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푸른 산과 초원을 따라 이어지는 길

작성자

카테고리: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순서를 따릅니다.
이름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합니다.
어디에서 일하는지 덧붙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관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몇 마디면 설명이 끝납니다.

상대도 그 말을 들으면 나를 조금 알게 된 것처럼 느낍니다.
직업을 알면 그 사람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어디에서 보내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부모로 불립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책임자로 불립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선배이고, 다른 자리에서는 누군가에게 일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이름이 붙습니다.

그 이름들은 호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려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주고,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어느 정도 정해줍니다.

오랫동안 같은 역할을 맡고 살면 그 이름은 더욱 익숙해집니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릅니다.
나도 나를 그렇게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맡은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계가 흐려집니다.

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 일이 나를 설명하는 사람이 된 것인가.

역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이 차이를 굳이 묻지 않습니다.

질문은 역할이 흔들릴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소개해왔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격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역할에서 나옵니다.

“저는 교사입니다.”
“저는 사업을 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상한 대답은 아닙니다.

역할은 실제로 한 사람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그 말이 사람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입니다.

교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교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표라는 말을 들으면 맡은 자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말을 들으면 관계는 알 수 있습니다.
그 관계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역할의 이름은 사람을 빠르게 설명하지만 깊게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짧은 설명을 오래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나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나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역할은 자기소개를 넘어 자기 이해의 언어가 됩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동사가 명사로 바뀝니다.

하는 일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됩니다.

역할은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

역할을 명함에 적힌 글자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역할에는 시간이 들어갑니다.

처음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배우고, 사람과 부딪히고, 다시 판단합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이 몸에 익습니다.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지 짐작합니다.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도 배웁니다.

그렇게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고 삼십 년을 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이 사람을 그냥 지나가지는 않습니다.

책임지는 일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대하는 방식이 생깁니다.
사람을 많이 만난 사람에게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이 생깁니다.
수없이 선택해온 사람에게는 판단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좋은 흔적만 남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을 자신이 확인해야 안심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몰아붙이는 버릇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역할은 사람의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역할을 살아낸 시간이 사람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떤 역할이 끝났을 때 “그건 원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일을 했던 사람이 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결정했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실수했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책임졌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역할을 떼어내고 나면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사람이 안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역할을 살아온 세월도 이미 내 삶이기 때문입니다.

역할과 나는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한 사람이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퇴직하는 날 교사라는 직책은 끝납니다.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 동안 사람을 가르치며 만들어진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차리는 눈이 남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말하는 습관도 남을 수 있습니다.

교사라는 직함은 사라졌습니다.

교사로 살아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역할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일까요.

경계를 한 줄로 긋기는 어렵습니다.

역할이 옷이라면 벗으면 됩니다.

오랫동안 살아낸 역할은 옷보다 흔적에 가깝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흔히 듣는 말 하나를 다시 보게 됩니다.

“직함을 내려놓고 진짜 나를 찾으십시오.”

직함을 내려놓는다고 그 뒤에서 손대지 않은 ‘진짜 나’가 걸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직함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도 내 삶입니다.

그 시간에 만들어진 판단과 습관과 관계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가짜라고 부르면 내 삶의 상당 부분까지 가짜가 됩니다.

반대편도 맞지 않습니다.

삼십 년 동안 대표였다고 해서 대표가 그 사람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대표가 되기 전에도 그 사람은 살았습니다.
대표라는 자리를 떠난 뒤에도 살아갑니다.

역할은 나를 만들지만 나를 다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질문이 어려워집니다.

역할을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같은 역할을 살아도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같은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일은 비슷합니다.
직함도 같습니다.
책임의 범위도 비슷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먼저 사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은 일을 먼저 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충분한 근거를 확인한 뒤에야 생각을 바꿉니다.

역할의 이름만으로는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역할도 같습니다.

같은 부모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삶이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가 다릅니다.
어디까지 기다리는지도 다릅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싶은지도 다릅니다.

역할은 같지만 역할을 살아내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을 바라보는 질문도 달라집니다.

무슨 일을 했는가만 물어서는 한 사람에게 충분히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 일을 어떤 사람으로 살아냈는가.

같은 책임을 맡고도 사람들은 다른 흔적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책임보다 권한을 먼저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 사람의 태도를 기억합니다.
누군가는 직함만 기억됩니다.

직함에는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지만 그 자리를 지나간 사람은 같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명함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역할이 끝난 뒤에도 남습니다.

살아온 방식이 나인가

여기까지 오면 역할보다 그것을 살아낸 방식이 사람에게 더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직업보다 깊은 설명처럼 들립니다.

“나는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그렇습니다.

직함은 사라져도 이런 태도는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방식도 변합니다.

젊었을 때 모든 일을 빠르게 결정하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오래 듣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 손으로 해야 마음이 놓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요구를 먼저 살피던 사람이 어느 시기부터 자기 몫을 분명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역할을 살아내며 변하고, 역할을 떠난 뒤에도 변합니다.

그렇다면 성격이나 습관 하나를 붙들고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선택만으로 자신을 고정하면 오늘 달라질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직함으로 대답하면 너무 좁습니다.

성격으로 대답해도 부족합니다.

능력으로 대답하면 능력이 달라졌을 때 흔들립니다.

관계로 대답하면 관계가 달라졌을 때 다시 물어야 합니다.

살아온 방식으로 대답해도 사람이 변한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무엇 하나를 붙들 때마다 그것은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부는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어려운 까닭은 답을 몰라서만은 아닙니다.

변하는 사람을 변하지 않는 한 문장에 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명사는 사람을 멈춰 세운다

사람을 소개하는 말에는 명사가 많습니다.

교사.
대표.
부모.
작가.
직장인.
전문가.

명사는 편리합니다.

“저는 대표입니다.”

한 문장이 많은 설명을 대신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무엇을 맡았는지도 알려줍니다.

역할은 사람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명사에는 시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사’라는 두 글자 안에서는 첫해의 교사와 삼십 년째의 교사가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부모’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아이를 품에 안았던 사람과 자녀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같은 명사가 붙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사람은 그 안에서 계속 변했습니다.

명사는 그 변화를 멈춰 세운 채 한 이름으로 묶습니다.

그래서 역할의 이름은 편리하면서 위험합니다.

오랫동안 같은 명사로 자신을 부르다 보면 그 이름이 변하지 않는 만큼 자신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대표입니다.

나는 교사입니다.

나는 부모입니다.

문장은 단단합니다.

사람은 그 문장 안에서도 계속 달라집니다.

어느 날 역할이 끝나면 명사가 먼저 사라집니다.

그제야 보입니다.

그 이름 안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변해왔는가.

자기소개가 과거형이 되는 날

퇴직은 이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전날까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합니다.”

퇴직한 뒤에는 문장이 달라집니다.

“전에 이런 일을 했습니다.”

문장이 과거로 갑니다.

평생 해온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현재형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큽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던 말이 이제 이력이 됩니다.

“무슨 일 하십니까?”

예전에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문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잃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필요가 생깁니다.

직함이 사라졌습니다.

그 직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던 방식도 끝났습니다.

두 사건이 함께 일어나니 자신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직함과 그 직함을 살아낸 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퇴직자에게만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번 현재형이던 자기소개를 과거형으로 바꿉니다.

오랫동안 맡던 책임을 내려놓습니다.

잘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가족 안에서 자기 몫이 달라집니다.

한때 자신을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믿었던 말이 더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새로운 이름을 찾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이름을 얻는 것과 자신을 다시 아는 것은 같은 일일까요.

새 이름은 질문을 끝내는가

이전 역할이 끝난 뒤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자기소개가 쉬워집니다.

“요즘은 이런 일을 합니다.”

현재형이 돌아옵니다.

그 문장이 생겼다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까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새 역할은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사람을 다시 바꿀 것입니다.

이전 역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역할도 끝날 수 있습니다.

다시 다른 이름이 필요해집니다.

역할이 바뀔 때마다 나를 처음부터 새로 정해야 한다면 한 사람의 삶은 여러 개의 명함 사이에서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업이 바뀌어도 이전의 삶을 내 삶이라고 부릅니다.

역할이 달라져도 과거의 선택을 내가 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지 않은데도 둘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변한 것이 많은데 무엇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 수 있습니다.

역할이 바뀌어도 무엇이 이어지는가

“역할을 모두 빼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에게서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뺍니다.

직함을 뺍니다.

관계를 뺍니다.

능력을 뺍니다.

계속 빼다 보면 언젠가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나 하나가 남을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삶은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책임진 일이 나를 바꾸었습니다.

함께 살아온 사람이 나를 바꾸었습니다.

실패했던 일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오랫동안 반복한 선택도 지금의 나에게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빼기가 아니라 이어짐 쪽에 놓여야 합니다.

역할을 모두 없애면 무엇이 남는가가 아니라, 역할이 바뀌어도 무엇이 이어지는가.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릅니다.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달라졌습니다.

맡은 역할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십 년 전의 실패를 말할 때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잘못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변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어짐도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는 둘이 함께 있습니다.

역할은 그 흐름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어떤 역할은 오래가고 어떤 역할은 짧게 끝납니다.

역할이 바뀌었다고 삶의 주인이 매번 교체되지는 않습니다.

역할은 장면을 바꾸지만 그 장면들을 살아온 삶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하나의 직함이나 성격이나 능력에서 찾으려는 시도부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의 완성된 답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정답 하나를 찾으려 합니다.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 하나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장을 발견하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내가 자신을 설명한 문장과 예순 살의 내가 자신을 설명하는 문장이 같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사이에 실제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달라집니다.

잘하던 일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에 관한 문장도 고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딘가에 완성된 채 숨어 있어서 발견만 기다리는 답과는 다릅니다.

살아가는 동안 선택하고, 달라지고, 이전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면서 계속 이어지는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완성된 자기소개가 없습니다.

그 대신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맡았던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살아낸 방식이 있습니다.

달라진 생각이 있습니다.

버린 것도 있고 새로 붙든 것도 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한 사람의 삶이라고 부르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역할 하나는 그 긴 시간을 잠시 설명해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삶은 그 자리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역할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내 역할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역할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직함을 벗고 진짜 나를 찾으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역할을 살아온 시간이 이미 나에게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역할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역할과 상관없는 순수한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맡았던 역할에 영향을 받고, 그 역할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내고, 그 안에서 달라지고, 어느 날 그 이름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여전히 자기소개가 필요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장이 과거형이 된 뒤에도 그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나라고 불러왔는가.

vidI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