납니다. 상대가 말을 시작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미리 예상하기도 하고, 끝까지 듣기도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예전 모습과 이어 붙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방금 그가 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알던 사람을 혼자 듣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오래된 사이에서도 흔히 건네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냥 그렇지 뭐”, “나도 똑같아”라는 대답으로 넘어가고 곧바로 옛날이야기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질문의 무게를 조금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요즘 주로 뭐 하면서 시간 보내는데?”

    한 번 더 가만히 묻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뜻밖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동안 배우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아침마다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을 재미있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제야 조금 낯선 사람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까움이 깊어질수록 물을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 안다고 여겨 묻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모르고 지나간 시간이 길어졌을 뿐입니다.

    그 사람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며 ‘참 많이 달라졌네’ 하고 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방식이 전과 다른 것 같고 관심사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잘 통하던 이야기에 별 반응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은연중에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움직인 사람은 그 사람만이 아닙니다. 나 역시 내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던 이야기가 지금은 별것 아닐 수 있습니다. 한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작게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때는 지나쳤던 사소한 이야기에 오래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 같은 자리에 서 있다가 한 사람만 멀리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향으로 수많은 하루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지금의 만남을 기억 속의 만남과 비교합니다.

    “예전에는 말하지 않아도 다 통했는데.”

    “예전에는 만나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과거를 떠올릴 때 모든 날을 똑같이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유난히 많이 웃었던 날, 특별히 즐거웠던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별말 없이 헤어진 평범한 날들은 기억 속에서 흐려집니다. 그렇게 추려진 선명한 과거와 오늘의 담담한 한 끼를 나란히 놓으면, 오늘이 유독 심심하고 허전해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두 사람은 이제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듯, 그 사람도 자기 시간을 통과해 지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반드시 관계가 멀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흘러온 세월을 이제야 서로의 얼굴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함께한 시간이 오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래된 관계에는 함께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과 최근 삼 년 동안 몇 번 만나지 못했다면, 두 사람에게는 십 년의 인연과 함께 서로 모르는 삼 년의 공백이 놓여 있습니다.

    그동안 각자 다른 아침을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났고 다른 일로 속을 끓였습니다. 혼자 감당해야 했던 일이 있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보지 못했고, 그 사람 역시 내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는 순간에는 그 빈 시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을 알아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전 자리로 금세 돌아간 듯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마지막으로 자주 만났던 시절에서 쉽게 시작하지만, 눈앞에는 그 뒤의 세월까지 살아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 간격은 옛날이야기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통했던 말에 설명이 필요해지기도 하고, 한때 함께 좋아했던 것에 상대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의 낯섦은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표시라기보다, 서로 보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함께한 시간이 두 사람의 지난 시절을 이어주었다면, 함께하지 않은 시간은 서로에게 새로 물어보아야 할 것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오래된 사람 앞에서 느끼는 낯섦은 벽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모습이 이 사람 안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만남에는 오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시 처음의 식탁으로 돌아가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지난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밀어낼 이유는 없습니다.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오래된 관계만이 주는 편안함도 분명합니다.

    그러다 지난 이야기가 잠시 숨을 고를 때, 가만히 물어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

    형식적인 인사로 흘려보내지 않고 진심으로 대답을 기다립니다.

    최근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새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무엇인지, 전과 달라진 하루가 어떤 모습인지 조금씩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낯선 이야기들이 식탁 위로 올라옵니다. 상대도 나에게 묻고, 나 역시 지나온 시간 속에서 달라진 내 모습을 꺼내놓습니다.

    이제 식탁에는 세 가지 시간이 함께 놓입니다.

    둘이 함께 지나온 시간, 서로 보지 못했던 시간, 그리고 지금 마주 앉아 보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중 마지막 것은 아직 지나간 추억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생겨나고 있는 현재입니다. 오늘 처음 들은 이야기는 다음번에 만났을 때 둘이 함께 아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래된 추억도 처음부터 추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날의 소박한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하루가 세월이 흐른 뒤 둘만 아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오래된 관계의 힘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만남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는 아쉬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처럼 막힘없이 이야기하고 싶고, 아무 설명 없이도 통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세월을 지나온 지금의 그 사람 앞에 앉는 일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함께한 과거가 있고, 서로 보지 못한 시간이 있으며, 오늘 새로 알게 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 셋이 함께 어우러질 때 오래된 만남은 단순히 옛날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처음 듣는 이야기가 생깁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깊은 모습을 지금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사이의 깊이는 다 알고 있어서 더 물을 것이 없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다시 물어볼 오늘이 남아 있는 데서 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번에도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넵니다. 늘 하던 말이지만 그 울림은 조금 다릅니다. 예전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새로 마주한 서로를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자는 뜻입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달라진 두 사람이 오늘의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일입니다.

  • 키오스크가 어려워지면 내가 작아진 걸까

    키오스크가 어려워지면 내가 작아진 걸까

    키오스크 앞에서 세상이 빨라졌다고 느꼈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메뉴판을 기다렸는데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테이블 한쪽에 주문용 키오스크 화면이 놓여 있습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음식 사진과 이름이 줄지어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눌렀더니 이번에는 수량을 고르라고 합니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니 추가할 것을 고르라고 하고, 주문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라고 합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직원을 부릅니다.

    “여기, 주문 좀 할게요.”

    직원이 테이블로 와서 화면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주문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화면을 봅니다. 조금 전보다 화면이 더 낯설게 느껴집니다.

    모르는 것을 물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 아주 작은 머뭇거림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음식 이름을 말하면 됐습니다.

    “이거 하나 주세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지금은 밥 한 끼를 주문하는 데도 내가 먼저 새로운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옆자리에서는 주문이 벌써 끝났습니다.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다시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는 아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천천히 보면 될 일입니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서두릅니다.

    ‘이걸 또 물어봐야 하나.’

    처음에는 주문 방식이 불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왜 전부 이렇게 해놓았지.”

    그런데 이런 일이 몇 번 이어지면 말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내가 이런 것도 못하나.”

    불편한 것은 주문 방식이었는데 어느새 평가받는 것은 내가 됩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과 내가 작아진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마음속에서는 두 이야기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참 빨라졌네.”

    그 말이 어느 순간,

    “내가 느려졌나.”

    로 바뀝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사람은 달라진 세상보다 달라진 자신을 더 오래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예전의 나와 자꾸 겨루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일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나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었습니다. 실수했고, 다시 했고, 어제 배운 것을 오늘 또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작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르면 배우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묻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묻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건 어디부터 손대야 합니까?”

    오랫동안 해온 일이니 대답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는 사람이 되었을 때 마음이 조금 이상합니다.

    식당의 주문 화면을 물어봅니다. 휴대전화 기능을 물어봅니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을 물어봅니다. 설명을 한 번 듣고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묻기도 합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아무렇지 못합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 말은 새로운 기계 앞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열쇠를 둔 곳이 잠깐 생각나지 않을 때도 나옵니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때도 그렇습니다.

    젊었을 때도 열쇠를 찾으러 다녔고 사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습니다. 그때는 그냥 실수였습니다. 지금은 작은 실수 하나가 나를 의심하게 합니다.

    내 앞에 비교할 사람이 한 명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나입니다.

    기억 속의 나는 빠릅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다음 날 다시 움직입니다. 처음 해보는 일에도 겁 없이 손을 댑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도 지금보다 쉬웠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나는 그 사람과 자꾸 겨룹니다.

    그런데 이 경기는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억 속에서 좋은 순간을 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오늘 아침의 실수까지 모두 들고 경기장에 나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세워놓으면 지금의 내가 자꾸 작아 보입니다.

    줄어든 것만 세고 있었다

    실제로 줄어든 것은 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른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처럼 오래 일하면 다음 날 몸이 먼저 압니다. 계단을 오를 때도 전과 다릅니다. 새로운 것을 익힐 때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선택의 폭도 같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마음만 먹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도 계산해야 하고, 몸도 살펴야 하며, 새로 익히는 데 드는 힘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 못하게 된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계산이 이상합니다.

    줄어든 것은 아주 꼼꼼하게 셉니다. 속도가 줄었고, 체력이 줄었고, 기회가 줄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는 속도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늘어난 것은 같은 정성으로 세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잘못 선택했다가 다시 길을 잡았는지 세지 않습니다. 일이 틀어졌을 때 수습해본 횟수도 세지 않습니다. 사람을 겪으며 얻은 눈도 숫자로 적지 않습니다. 서둘렀다가 일을 그르친 뒤에야 알게 된 것도 장부에는 없습니다.

    줄어든 것은 금방 보입니다. 쌓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장부의 한쪽 면만 펼쳐놓고 결산하고 있었습니다. 줄어든 것에는 숫자를 붙이고, 쌓인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계산하고 나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나는 예전보다 못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전체를 계산한 결과가 아닙니다.

    한쪽만 계산한 장부였습니다.

    지나간 시간도 내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지금의 나보다 예전의 나를 진짜 나에 가깝게 만듭니다. 잘 걷던 내가 진짜 나이고, 지금의 나는 그보다 못한 나가 됩니다. 빠르게 판단하던 내가 원래의 나이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지금의 나는 변해버린 나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과거의 나는 점점 선명해지고 현재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여기까지 살아온 모습입니다. 예전의 나를 인정하면서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젊었던 시간만 내 것이고 그 뒤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달라진 것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나간 시간을 지나갔다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예전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지고, 아직 뒤처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지금의 몸과 형편보다 과한 일을 붙잡기도 합니다.

    그것은 젊음을 지키는 일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내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지나갑니다. 그런데 마음은 지나간 시간 앞에 오래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의 나를 붙잡고 지금의 나에게 계속 같은 모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만 지금의 내가 괜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간 시간도 내 것입니다.

    젊었던 나도 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나입니다.

    과거의 나를 붙들고 현재의 나를 밀어내는 동안에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시절을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여기까지 살아낸 사람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오래됐다고 모두 낡은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면 지나온 시간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아니라 내가 통과해온 시간이 됩니다.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무언가 잘못 돌아갈 때 먼저 눈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처음 겪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헤매며 확인하지만, 여러 번 겪은 사람은 먼저 살펴야 할 자리를 압니다.

    그 차이는 책 몇 장을 더 읽었다고 바로 생기지 않습니다. 틀려본 시간, 고쳐본 시간, 서둘렀다가 일을 그르치고 수습해본 시간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한 번 무너진 일을 다시 세워본 사람은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를 찾습니다.

    그것은 젊음과 맞바꾼 보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오래 살아보아야 생기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에게는 지금의 속도가 있고, 새로운 도구를 빠르게 다루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와본 시간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로 가진 것이 다릅니다.

    다만 오래됐다고 해서 모두 낡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고집할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통했던 방법이 지금은 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구도 바뀌고, 일하는 방식도 달라지며,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집니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말 하나로 지금을 판단하면 지나온 시간이 오히려 내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방법은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진 뒤 어디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지 아는 침착함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도구는 바뀌어도 사람을 겉모습 하나로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된 태도까지 낡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시간에서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그것을 가릴 수 있을 때 지나간 시간은 오늘에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바퀴는 하나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었습니다. 몸이 받쳐주고 시간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낯선 곳으로 옮길 수도 있었고, 오래 걸리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해볼 시간이 많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지금보다 넓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인생길은 오히려 지금보다 단순한 편이었습니다. 배우고, 일을 시작하고,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살아갑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 길을 오래 걷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힘은 넘쳤지만 크게 보면 하나의 큰 바퀴를 오래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예전만큼 크게 움직일 힘은 없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일도 많고, 십 년 뒤를 바라보며 새 길을 고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 속도에 맞추어 작은 바퀴를 돌릴 통로 역시 많아졌습니다. 거창한 조직이나 큰 계획 없이도 내가 오래 다뤄온 감각을 전혀 다른 일상과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넓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길은 비교적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보폭은 줄었지만 삶을 이어 붙이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되었습니다.

    체력 때문에 지나쳐야 할 문이 있고,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내려놓아야 할 길도 있습니다. 그 한계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 바퀴가 끝났다고 해서 삶의 모든 바퀴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예전처럼 크게 한 번 돌리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내 호흡에 맞는 크기로 다시 굴릴 수 있는 바퀴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질문이 “무엇이 될까”처럼 넓었다면, 지금의 질문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지금의 나로 무엇을 시작해볼 수 있을까.”

    질문이 좁아졌다고 삶까지 좁아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형편과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크기의 길을 고를 수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저마다의 결을 남긴다

    같은 나이가 되었다고 모두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오래 글과 씨름했고, 한 사람은 평생 손으로 무언가를 매만졌습니다.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살았고, 누군가는 묵묵히 숫자를 맞추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자기 몸을 돌보며 시간을 통과해왔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마주하는 그 차이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갔지만, 그 시간 안에서 통과해온 삶의 결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무엇을 손에 익혔는가.

    어떤 고비를 묵묵히 버텨냈는가.

    무엇을 끝내 버리지 않았는가.

    그 축적의 시간들이 어느 날 저마다의 선택지가 됩니다.

    누군가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시간을 채워온 사람에게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삶을 이어갈 때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남습니다.

    오랫동안 책을 읽어온 사람에게는 문장을 헤아리는 눈이 남습니다. 손을 써온 사람에게는 물건을 매만지는 감각이 남고, 사람을 상대해온 사람에게는 말 한마디를 언제 건네고 언제 삼켜야 하는지 아는 호흡이 남습니다.

    실패를 여러 번 지나온 사람에게는 다시 시작할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짚어보는 눈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는 같아질 수 있어도, 삶이 남긴 결까지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바라볼 것은 지나간 숫자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실제로 무엇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빈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가만히 적어봅니다.

    내가 오랫동안 해와서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

    남들은 어렵다고 하는데 내게는 비교적 수월한 일은 무엇인가.

    실패를 겪어봤기에 남들보다 먼저 짚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다음에는 반대쪽도 담담히 적어봅니다.

    지금 내 체력으로는 무리인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앞서지만 현실적으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진 것만 보면 자신을 과장하기 쉽고, 없는 것만 보면 다시 작아집니다. 지금 내가 실제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그 두 목록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평소에는 너무 익숙해서 능력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어질러진 상황을 차분하게 순서대로 정리하는 감각,

    망가진 기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원인을 찾아내는 눈길,

    글이나 문서를 꼼꼼히 살피는 성실함.

    오랜 시간을 거쳐 몸에 밴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처음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당장 거창한 결론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가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지금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로 옮겨갑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안에 남은 것을 찾았다고 해서 그것을 전부 쓸모나 이익으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흘러갈 자리는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나 자신의 작은 일상에 다시 쓰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도 있으며, 담담한 글이나 기록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을 합니다. 마지막에 물질을 손에 쥐고 갈 수 없다는 뜻이라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지고 가는 것과 남겨놓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배운 일하는 태도가 여전히 내 손끝에 배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어른이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건넨 무언가도 다른 사람의 삶 어딘가에 머물 수 있습니다.

    내가 적어둔 몇 줄의 문장이 남을 수도 있고, 정성껏 손봐둔 자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서 오래 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은 내가 자리를 비운 뒤에도 내가 다듬어놓은 방식대로 한동안 굴러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어받아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갈 것입니다.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낸 시간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때때로 생각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습니다. 거창하거나 영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건넨 작은 배려 하나가 누군가의 고단한 하루에 쓰일 수도 있고, 내가 오래 익힌 경험 하나가 다른 사람의 시행착오를 조금 덜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흔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떠날 때 빈손일지 몰라도, 살아 있는 동안 건넨 것까지 모두 빈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식당의 작은 화면 앞에서 처음 떠올랐던 질문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나는 정말 작아진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나를 재어오던 자가 너무 짧았던 것일까.

  • 하던 일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하던 일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순서를 따릅니다.
    이름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합니다.
    어디에서 일하는지 덧붙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관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몇 마디면 설명이 끝납니다.

    상대도 그 말을 들으면 나를 조금 알게 된 것처럼 느낍니다.
    직업을 알면 그 사람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어디에서 보내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부모로 불립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책임자로 불립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선배이고, 다른 자리에서는 누군가에게 일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이름이 붙습니다.

    그 이름들은 호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려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주고,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어느 정도 정해줍니다.

    오랫동안 같은 역할을 맡고 살면 그 이름은 더욱 익숙해집니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릅니다.
    나도 나를 그렇게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맡은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계가 흐려집니다.

    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 일이 나를 설명하는 사람이 된 것인가.

    역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이 차이를 굳이 묻지 않습니다.

    질문은 역할이 흔들릴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소개해왔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격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역할에서 나옵니다.

    “저는 교사입니다.”
    “저는 사업을 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상한 대답은 아닙니다.

    역할은 실제로 한 사람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그 말이 사람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입니다.

    교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교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표라는 말을 들으면 맡은 자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말을 들으면 관계는 알 수 있습니다.
    그 관계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역할의 이름은 사람을 빠르게 설명하지만 깊게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짧은 설명을 오래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나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나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역할은 자기소개를 넘어 자기 이해의 언어가 됩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동사가 명사로 바뀝니다.

    하는 일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됩니다.

    역할은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

    역할을 명함에 적힌 글자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역할에는 시간이 들어갑니다.

    처음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배우고, 사람과 부딪히고, 다시 판단합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이 몸에 익습니다.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지 짐작합니다.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도 배웁니다.

    그렇게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고 삼십 년을 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이 사람을 그냥 지나가지는 않습니다.

    책임지는 일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대하는 방식이 생깁니다.
    사람을 많이 만난 사람에게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이 생깁니다.
    수없이 선택해온 사람에게는 판단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좋은 흔적만 남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을 자신이 확인해야 안심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몰아붙이는 버릇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역할은 사람의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역할을 살아낸 시간이 사람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떤 역할이 끝났을 때 “그건 원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일을 했던 사람이 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결정했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실수했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책임졌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역할을 떼어내고 나면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사람이 안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역할을 살아온 세월도 이미 내 삶이기 때문입니다.

    역할과 나는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한 사람이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퇴직하는 날 교사라는 직책은 끝납니다.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 동안 사람을 가르치며 만들어진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차리는 눈이 남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말하는 습관도 남을 수 있습니다.

    교사라는 직함은 사라졌습니다.

    교사로 살아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역할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일까요.

    경계를 한 줄로 긋기는 어렵습니다.

    역할이 옷이라면 벗으면 됩니다.

    오랫동안 살아낸 역할은 옷보다 흔적에 가깝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흔히 듣는 말 하나를 다시 보게 됩니다.

    “직함을 내려놓고 진짜 나를 찾으십시오.”

    직함을 내려놓는다고 그 뒤에서 손대지 않은 ‘진짜 나’가 걸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직함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도 내 삶입니다.

    그 시간에 만들어진 판단과 습관과 관계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가짜라고 부르면 내 삶의 상당 부분까지 가짜가 됩니다.

    반대편도 맞지 않습니다.

    삼십 년 동안 대표였다고 해서 대표가 그 사람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대표가 되기 전에도 그 사람은 살았습니다.
    대표라는 자리를 떠난 뒤에도 살아갑니다.

    역할은 나를 만들지만 나를 다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질문이 어려워집니다.

    역할을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같은 역할을 살아도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같은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일은 비슷합니다.
    직함도 같습니다.
    책임의 범위도 비슷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먼저 사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은 일을 먼저 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충분한 근거를 확인한 뒤에야 생각을 바꿉니다.

    역할의 이름만으로는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역할도 같습니다.

    같은 부모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삶이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가 다릅니다.
    어디까지 기다리는지도 다릅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싶은지도 다릅니다.

    역할은 같지만 역할을 살아내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을 바라보는 질문도 달라집니다.

    무슨 일을 했는가만 물어서는 한 사람에게 충분히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 일을 어떤 사람으로 살아냈는가.

    같은 책임을 맡고도 사람들은 다른 흔적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책임보다 권한을 먼저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 사람의 태도를 기억합니다.
    누군가는 직함만 기억됩니다.

    직함에는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지만 그 자리를 지나간 사람은 같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명함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역할이 끝난 뒤에도 남습니다.

    살아온 방식이 나인가

    여기까지 오면 역할보다 그것을 살아낸 방식이 사람에게 더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직업보다 깊은 설명처럼 들립니다.

    “나는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그렇습니다.

    직함은 사라져도 이런 태도는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방식도 변합니다.

    젊었을 때 모든 일을 빠르게 결정하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오래 듣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 손으로 해야 마음이 놓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요구를 먼저 살피던 사람이 어느 시기부터 자기 몫을 분명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역할을 살아내며 변하고, 역할을 떠난 뒤에도 변합니다.

    그렇다면 성격이나 습관 하나를 붙들고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선택만으로 자신을 고정하면 오늘 달라질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직함으로 대답하면 너무 좁습니다.

    성격으로 대답해도 부족합니다.

    능력으로 대답하면 능력이 달라졌을 때 흔들립니다.

    관계로 대답하면 관계가 달라졌을 때 다시 물어야 합니다.

    살아온 방식으로 대답해도 사람이 변한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무엇 하나를 붙들 때마다 그것은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부는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어려운 까닭은 답을 몰라서만은 아닙니다.

    변하는 사람을 변하지 않는 한 문장에 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명사는 사람을 멈춰 세운다

    사람을 소개하는 말에는 명사가 많습니다.

    교사.
    대표.
    부모.
    작가.
    직장인.
    전문가.

    명사는 편리합니다.

    “저는 대표입니다.”

    한 문장이 많은 설명을 대신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무엇을 맡았는지도 알려줍니다.

    역할은 사람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명사에는 시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사’라는 두 글자 안에서는 첫해의 교사와 삼십 년째의 교사가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부모’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아이를 품에 안았던 사람과 자녀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같은 명사가 붙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사람은 그 안에서 계속 변했습니다.

    명사는 그 변화를 멈춰 세운 채 한 이름으로 묶습니다.

    그래서 역할의 이름은 편리하면서 위험합니다.

    오랫동안 같은 명사로 자신을 부르다 보면 그 이름이 변하지 않는 만큼 자신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대표입니다.

    나는 교사입니다.

    나는 부모입니다.

    문장은 단단합니다.

    사람은 그 문장 안에서도 계속 달라집니다.

    어느 날 역할이 끝나면 명사가 먼저 사라집니다.

    그제야 보입니다.

    그 이름 안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변해왔는가.

    자기소개가 과거형이 되는 날

    퇴직은 이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전날까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합니다.”

    퇴직한 뒤에는 문장이 달라집니다.

    “전에 이런 일을 했습니다.”

    문장이 과거로 갑니다.

    평생 해온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현재형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큽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던 말이 이제 이력이 됩니다.

    “무슨 일 하십니까?”

    예전에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문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잃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필요가 생깁니다.

    직함이 사라졌습니다.

    그 직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던 방식도 끝났습니다.

    두 사건이 함께 일어나니 자신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직함과 그 직함을 살아낸 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퇴직자에게만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번 현재형이던 자기소개를 과거형으로 바꿉니다.

    오랫동안 맡던 책임을 내려놓습니다.

    잘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가족 안에서 자기 몫이 달라집니다.

    한때 자신을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믿었던 말이 더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새로운 이름을 찾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이름을 얻는 것과 자신을 다시 아는 것은 같은 일일까요.

    새 이름은 질문을 끝내는가

    이전 역할이 끝난 뒤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자기소개가 쉬워집니다.

    “요즘은 이런 일을 합니다.”

    현재형이 돌아옵니다.

    그 문장이 생겼다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까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새 역할은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사람을 다시 바꿀 것입니다.

    이전 역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역할도 끝날 수 있습니다.

    다시 다른 이름이 필요해집니다.

    역할이 바뀔 때마다 나를 처음부터 새로 정해야 한다면 한 사람의 삶은 여러 개의 명함 사이에서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업이 바뀌어도 이전의 삶을 내 삶이라고 부릅니다.

    역할이 달라져도 과거의 선택을 내가 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지 않은데도 둘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변한 것이 많은데 무엇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 수 있습니다.

    역할이 바뀌어도 무엇이 이어지는가

    “역할을 모두 빼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에게서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뺍니다.

    직함을 뺍니다.

    관계를 뺍니다.

    능력을 뺍니다.

    계속 빼다 보면 언젠가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나 하나가 남을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삶은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책임진 일이 나를 바꾸었습니다.

    함께 살아온 사람이 나를 바꾸었습니다.

    실패했던 일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오랫동안 반복한 선택도 지금의 나에게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빼기가 아니라 이어짐 쪽에 놓여야 합니다.

    역할을 모두 없애면 무엇이 남는가가 아니라, 역할이 바뀌어도 무엇이 이어지는가.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릅니다.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달라졌습니다.

    맡은 역할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십 년 전의 실패를 말할 때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잘못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변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어짐도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는 둘이 함께 있습니다.

    역할은 그 흐름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어떤 역할은 오래가고 어떤 역할은 짧게 끝납니다.

    역할이 바뀌었다고 삶의 주인이 매번 교체되지는 않습니다.

    역할은 장면을 바꾸지만 그 장면들을 살아온 삶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하나의 직함이나 성격이나 능력에서 찾으려는 시도부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의 완성된 답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정답 하나를 찾으려 합니다.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 하나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장을 발견하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내가 자신을 설명한 문장과 예순 살의 내가 자신을 설명하는 문장이 같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사이에 실제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달라집니다.

    잘하던 일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에 관한 문장도 고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딘가에 완성된 채 숨어 있어서 발견만 기다리는 답과는 다릅니다.

    살아가는 동안 선택하고, 달라지고, 이전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면서 계속 이어지는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완성된 자기소개가 없습니다.

    그 대신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맡았던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살아낸 방식이 있습니다.

    달라진 생각이 있습니다.

    버린 것도 있고 새로 붙든 것도 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한 사람의 삶이라고 부르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역할 하나는 그 긴 시간을 잠시 설명해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삶은 그 자리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역할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내 역할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역할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직함을 벗고 진짜 나를 찾으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역할을 살아온 시간이 이미 나에게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역할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역할과 상관없는 순수한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맡았던 역할에 영향을 받고, 그 역할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내고, 그 안에서 달라지고, 어느 날 그 이름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여전히 자기소개가 필요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장이 과거형이 된 뒤에도 그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나라고 불러왔는가.

    vidIQ

  • 아무것도 안 하면 왜 불안할까

    아무것도 안 하면 왜 불안할까

    쉬는 날인데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할 곳도 없습니다.
    처리할 일도 없습니다.
    누가 기다리는 약속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든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전이 조금 지나면 할 일을 찾기 시작합니다.
    밀린 청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읽다 만 책을 펼칩니다.
    컴퓨터를 켭니다.
    휴대전화를 들고 무엇인가 확인합니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던 사람도 막상 할 일이 없어지면 오래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쉬는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다고 했는데, 시간이 생기자 다시 할 일을 찾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오늘 무엇을 했는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남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쉬는 날의 불편함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가.

    쉰 하루를 설명해야 할 때

    누군가 묻습니다.
    “오늘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대화는 이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주 말을 덧붙입니다.
    집에서 좀 쉬었다고 합니다.
    밀린 일을 조금 했다고 합니다.
    운동을 했거나 책을 읽었다고 말합니다.

    하루를 설명할 만한 것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간으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도 함께 기억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한 것이 남았습니다.
    직장에서는 처리한 일이 남았습니다.
    집에서는 치운 것, 고친 것, 준비한 것이 남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흔적이 생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는 그 흔적이 희미합니다.
    시간은 분명 지나갔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쉬었다’는 말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도 같지 않습니다.

    쉬었다고 말하면 휴식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이유마저 없어 보입니다.

    같은 두 시간을 소파에 앉아 보냈어도 “피곤해서 쉬었다”고 하면 설명이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앉아 있었다고 하면 그 시간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시간을 왜 그렇게 보냈는지까지 설명하려 합니다.

    쉰 시간에도 이유가 필요해집니다.

    사람은 시간을 자꾸 계산한다

    한 시간 일했습니다.
    삼십 분 걸었습니다.
    책을 스무 쪽 읽었습니다.
    방 하나를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시간에 모양이 생깁니다.
    두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고 하면 계산이 달라집니다.
    두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빈 시간 앞에서는 계산이 시작됩니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도 되는가.
    남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쉬는 시간까지 효율의 대상이 됩니다.
    휴일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하고, 여행에서도 여러 곳을 봐야 만족하고, 산책을 하면서도 걸음 수를 확인합니다.
    책을 읽으면 몇 권을 읽었는지 세고, 운동을 하면 기록을 남깁니다.
    기록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록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불편해진다면 다른 문제가 남습니다.

    시간을 보내는 것과 시간을 증명하는 것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무엇을 끝냈는지,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하면 사용한 시간이 눈에 보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는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시간은 있었는데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두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두 시간에 붙일 이름이 없어서 불편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손해 본 것 같을까

    돈을 쓰면 줄어든 것이 보입니다.
    물건을 잃으면 없어진 것이 보입니다.
    시간은 무엇을 하든 같은 속도로 지나갑니다.

    일을 끝낸 두 시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두 시간은 길이가 같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값은 다릅니다.

    한쪽은 잘 쓴 시간이 되고 다른 쪽은 버린 시간이 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쉬는 동안에도 무엇인가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마음이 편합니다.
    피로가 풀렸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내일 다시 일할 힘을 얻었습니다.

    휴식에도 결과가 생겼습니다.

    “오늘 푹 쉬었으니 내일부터 열심히 해야지.”

    익숙한 말입니다.
    이 말 속에서 오늘의 휴식은 내일의 일을 위해 값을 합니다.

    아무 목적 없이 보낸 시간은 다릅니다.
    내일 더 잘 일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새로운 생각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냥 보낸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유난히 아깝게 느낀다면 우리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은 빈 시간 자체가 아니라 쓸모를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바쁨은 자신을 설명하기 쉽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바쁘게 지냅니다.”

    이 한마디면 많은 설명이 끝납니다.

    바쁘다는 말에는 일정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맡은 일이 있고, 갈 곳이 있고, 해야 할 것이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익숙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다니는지.
    무엇을 맡고 있는지.
    요즘 무엇을 준비하는지.

    하는 일이 분명하면 자기소개도 짧아집니다.

    바쁜 사람에게는 오늘을 끌고 갈 순서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압니다.
    한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이 기다립니다.

    일정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하루의 모양도 만들어 줍니다.

    일정이 사라지면 그 모양도 사라집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오후가 되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자유로운 시간입니다.
    동시에 그 시간을 무엇으로 보낼지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오늘 무엇을 하지?”라고 묻습니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질문의 주어가 바뀌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

    휴식에서 시작한 질문이 사람 자신에게 닿는 순간입니다.

    같은 빈 시간인데 왜 어떤 날은 편안할까

    모든 빈 시간이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 종일 일을 마친 저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시간이 반갑습니다.
    바쁜 한 주를 보낸 뒤 맞은 휴일에는 늦잠을 자고 한동안 빈둥거려도 마음이 편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특별히 한 일이 없는 날에는 한 시간만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부산해질 때가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하는 일도 없습니다.

    한쪽은 휴식이고 다른 쪽은 낭비처럼 느껴집니다.

    차이는 의자에 있지 않습니다.
    시간의 길이에도 없습니다.

    하루를 바라보는 자신의 판단이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충분히 했어.”

    이 생각이 있는 날에는 멈추기가 쉽습니다.

    “오늘 한 게 뭐가 있지?”

    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쉬고 있는 시간이 무거워집니다.

    그때 청소할 곳이 보이고 미뤄둔 일이 생각납니다.
    무엇 하나라도 끝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움직인 것인지, 자신의 하루에 ‘한 일’을 하나 만들어 넣기 위해 움직인 것인지 경계가 흐려집니다.

    이 차이는 쉬는 방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휴식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오늘은 많이 했으니까 좀 쉬어도 돼.”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했으니까 쉽니다.
    해야 할 것을 끝냈으니까 쉽니다.
    충분히 애썼으니까 쉽니다.

    앞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뒤의 휴식이 허락됩니다.

    오늘 별로 한 일이 없는 날은 어떨까요.
    눈에 띄는 성과도 없습니다.
    힘들었다고 말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 날에도 아무 이유 없이 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쉬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했는지 먼저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할 만큼 했다고 판단한 뒤에야 일을 내려놓습니다.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기 위해 먼저 노동의 영수증을 내놓는 셈입니다.

    영수증이 충분하면 편하게 쉽니다.
    내놓을 것이 없으면 쉬는 동안에도 빚진 것처럼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 계산이 굳어지면 휴식은 일의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다.
    일의 평가표 안으로 들어갑니다.

    많이 한 사람은 많이 쉴 수 있고, 적게 한 사람은 쉬기 전에 무엇인가 더 해야 합니다.

    쉬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해집니다.

    이 상태에서는 시간이 많아져도 편안해지기 어렵습니다.
    빈 시간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신이 그 시간을 누릴 만큼 했는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행동이 사람의 평가가 될 때

    우리는 일하는 사람에게 여러 이름을 붙입니다.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책임 있는 사람.
    자기 몫을 하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붙는 말은 다릅니다.

    게으르다.
    시간을 낭비한다.
    놀고 있다.
    하는 일이 없다.

    처음에는 행동을 말했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 문장은 하루에 관한 말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나에 관한 말입니다.

    두 문장이 붙으면 휴식은 무거워집니다.

    오늘 몇 시간을 쉬었다는 사실이 곧 자신의 태도에 대한 평가가 됩니다.

    이 정도 쉬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계속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몸을 일으킵니다.

    무엇인가 시작하면 질문이 잠잠해집니다.
    할 일이 생겼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함과 불안은 겉모습만으로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같이 움직이고 있어도 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멈춰 있는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잘 쉬는 법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쉬지 못하면 쉬는 방법부터 찾게 됩니다.

    휴대전화를 멀리 둡니다.
    산책을 합니다.
    운동을 시작합니다.
    취미를 만듭니다.
    휴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방법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책을 해야 마음 놓고 쉴 수 있고, 책을 읽어야 보람 있게 쉰 것 같고, 운동을 해야 하루를 잘 보냈다고 느낀다면 한 가지는 그대로 남습니다.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감각입니다.

    일의 목록이 휴식의 목록으로 바뀌었습니다.

    잘 일해야 했던 사람이 이제는 잘 쉬어야 합니다.

    휴일을 알차게 보내야 합니다.
    좋은 경험을 해야 합니다.
    몸을 회복해야 합니다.
    월요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휴식마저 성공해야 한다면 쉬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평가표가 생깁니다.

    오늘 제대로 쉬었는가.

    여기에서도 점수를 매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은 또 실패한 시간이 됩니다.

    잘 쉬는 방법을 아는 것과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남는 것

    일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역할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약속에는 상대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이런 것들이 잠시 물러납니다.

    그 시간에는 직함을 사용할 일도 없습니다.
    성과를 보여줄 일도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확인할 일도 없습니다.

    평소 나를 설명해주던 말들이 줄어듭니다.

    그때 무엇을 다시 꺼내는지 보면 평소 자신을 무엇으로 확인했는지 조금은 보입니다.

    일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속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록할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빈칸을 그대로 두기보다 무엇인가 적어 넣는 쪽이 편한 것입니다.

    그 행동을 잘못이라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번쯤은 묻고 지나갈 만합니다.

    나는 지금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일을 찾고 있는가.

    내가 불안한 것은 정말 시간이 비어서일까

    처음에는 시간이 남아서 불편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빈 시간도 어떤 날에는 반갑고 어떤 날에는 무겁습니다.

    시간만으로는 설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 있을 때 마음이 놓이고, 결과 하나를 만들고 나서야 편하게 쉴 수 있다면 빈 시간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 때 나를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일하는 나.
    맡은 것을 끝낸 나.
    필요한 일을 해낸 나.

    그 모습들은 삶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모습이 잠시 사라진 시간까지 견디기 어려울 때입니다.

    “휴식도 생산적이다”라는 말로 서둘러 해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휴식이 내일의 생산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말하면 쉬는 시간에도 다시 쓸모를 요구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불편하다면 그 시간을 억지로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불편함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무엇인가를 끝낸 뒤에야 마음 놓고 쉬는가.
    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하루를 아깝다고 생각하는가.
    왜 멈춰 있을 때보다 움직이고 있을 때 나를 설명하기 쉬운가.

    처음 질문은 짧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왜 불안할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보다 사람 쪽에 가까운 문제가 남습니다.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오늘의 내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판단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 말을 자꾸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다음 질문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일하지 않는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일까.

  • 일에 매이지 않으면 정말 자유로울까

    일에 매이지 않으면 정말 자유로울까

    오랫동안 일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하루는 온전히 자기 것이었던 적이 많지 않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가 있고,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맡은 일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키지 않는 날에도 나가야 하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도 끝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날들이 오래 이어지면 자유는 자연스럽게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출근하지 않는 날.

    재촉받지 않는 하루.

    아무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 생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삶.

    그런데 정말 그런 날이 찾아오면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장면 하나가 나타납니다.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바로 알지 못합니다.

    자유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뜻밖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매이지 않는 것과 자유로운 것은 같은 말일까.

    매여 있을 때에는 분명했던 것

    일에 매여 있을 때에는 싫은 것이 비교적 선명합니다.

    출근하기 싫은 날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이 지겹습니다. 다른 사람이 정한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 답답합니다.

    벗어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니 자유도 분명해 보입니다.

    저것만 없어지면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때 생각했던 자유의 모습은 대부분 지금의 생활이 반대편에서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출근이 있었기에 출근하지 않는 날을 생각했습니다.

    마감이 있었기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기다렸습니다.

    정해진 일이 있었기에 내 마음대로 사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벗어난 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아직 묻지 않았습니다.

    두 질문은 같은 것처럼 붙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일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일은 사람을 붙듭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붙듭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복된 생활을 자세히 보면 일은 사람을 묶는 것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침에 나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끝냈다는 감각도 있었습니다.

    일이 사라지면 싫었던 것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활과 함께 움직이던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홀가분함과 허전함을 같은 날 경험합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벗어나고 싶었던 생활 속에도 자신의 하루를 붙들어주던 부분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는 처음보다 조금 복잡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나를 붙들던 것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습니다.

    아무도 정해주지 않을 때

    해야 할 일이 사라진 아침은 조용합니다.

    누가 부르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처음에는 그 고요함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이어지면 전에는 남이 정해주던 것들이 하나씩 자기 앞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 갈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무엇은 하지 않을 것인가.

    자유가 없을 때에는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막상 선택해야 할 것이 많아지면 다른 어려움이 나타납니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사실과 내가 원하는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둘 다 자유로운 하루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질문이 됩니다.

    다시 스스로를 묶는 사람

    한동안 아무 일정도 두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다시 약속을 만듭니다.

    정해진 날에 어디론가 갑니다.

    맡은 일이 생깁니다.

    반복해서 하는 것도 생깁니다.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토록 매이지 않는 삶을 원했는데 다시 자신을 무언가에 묶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누가 시켜서 가는 자리가 아닌데도 갑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계속합니다.

    그만두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는데 약속을 지킵니다.

    여기에서 ‘매임’이라는 말이 흔들립니다.

    사람을 붙드는 것은 모두 자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일까요.

    자기가 고른 약속도 사람을 붙듭니다.

    좋아하는 일도 반복되면 일정이 됩니다.

    소중한 관계에도 지켜야 할 것이 생깁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자유라고 부른다면 이런 장면들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사람은 벗어나기 위해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떠나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를 만들어갑니다.

    자유를 얻고 다시 책임을 고르는 일

    오래 맡았던 책임을 내려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맡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가 부탁해도 피했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일을 하나 맡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생깁니다.

    약속한 날을 기억하게 됩니다.

    빠뜨리지 않으려고 챙깁니다.

    책임이 다시 생겼습니다.

    예전 같으면 벗어나고 싶었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책임과 자신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이 장면 앞에서는 자유를 단순히 책임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책임이 없어 홀가분한 날도 있고, 자신이 받아들인 책임 때문에 오히려 생활이 또렷해지는 날도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 언제나 서로 밀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장면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고른 것이라면 모두 자유로운가

    그렇다고 자신이 선택한 것은 모두 자유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시작한 일에도 끌려갈 수 있습니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멈추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내가 만든 약속이 어느 순간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원해서 들어간 자리에서 다시 벗어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유를 설명하면 또 다른 장면들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일까요.

    매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내가 골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말만으로도 다 담기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라는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무엇에 묶여 있는지,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벗어나는 것보다 어려운 질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몸은 가벼워집니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짐을 내려놓는 것과 어디로 걸어갈 것인지는 다른 일입니다.

    오랫동안 일을 해온 사람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끝난 것이 있습니다.

    내려놓은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삶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날이 옵니다.

    또 다음 날이 옵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을 붙들던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의 방향이 바뀝니다.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 질문에는 오래 대답해왔습니다.

    그다음은 조금 낯섭니다.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을 때 나는 무엇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자유라는 말 앞에서

    일에 매이지 않으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은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하고,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하며, 때로는 내 생활보다 먼저 놓아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가벼움도 실제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면 자유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질문이 됩니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것.

    내가 고른 것을 하는 것.

    책임을 내려놓는 것.

    다시 책임을 맡는 것.

    혼자 결정하는 것.

    누군가와 약속하는 것.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한 사람의 삶 안에 함께 들어옵니다.

    그래서 자유를 한 문장으로 서둘러 묶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

    마침내 벗어난 사람.

    그리고 어느 날 자기가 고른 무엇인가를 향해 다시 걸어가는 사람.

    그 사람은 다시 매인 것일까요.

    아니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것일까요.

    답을 먼저 정해놓으면 그 장면 가운데 일부를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처음의 질문을 그대로 남겨둡니다.

    일에 매이지 않으면 정말 자유로울까.

    처음에는 답하기 쉬워 보였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하루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물음은 쉽게 닫히지 않습니다.

  • 시간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시간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시간이 없다는 말을 오래 했습니다.

    아침에는 나갈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낮에는 해야 할 일이 이어졌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내일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쉬는 날에는 평일에 미뤄둔 것을 처리했습니다.

    그럴 때는 시간이 생기면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책도 천천히 읽고 싶었습니다. 어디든 느긋하게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배우고 싶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손으로 무엇인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문제는 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생긴 어느 날, 전과 다른 아침이 찾아옵니다.

    서둘러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일도 예전보다 적습니다. 시계를 한번 보고 다시 내려놓습니다.

    시간은 분명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시간이 없을 때에는 시간이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생기고 나서야 그 뒤에 있던 다른 질문이 보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것

    바쁠 때 떠올렸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봅니다.

    읽고 싶었던 책이 있습니다. 배워보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도 있습니다. 갖추어 놓으면 무엇인가 시작할 것 같아 눈여겨보던 도구도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있으니 시작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차이가 생깁니다.

    시간이 없을 때 하고 싶었던 것 가운데 실제로 시작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막상 시간이 생겨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물건을 마련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꼭 배우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시작했는데 몇 번 지나지 않아 흥미가 옅어지기도 합니다.

    반대의 일도 생깁니다.

    별생각 없이 한번 손대본 일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필요한 것만 간단히 고치려고 시작했는데 다른 것도 만져보고 싶어집니다. 한번 해본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다음에 무엇을 해볼지 생각하게 됩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좋아했던 것과 직접 시간을 건넸을 때 자꾸 돌아가는 곳이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그 차이는 꽤 흥미롭습니다.

    시간이 없던 시절에는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생겨 직접 해보기 시작하면 생각 속의 나와 생활 속의 내가 조금씩 어긋나는 장면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라는 말이 전보다 복잡해집니다.

    꿈이 없어서 그런 걸까

    하고 싶은 것이 선뜻 떠오르지 않으면 ‘꿈’이라는 말이 따라붙기 쉽습니다.

    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익숙합니다.

    어릴 때는 장래희망을 물었습니다. 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무엇을 향해 가는 사람의 모습은 설명하기 쉽습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긴 시간을 살아온 뒤에도 사람의 삶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은 없지만 아침이면 화분부터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단한 목표는 없지만 오래된 물건을 손보는 시간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기록을 남기고, 무언가를 만들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꿈이라는 이름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오래 품어온 꿈이 있다고 해서 실제 하루가 언제나 그쪽으로 향하는 것도 아닙니다.

    꿈이라는 말은 삶을 설명하는 좋은 말이지만, 한 사람의 모든 시간을 담기에는 조금 큰 그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 어느 날을 두고 곧바로 “내게는 꿈이 없다”고 결론 내리면 그 말 밖으로 밀려나는 것들이 생깁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관심.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즐거움.

    예전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달라진 마음.

    그리고 자신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던 생활의 방향입니다.

    생각했던 나와 움직이는 나

    어떤 사람은 목공을 하는 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일이 좋아 보입니다. 작업장을 갖춘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언젠가 시간이 생기면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도구를 마련합니다.

    새것도 사고 중고도 구합니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생기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무보다 쇠를 더 자주 만집니다.

    떨어진 것을 붙이고, 필요한 부분을 자르고, 거친 곳을 갈아냅니다. 고장 난 것을 그냥 버리기보다 어떻게든 다시 써보려고 들여다봅니다.

    처음 품었던 목공에 대한 마음이 거짓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쇠를 만지는 일이 숨어 있던 진짜 꿈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장면이 남습니다.

    생각으로 그려놓은 나와 실제 시간을 건네는 나는 완전히 같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목공과 철공 가운데 무엇이 더 맞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가는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오래 바라보았던 것보다 우연히 손댄 것을 더 오래 붙잡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했던 것이 몇 번의 경험 뒤에 멀어지기도 합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몇 해 뒤에도 곁에 남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생각만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도 남습니다.

    살아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이 먼저였던 날들

    오랫동안 일하며 살아온 사람의 하루에는 질문보다 일정이 먼저 들어오는 날이 많습니다.

    몇 시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 끝낼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속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사람은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에서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해야 하니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책임졌으니 끝내는 일도 있습니다.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만 자리를 지키는 날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넘어가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하루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해야 할 일이 크게 줄어든 아침이 옵니다.

    처음에는 비어 있는 일정이 보입니다.

    조금 더 지나면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울지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시간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답을 정해주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문은 조금씩 사람 쪽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지?

    오랫동안 다른 질문에 대답하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낯선 물음일 수 있습니다.

    매인 것이 없어지면 자유로운가

    일에 매여 있을 때 자유는 선명해 보입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마감에 쫓기지 않는 것.

    누군가 정한 시간에 움직이지 않는 것.

    내 시간을 내가 쓰는 것.

    그런 날을 기다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매인 것이 줄어든 하루에 들어가면 자유에도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오늘의 일정을 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해도 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할지는 자신이 정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전 열 시입니다.

    나갈 수도 있고 집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도 있고, 별다른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에는 일정이 하루를 끌고 갔다면 이제는 빈 시간이 먼저 나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구별이 생깁니다.

    매이지 않는 것과 가고 싶은 곳을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자유가 없어서 가지 못했던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생겼는데도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겠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 앞에서 질문은 달라집니다.

    나를 붙들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보다, 아무도 붙들지 않을 때 나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시간의 이야기가 어느새 사람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쯤에서 가장 쉬운 답들이 나타납니다.

    운동을 시작합니다.

    취미를 만듭니다.

    사람들을 만납니다.

    여행을 다니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좋은 시간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처음부터 묻고 있던 것은 할 일을 몇 가지 더 만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시간표의 빈칸만 문제라면 일정 몇 개를 넣으면 됩니다.

    월요일에는 운동을 하고, 수요일에는 무언가를 배우고, 금요일에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달력은 다시 채워집니다.

    하지만 달력이 채워졌다는 사실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은 같은 것일까요.

    여기에서 ‘시간을 채우는 것’과 ‘시간을 건네는 것’ 사이에 작은 차이가 보입니다.

    빈칸은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하루를 어디에 건넬지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누구에게 건넬 것인가.

    무엇에 건넬 것인가.

    무엇을 하며 보낸 시간이 이상하게 아깝지 않았는가.

    끝내고 돌아왔는데도 다시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생활 속에는 그렇게 작은 흔적들이 남습니다.

    손이 자꾸 가는 곳

    거창한 계획보다 먼저 나타나는 작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서점에 가면 늘 비슷한 곳에서 걸음이 느려집니다.

    영상 하나를 보다가 관련된 것을 몇 개 더 찾아봅니다.

    망가진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번 들여다봅니다.

    누군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유난히 오래 듣게 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저 생활에 남아 있는 흔적입니다.

    어떤 흔적은 금방 사라집니다.

    어떤 것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멈춥니다.

    그런데 몇 번을 돌아서도 다시 같은 곳에 눈이 가는 일이 있습니다.

    말로는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 시간을 씁니다.

    잘하지 못해도 또 해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들여다봅니다.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질문이 조금 달라집니다.

    ‘내 꿈은 무엇인가’보다 먼저 다른 물음이 떠오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시간을 어디에 자꾸 건네왔는가.

    생각으로 만든 대답과 살아온 시간이 남긴 대답이 같은지 바라보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말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간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처음 들으면 답이 필요한 말처럼 보입니다.

    꿈을 찾아야 할 것 같고, 목표를 세워야 할 것 같고, 새로운 취미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질문들이 겹쳐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것인지.

    예전에 원했던 것과 지금 원하는 것이 달라진 것인지.

    해야 하는 일을 먼저 살아오느라 이 질문 자체가 낯선 것인지.

    직접 해보지 않아 아직 모르는 것인지.

    같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라는 말 아래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그래서 이 말 하나만으로 그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정할 수 없습니다.

    꿈이 부족하다고도, 의지가 부족하다고도, 목표가 필요하다고도 곧장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먼저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간은 생겼는데 그 시간을 어디에 건넬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빈 달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 달력을 살아갈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은 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시간이 없을 때에는 시간이 생기면 많은 것이 분명해질 것 같았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가고 싶었던 곳에 가고, 미뤄둔 것을 시작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을 만들어주어도 그 안에 들어갈 답까지 함께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오래 하고 싶은지.

    무엇에 내 하루를 건네고 싶은지.

    그것은 빈 시간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어 있는 시간이 전에 잘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는 날이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줄어든 자리에서 남는 것은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만이 아닙니다.

    그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한 층 아래에 있던 물음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꽤 오래 물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느라 수많은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질문이 앞에 놓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여전히 대답이 나오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은 한 번 더 깊어집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알고 살아왔는가.

    시간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말.

    처음에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관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오래 들여다보고 나니 그보다 조금 더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빈 것은 시간표였는데,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내가 나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내 시간을 어디에 건네며 살 것인가.

  • 퇴직 후 할 일이 없을 때, 왜 마음까지 허전해질까

    퇴직 후 할 일이 없을 때, 왜 마음까지 허전해질까

    퇴직한 다음 날 아침에도 눈은 비슷한 시간에 떠집니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몸은 먼저 아침을 알아봅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시간에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섰던 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출근할 곳이 없습니다.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십니다.
    시계를 봅니다.

    아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어제까지라면 이미 길 위에 있었을 시간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헤아리거나, 도착하자마자 처리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시간이 비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늦은 아침 자체가 낯섭니다.

    출근 시간을 맞출 일도 없고, 오전에 처리할 업무도 없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흐릅니다.

    오전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도 오후가 많이 남습니다.
    휴대전화가 유난히 조용한 날도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뭘 하지?

    아주 평범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을 오래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말이 따라옵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지?

    직장을 떠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수십 년입니다.

    퇴직 날짜 하나만으로 그 긴 시간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은 퇴직했는데 마음은 아직 출근하고 있다

    퇴직하는 날에는 여러 가지가 분명하게 끝납니다.

    출입증을 반납합니다.

    책상을 비웁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달력에는 퇴직일이라는 정확한 날짜도 남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몸은 어제까지 하던 일을 기억하는 듯 움직입니다.

    전과 비슷한 시간에 눈이 떠집니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데도 시계를 봅니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빠뜨린 것처럼 머릿속으로 오늘의 일정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몸은 출근하지 않는데 생활에는 어제의 시간표가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반복한 하루에는 출퇴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몇 시에 움직여야 하는지, 무엇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 누구의 연락에 답해야 하는지, 어느 시간까지 일을 마쳐야 하는지가 하루의 순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규칙으로 살아온 사람이 이제 출근하지 않습니다.

    직장을 떠나는 일은 하루에 끝났지만, 어제까지의 생활과 오늘의 생활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아침이 왔지만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계는 전과 같은 속도로 가는데 그 시간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졌습니다.

    그 낯선 아침 앞에서 지나온 생활의 흔적을 봅니다.

    직장이 가져간 것보다 직장에 두고 온 것이 더 많을 때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직장이 내 시간을 얼마나 차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합니다.

    출퇴근에도 시간을 씁니다.

    집에 돌아온 뒤까지 일 생각이 이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서 퇴직을 앞두고 이제 내 시간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막상 직장을 떠난 뒤에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곳에 무엇을 두고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침이면 갈 곳이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 자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맡은 일이 있었고, 그 일을 두고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름 뒤에는 직함이 붙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직업을 말하면 짧은 대답 하나로 자신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삼십 년, 사십 년 가까이 이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면서 하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생활이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 맡은 역할은 자신을 설명하는 여러 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퇴직합니다.

    일이 끝납니다.

    직함을 내려놓습니다.

    매일 출근하던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월급을 받던 일자리 하나만이 아닙니다.

    하루의 순서가 달라졌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늘 맡아오던 몫이 없어졌고, 자신을 소개할 때 먼저 꺼내던 말 하나도 사라졌습니다.

    시간표에 생긴 빈칸보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할 일이 없다”는 말 아래에 있는 것

    퇴직한 사람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면 주변에서는 해결책을 먼저 꺼내기도 합니다.

    운동을 해보라고 합니다.

    취미를 만들고, 여행을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라는 말도 듣습니다.

    그런 일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 일이 없다”는 말에는 하루의 일정만 들어 있을까요.

    정말 그리운 것이 일인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아침마다 마주치던 얼굴이 있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있습니다.

    자신이 책임지던 일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 판단을 기다렸고, 내가 맡아야 하는 몫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책상 하나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크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매일 앉았던 ‘내 자리’였습니다.

    “할 일이 없다”는 같은 말 안에도 서로 다른 빈자리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운 것인지,

    맡았던 일이 그리운 것인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던 순간이 그리운 것인지,

    매일 반복하던 하루의 질서가 그리운 것인지.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유입니다.

    내가 비었다고 느끼는 이 자리에는 그동안 무엇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직장에서는 내가 맡은 일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무엇을 잘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압니다.

    어떤 일을 맡길 수 있는지도 압니다.

    문제가 생기면 경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비교적 분명합니다.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해온 사람이 퇴직합니다.

    전화가 전보다 줄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판단을 구하는 사람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내 몫이었던 일을 이제 다른 사람이 할 것입니다.

    그 장면 앞에서 일의 빈자리와는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인가?

    오랫동안 무엇을 하고, 책임지고, 결과를 만들어내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 질문은 가볍지 않습니다.

    잘하면 인정받았습니다.

    성과는 평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맡은 일을 끝내는 것이 책임을 다했다는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이 길었던 사람에게 직장에서의 역할과 자기 자신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었을까요?

    직함은 어느 날 되돌려 줍니다.

    그러나 직함을 달고 살아온 시간은 되돌려 줄 곳이 없습니다.

    실패하며 배운 것,

    사람을 만나며 알게 된 것,

    어려운 순간에 선택했던 것,

    자기 몫이라고 생각해 책임졌던 것.

    그것들은 어디로 갈까요?

    역할이 끝난 자리에서 사람까지 함께 끝나는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질문은 반대편을 향합니다.

    역할이 끝난 뒤에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퇴직 이후, 내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의 많은 부분에는 이미 일정이 들어 있습니다.

    아침이면 갈 곳이 있습니다.

    회의 시간이 있습니다.

    마감도 있습니다.

    내가 정하지 않았어도 오늘 해야 하는 일이 앞에 놓입니다.

    퇴직한 뒤에도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시간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생업을 찾아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퇴직 전보다 오히려 다른 책임이 커진 사람도 있습니다.

    퇴직 이후의 시간을 모두 ‘자유시간’이라고 한정 짓지 않습니다.

    다만 출근과 직장 업무가 차지하던 시간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시간이 놓입니다.

    누가 정해준 회의도 없습니다.

    업무 마감도 없습니다.

    직장이라는 시간표가 빠져나간 자리에 스스로 정해야 하는 시간이 생깁니다.

    그 앞에서 “오늘 뭐 하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오늘의 일정만 묻는 말일까요?

    아니면 다른 질문까지 들어 있을까요?

    남이 정해주던 일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하루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직장에서는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것이 하루를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시간 자체를 바라보는 눈도 흔들립니다.

    많이 했는가?

    쓸모 있게 보냈는가?

    무언가 남겼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가?

    퇴직 이후의 긴 하루 앞에서 이런 질문들이 나란히 놓입니다.

    빈자리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큰 가구를 오랫동안 놓아두었던 방에서 가구를 치우면 방이 이상하게 넓어 보입니다.

    바닥에는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가구에 가려져 있던 벽은 다른 곳과 색이 조금 다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 한꺼번에 드러납니다.

    비어 있는 곳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빈자리를 보면 다른 가구를 가져다 놓는 일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전에는 가려져 있던 것도 눈에 들어옵니다.

    벽이 보입니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디까지 닿는지도 보입니다.

    방이 생각보다 넓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퇴직 뒤의 빈자리도 이 모습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직장이 있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곳에 무엇을 새로 놓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새로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일 수도 있습니다.

    배움이나 오래 미뤄두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은 시간이 그 자리에 놓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져다 놓을 것인가를 묻다 보면 또 하나의 질문과 만납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무엇이 있었는가?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있었습니다.

    책임이 있었습니다.

    생활의 리듬이 있었습니다.

    인정받았던 순간도 있었고 견뎌야 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라면, 지금 보이는 빈 공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빈자리는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곳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오래 머물렀다는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는 곳이기도 합니다.

    직함을 내려놓고 남는 질문

    처음 직장 문을 들어서던 날을 기억합니다.

    직함도 없었습니다.

    경험도 많지 않았습니다.

    작은 일 하나를 배우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경험이 쌓였습니다.

    책임이 커졌습니다.

    이름 뒤에 직함이 붙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직함을 내려놓습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업무 목록과 경력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책임지려 했는지,

    어떤 순간에 보람을 느꼈는지,

    무엇을 지키려고 어려운 선택을 했는지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젊은 날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돌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삼십 년, 사십 년을 살아온 사람은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금의 자리에서 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는가?

    직함이 답해주던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 질문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일을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퇴직은 경력의 마지막 줄을 적는 일로 끝났지만, 그 경력을 살아낸 사람에게는 아직 물을 것이 남아 있습니다.

    맡았던 역할과 앞으로의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오며 스스로 택한 일도 했고, 그저 내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선택했습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먼저 놓은 날도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보다 책임져야 하는 일을 앞세운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결정한 일과 형편 때문에 받아들인 일이 한 사람의 삶 안에 함께 있습니다.

    퇴직했다고 현실적인 책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계속 자기 시간을 내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퇴직은 한숨 돌릴 수 있는 때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생업을 찾아야 하는 때입니다.

    퇴직 이후의 삶을 한 가지 모습으로 그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서로 다른 형편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가는 것만은 같습니다.

    하루가 오고 또 하루가 갑니다.

    그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을 나는 어디에 쓰며 살아갈 것인가?

    그 답이 반드시 새로운 직업일 이유는 없습니다.

    새로운 직함일 이유도 없습니다.

    반대로 다시 일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그 선택이 덜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답이 옳으냐는 판정이 아니라 그 시간이 누구의 삶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남은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삶의 방향을 묻습니다.

    그 방향에는 명함에 적을 이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긴 하루 앞에서 시간을 다시 묻다

    퇴직 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시간인 사람도 있습니다.

    오후 두 시인데 예정했던 일이 거의 끝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하루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그 시간을 ‘남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순간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전에도 하루 안에 있었습니다.

    출퇴근에 썼습니다.

    회의에 썼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정에 맞추는 데 썼습니다.

    맡은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도 썼습니다.

    그 시간 역시 내 삶이었습니다.

    퇴직했다고 과거의 시간이 빼앗긴 시간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 앞에 놓인 시간의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직장에서는 같은 시간 안에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정해진 기한도 있었습니다.

    성과라는 기준도 있었습니다.

    퇴직한 이후에는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시간이 생깁니다.

    천천히 걷는 한 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오래 이야기하는 오후가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새 해가 기우는 날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이런 시간을 업무 성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하루에서는 어떨까요?

    무언가를 만들어낸 시간만 제대로 보낸 시간인가?

    누군가에게 보여줄 결과가 없는 하루는 빈 하루인가?

    나는 그동안 시간을 무엇으로 판단하며 살아왔는가?

    길어진 오후는 때때로 그 질문을 눈앞에 놓습니다.

    역할이 끝난 자리에서

    예전 동료들의 소식을 들으며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는 날이 있습니다.

    한때 익숙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내가 하던 일을 다른 사람이 이어갑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겹칩니다.

    그때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묻게 됩니다.

    퇴직으로 끝난 것은 한 시절 내가 맡았던 자리입니다.

    직함도 그 자리에 두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을 그곳에 놓고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선택이 있었습니다.

    그 선택으로 얻은 것도 있고 놓친 것도 있습니다.

    잘한 일도 있고 다시 생각나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지나온 사람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역할 하나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할까요?

    또 다른 역할을 찾아야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직함이 없는 나는 이전의 나보다 적은 사람일까요?

    이미 많은 장을 써온 사람이 다음 장을 펼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앞에 쓴 이야기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음 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 빈 페이지 앞에 같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아직 무엇을 담을지 정하지 않은 하루

    다시 아침입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시계를 봅니다.

    아직 아홉 시입니다.

    어제까지의 시간표라면 이미 많은 일이 시작되었을 시간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오늘은 할 일이 없는 하루인가?

    아니면,

    아직 무엇을 담을지 정하지 않은 하루인가?

    두 문장은 같은 시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곳은 조금 다릅니다.

    ‘할 일이 없다’는 말은 비어 있는 곳을 봅니다.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 빈자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걷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일을 시작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하루가 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퇴직 이후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루는 각자의 형편 속에서 흘러갑니다.

    그 하루 앞에 선 사람에게 남는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오늘 나는 무엇에 시간을 건넬 것인가?

    퇴직 후,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길

    평생 우리는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살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선택이 가족에게 필요한가?

    내가 맡은 자리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질문들에 답하며 살아오는 동안 뒤로 밀렸던 질문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가?

    퇴직한 뒤 어느 아침에는 하던 일이 없습니다.

    매일 가던 직장도 없습니다.

    전화가 조용한 날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함 뒤에서 오랫동안 자기 몫을 감당하며 살아온 내가 있습니다.

    직함을 내려놓고 나니 그동안 직함이 대신 대답해주던 질문이 다시 남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아깝지 않았는가?

    누구와 있을 때 내 모습으로 살아 있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이런 질문들이 먼저 떠오르는 날도 있습니다.

    퇴직 전에는 아침마다 갈 곳이 있었습니다.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도 대체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퇴직한 뒤의 어느 아침에는 그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시계를 봅니다.

    아직 아홉 시입니다.

    하루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 앞에서 “오늘은 뭘 하지?”라고 묻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의 빈칸을 묻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오래 들여다보면 그 질문 속에는 지나온 시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그 일은 내게 무엇이었는가?

    그 일을 하지 않는 나는 나를 무엇으로 설명하는가?

    그리고 이제,

    내 앞에 놓인 이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퇴직 후의 허전함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답보다 이런 질문들인지도 모릅니다.

    아침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시계는 가고 있습니다.

    출근할 시간은 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다시 시계를 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계보다 조금 오래,

    나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