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human0101

  • 가을여행, 어디까지 할인될까

    가을여행, 어디까지 할인될까

    10월·11월 숙박·기차·항공 할인 한눈에 보기

    가을이 깊어지면 어디론가 한번 다녀오고 싶어집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루쯤 바람을 쐬고 돌아와도 되고, 한적한 곳에서 하룻밤 머물다 와도 좋습니다.

    문제는 비용입니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골라 날짜를 넣어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숙박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기차를 타면 승차권이 필요하고 자동차로 가면 기름값이 듭니다. 식사 몇 번 하고 커피 한 잔 마시는 돈까지 더하면 1박 2일 여행도 적지 않은 지출이 됩니다.

    올해 10월과 11월 국내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예약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하는 ‘2026 여행가는 가을’입니다.

    자동차, 기차, 항공, 렌터카, 숙박, 캠핑과 국내 여행상품에 여러 혜택이 마련돼 있습니다. 여행지역에 따라서는 사용한 여행경비의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돌려받을 수도 있습니다. 10월부터는 농촌여행 할인도 확대됐습니다.1) 코리아

    다만 ‘최대 14만 원’, ‘운임 100% 상당’, ‘최대 50%’ 같은 숫자만 보고 예약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혜택은 결제할 때 바로 할인되고, 어떤 것은 여행을 마친 뒤 포인트나 할인권으로 돌아옵니다. 출발하기 전에 신청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도도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가고, 어떻게 예약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차로 간다면 목적지부터 확인하자

    자가용으로 여행한다면 인구감소지역 방문 혜택부터 살펴볼 만합니다.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티맵을 이용해 인구감소지역을 방문하면 조건에 따라 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친환경·안전여행 서약을 하고 인구감소지역을 목적지로 설정한 뒤 30km 이상 주행하면 방문한 기초지자체에 따라 스탬프와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받을 수 있는 포인트는 최대 3만 포인트입니다.

    전기차를 이용하면 2천 포인트, 방문지역에서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이용하면 5천 포인트, 영상 후기를 작성하면 2천 포인트를 추가로 받을 수 있습니다.1) 코리아

    중요한 것은 30km 이상 운전한다고 누구나 포인트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목적지가 대상 인구감소지역이어야 합니다.

    가고 싶은 곳이 두세 군데 있다면 그 가운데 대상 지역이 있는지 먼저 살펴보는 편이 낫습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대상이라면 같은 여행을 하면서 혜택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조건이 또 다릅니다.

    수도권을 제외한 64개 연안 시·군·구에서 하이브리드·전기·LPG 차량을 24시간 이상 빌리면 1만 원, 48시간 이상이면 2만 원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는 각각 5천 원과 1만 원입니다.

    다만 이 렌터카 할인은 다른 혜택과 달리 사용기간이 10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입니다. 11월 여행을 준비한다면 이 혜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1) 코리아

    기차를 탄다면 ‘100%’의 의미부터 확인하자

    이번 가을 혜택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숫자는 아마 100%일 겁니다.

    코레일과 협약한 인구감소지역 41곳의 자유여행상품을 이용하고 지정 관광지를 방문해 인증하면 구매한 열차 운임의 100% 상당 할인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1) 코리아

    여기서 ‘할인권’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승차권을 0원에 구입하는 무료승차가 아닙니다. 여행과 인증 등 정해진 조건을 충족한 뒤 운임 상당의 할인권을 받는 방식입니다.

    이와 별도로 서해금빛열차, 남도해양열차, 동해산타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 정선아리랑열차 등 5개 테마열차에는 50% 할인 혜택이 있고, 내일로 패스는 2만 원 할인됩니다.

    열차 관련 이용기간은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입니다.1) 코리아

    기차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일반 승차권부터 결제하기 전에 목적지가 대상 지역인지, 이용할 수 있는 여행상품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비행기를 탄다면 제주와 내륙을 나눠서 보자

    국내선 항공편에도 혜택이 있습니다.

    네이버 항공권을 통해 행사 대상 국내 왕복 항공권을 구매하면 내륙 노선은 1인당 1만 원, 제주 노선은 1인당 5천 원의 네이버페이 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예약할 때 최대 4명까지 적용되므로 내륙 노선은 예약 한 건당 최대 4만 원, 제주 노선은 최대 2만 원입니다. 일부 노선은 제외됩니다.1) 코리아

    이 역시 항공권을 살 때 가격이 바로 내려가는 할인과는 다릅니다.

    조건을 충족하면 네이버페이 포인트로 받는 방식입니다.

    같은 1만 원이라도 즉시 할인인지, 포인트인지, 다음에 사용하는 할인권인지에 따라 실제 사용방법은 달라집니다.

    여행 혜택을 볼 때 금액만큼 지급방식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숙박은 예약보다 할인권 확인이 먼저다

    여행비 가운데 부담이 큰 항목은 숙박입니다.

    이번 가을에는 비수도권을 대상으로 숙박할인권 약 8만 장이 마련됐습니다. 9월 22일 오전 10시부터 참여 온라인여행사를 통해 1인 1매씩 선착순으로 발급하고 있으며, 이용기한은 11월 8일까지입니다.

    지역마다 참여 여부와 배포 수량이 다릅니다.1) 코리아

    특히 올해는 섬 지역 숙박할인권이 처음 도입됐습니다.

    대상 섬 지역에서 7만 원 이상 숙박상품을 예약하면 5만 원, 7만 원 미만 상품은 3만 원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1) 코리아

    8만 원짜리 대상 숙소에 5만 원 할인권을 적용할 수 있다면 실제 부담은 크게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섬에 가기만 하면 5만 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 지역과 숙박시설, 참여 온라인여행사, 남아 있는 할인권을 확인해야 합니다. 선착순이기 때문에 물량이 소진될 수도 있습니다.

    숙박은 숙소 결제 → 할인 검색보다 할인 가능 여부 확인 → 숙소 예약 순서가 낫습니다.

    캠핑을 간다면 1만 원 할인도 있다

    호텔이나 펜션 대신 캠핑을 계획했다면 ‘만만한 캠핑’ 할인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인액은 1만 원입니다.

    할인권은 11월 28일까지 캠핑톡과 캠핏에서 발급받을 수 있고,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이용하는 등록야영장 상품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1) 코리아

    5만 원짜리 숙박할인 옆에 놓으면 1만 원은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미 가려고 했던 캠핑에서 덜 쓰는 1만 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혜택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여행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원래 쓸 돈 가운데 얼마를 덜 쓸 수 있는가를 보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농촌여행은 10월부터 선택지가 더 늘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새로 챙겨볼 혜택도 생겼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매월 둘째 주에 운영하던 ‘농촌관광 가는 주간’을 올해 10월과 11월에는 두 달 전체로 확대했습니다.2) 코리아

    인구감소·관심지역 88개 시·군에서 이용할 수 있는 농촌투어패스는 최대 50%까지 할인됩니다.

    농촌투어패스를 구매하면 대상 지역으로 운행하는 고속·시외버스 요금을 1만 원 한도에서 최대 40%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코레일톡에서 농촌투어패스를 구매하면 20개 인구감소지역으로 가는 열차 운임도 50% 할인됩니다.2) 코리아

    농촌체험 할인도 상품에 따라 다릅니다.

    소규모 농촌체험 프로그램은 14개 지역 15개 상품으로 확대돼 상품별 40~50% 할인됩니다. 온라인 결제 플랫폼에 등록된 농촌체험·숙박 180개 상품은 체험 최대 30%, 숙박 최대 20% 할인됩니다. 별도의 농촌여행 상품 가운데는 최대 50% 할인되는 상품도 있습니다.2) 코리아

    농촌형 워케이션은 전국 13곳에서 운영합니다. 평일 기준 하루 5만 원씩 최대 5일까지 할인하고 여행자보험 가입도 지원합니다.2) 코리아

    혜택이 많아 보이지만 모두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적용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려던 지역과 이용하려던 상품이 해당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할인 때문에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고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여행과 지원되는 여행이 겹치는지를 찾는 것.

    그때 지원은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비용을 덜어주는 수단이 됩니다.

    여행경비 절반을 돌려받는 지역도 있다

    이번 가을 지원 가운데 금액이 큰 편에 속하는 것이 ‘지역사랑 휴가지원’입니다.

    하반기 사업 시행지역을 방문하면 인정되는 여행경비의 50%를 모바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은 최대 10만 원, 청년은 최대 14만 원입니다.1) 코리아

    대상 지역도 정해져 있습니다.

    강원 화천군, 경남 고성군·산청군·함양군·밀양시·거창군, 경북 안동시·영천시, 충남 서천군·태안군, 전남 장흥군·영광군·완도군입니다.1) 코리아

    그리고 무엇보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여행계획 신청 → 지자체 승인 → 실제 여행·지출 → 증빙자료 제출 → 최종 확인 → 모바일 지역사랑상품권 환급

    입니다.

    여행을 먼저 다녀온 뒤 영수증만 모아 신청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출발하기 전에 여행계획을 신청하고 지자체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1) 코리아

    또 통장으로 현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경비 50%’라는 숫자보다 사전 신청과 지급방식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행상품 자체를 할인받는 방법도 있다

    교통편과 숙박을 따로 예약하는 것이 번거롭다면 국내 여행상품 할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마켓에서는 대상 국내 여행상품을 최대 50%, 5만 원 한도에서 할인하고 있습니다. 구입한 대상 상품의 이용기간은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입니다.

    노동자 휴가지원 사업 참여자라면 전용 온라인몰 ‘휴가샵’에서도 숙박·입장권·교통편 등 대상 여행상품을 최대 50%, 5만 원 한도에서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1) 코리아

    여기에서도 ‘50%’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원래 이용하려던 상품인지, 할인한도는 얼마인지, 대상자 조건이 있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내 여행에는 어떤 혜택이 맞을까

    여러 제도를 전부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하려는 여행 방법부터 찾으면 됩니다.

    여행 방법먼저 확인할 혜택혜택 방식
    자가용인구감소지역 방문최대 3만 포인트
    렌터카대상 연안지역 친환경차최대 2만 원 할인, 제주 최대 1만 원
    기차인구감소지역 자유여행상품운임 100% 상당 할인권
    관광열차5개 테마열차50% 할인
    내일로내일로 패스2만 원 할인
    국내선 항공대상 왕복 항공권네이버페이 포인트
    비수도권 숙박숙박할인권1인 1매·선착순
    섬 숙박대상 섬 지역최대 5만 원 할인
    캠핑대상 등록야영장1만 원 할인
    농촌여행투어패스·교통·체험·숙박상품별 할인
    지역 체류지역사랑 휴가지원경비 50% 상품권 환급
    국내 여행상품대상 기획상품최대 50%, 5만 원 한도

    이 표에 있는 금액을 모두 더해 내가 받을 수 있는 지원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마다 대상지역과 기간, 신청방법이 다르고, 여러 혜택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도 이용하려는 상품별로 확인해야 합니다.

    이 표는 받을 돈을 계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여행이라면 어디부터 확인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한 표입니다.

    큰 숫자보다 세 가지를 먼저 보자

    여행 할인 안내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숫자입니다.

    100%, 50%, 5만 원, 10만 원, 14만 원.

    하지만 실제로 내 여행비를 줄이는 것은 그 숫자 뒤에 붙어 있는 조건입니다.

    확인할 것은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첫째, 내가 대상인가.

    여행지역과 교통수단, 예약하려는 상품이 지원대상에 들어가는지 봅니다.

    둘째, 언제 신청해야 하는가.

    결제 전에 할인권을 받아야 하는지, 여행 전에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 확인합니다.

    셋째, 무엇으로 받는가.

    즉시 할인인지, 포인트인지, 할인권인지, 지역사랑상품권인지 확인합니다.

    이 세 가지만 구분해도 ‘100%’를 무료승차로 오해하거나 ‘50% 환급’을 여행 뒤에 신청하면 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이번 가을에는 예약 순서를 한번 바꿔보자

    보통 여행은 목적지를 정하고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한 뒤 출발합니다.

    올가을에는 그 사이에 한 단계만 넣어보면 좋겠습니다.

    목적지 결정 → 받을 수 있는 혜택 확인 → 신청·할인권 조건 확인 → 예약

    자동차로 간다면 목적지가 인구감소지역인지 살펴봅니다.

    기차를 탄다면 자유여행상품 대상인지 확인합니다.

    숙박한다면 결제하기 전에 받을 수 있는 할인권이 남아 있는지 봅니다.

    농촌으로 간다면 투어패스와 교통·체험·숙박상품을 확인합니다.

    지역사랑 휴가지원 대상지역이라면 무엇보다 사전 신청부터 살펴봅니다.

    해당되는 혜택이 없다면 원래 계획대로 떠나면 됩니다.

    하나라도 있다면 그만큼 여행비가 가벼워집니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여행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할인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던 곳으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행은 내가 가고 싶어서 떠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떠나기로 한 여행이라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모르고 지나칠 이유도 없습니다.

    예약 버튼을 누르기 전 한 번 확인하는 것.

    올가을에는 그 순서 하나만 바꿔도 좋겠습니다.

    각주

    1.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2026 여행가는 가을」 관련 정책 안내, 2026년 9월 15일. 교통·숙박·캠핑·지역사랑 휴가지원·국내여행상품 할인 내용. 코리아
    2. 농림축산식품부, 「가을엔 ‘촌캉스’ 떠나볼까…농촌여행 상품 최대 50% 할인」, 2026년 10월 1일. 농촌투어패스·철도·버스·체험·숙박·워케이션 할인 내용.
  • 오를 땐 새마을호, 내릴 땐 비둘기호

    오를 땐 새마을호, 내릴 땐 비둘기호

    원가는 떨어졌다는데 왜 가격은 그대로일까?

    주유소 앞을 지나다 가격판을 봅니다. 휘발유 가격이 또 올랐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국제유가가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주유소의 숫자를 보고 나니 그 뉴스가 생각납니다.

    “벌써 올랐네.”

    반대일 때는 조금 이상합니다.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졌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이번에는 반갑습니다. 다음에 주유할 때는 조금 싸겠구나 싶습니다.

    며칠 뒤 같은 주유소 앞을 지납니다. 가격판을 봅니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며칠을 더 기다리자 조금 내려갑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닙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름값은 오를 때는 새마을호고, 내릴 때는 비둘기호야.”

    예전에 새마을호는 빠른 열차의 상징이었습니다. 비둘기호는 작은 역마다 서며 천천히 갔습니다.

    가격도 꼭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른다는 소식은 금세 우리 지갑까지 달려오는데, 내린다는 소식은 어느 역엔가 한참씩 머물다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은 주유소에만 있지 않습니다.

    농촌 뉴스에서는 배추가 너무 많이 생산돼 제값을 받기 어렵다며 농부가 멀쩡한 배추밭을 트랙터로 갈아엎습니다. 그런데 마트에 가보면 배추가 헐값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돼지가격이 떨어졌다는 뉴스도 비슷합니다. 축산농가는 어렵다고 하는데 정육점이나 음식점에서 만나는 삼겹살 가격은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습니다.

    국제 곡물가격이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어도 라면과 빵 가격이 다음 날 바로 내려가는 일은 드뭅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올릴 때는 원가가 올라 어쩔 수 없다더니, 원가가 내려갔을 때 그 하락분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누군가 중간에서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는 것일까요.

    기업이나 음식점이 한번 올린 가격을 내리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서로 다른 단계의 가격을 하나의 가격처럼 보고 있는 것일까요.

    “유통비가 있으니까 그렇다”는 설명만으로는 이 답답함이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가격을 올렸던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 하락분은 어디로 가는가.

    그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농민은 싸서 못 팔고 소비자는 비싸서 못 산다

    뉴스 화면에 배추밭이 나옵니다.

    수확을 기다리는 배추가 밭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들어갑니다. 수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배추를 그대로 갈아엎습니다.

    가격이 너무 내려가면 수확하고 선별하고 포장해 출하하는 일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밭에는 배추가 가득한데 시장에 내놓는 일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 장면을 본 소비자는 묻게 됩니다.

    그렇게 배추가 남아돈다면 왜 마트에서는 헐값에 살 수 없을까.

    여기에서 먼저 산지가격과 소비자가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배추 한 포기가 밭에서 마트 계산대까지 오는 길을 따라가 보면 그 이유의 일부가 보입니다.

    산지 → 수확·선별 → 포장 → 운송 → 도매 → 보관·진열 → 소매 → 소비자

    각 단계에는 비용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수확하고 선별합니다. 포장재가 필요합니다. 화물차가 움직입니다. 창고와 매장이 필요합니다. 판매되지 않거나 상해서 버려지는 물량도 생깁니다.

    산지의 배추값이 떨어졌다고 이 비용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농식품부 자료에서도 배추는 산지에서 소비자에게 오는 동안 상당한 유통비용이 발생하는 품목으로 다뤄집니다. 유통비용에는 단순한 이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운송·상하차·포장·감모 등 실제 비용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¹⁾

    그러니 밭의 배추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마트 배추값도 정확히 절반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산지가격이 크게 올랐을 때는 소매가격도 따라 오르는 것 같은데, 산지가격이 크게 떨어졌을 때 그 하락은 소비자에게 언제, 얼마나 전달되는가.

    바로 이 지점부터는 “유통비가 있으니까”라는 말만으로 설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산지가격이 얼마나 움직였는지, 도매가격은 어떻게 변했는지, 소매가격에는 언제 얼마나 반영됐는지를 나누어 봐야 합니다.

    같은 배추 안에도 가격은 하나가 아닙니다.

    2. 돼지값은 떨어졌는데 삼겹살은 얼마나 내려갔을까

    돼지고기로 가면 이 문제가 실제 숫자로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2024년 설 명절 무렵 축산물품질평가원이 전년 같은 시기와 비교한 자료를 보면 돼지고기 도매가격은 13.1% 하락했습니다.

    소비자가격도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락 폭은 **5.7%**였습니다.²⁾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격도 실제로 내려갔다는 사실입니다.

    “도매가격이 떨어져도 소비자가격은 절대로 안 내려간다”고 말하면 틀립니다.

    다만 도매단계와 소비단계에서 나타난 하락 폭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13.1%가 5.7%만큼만 ‘전달됐다’고 단순 계산해서도 안 됩니다.

    도매가격과 최종 소비자가격은 구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도축되고 부위별로 나뉩니다. 운송되고 냉장 보관됩니다. 소매점에서는 매장비와 인건비가 들어갑니다.

    음식점으로 가면 더 많은 것이 붙습니다.

    고깃집이 파는 것은 돼지고기 원물만이 아닙니다. 고기를 보관하고 손질합니다. 불을 사용합니다. 상추와 마늘, 쌈장과 반찬이 나옵니다. 사람이 주문을 받고 테이블을 정리합니다. 임대료와 전기·가스요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돼지가격이 10% 떨어졌다고 음식점 삼겹살 1인분 가격도 10% 내려야 한다고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비자의 질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깃값이 크게 올랐을 때 음식점에서 “원가가 올라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면, 시간이 지나 그 원가가 충분히 내려왔을 때는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변화는 지금 판매가격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

    3. 원재료는 파도처럼 움직이고 메뉴판은 계단처럼 움직인다

    돼지고기 시세는 계속 움직입니다. 배추도 그렇고 국제유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음식점 메뉴판이나 공산품 가격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 고깃값이 8% 올랐다고 삼겹살 1인분을 바로 8% 올리고, 다음 달 5% 떨어졌다고 다시 5% 내리는 식으로 가격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원재료 가격이 파도라면 판매가격은 계단에 가깝습니다.

    파도는 계속 오르내립니다.

    계단은 한동안 같은 높이에 머물다가 어느 순간 한 칸 올라갑니다.

    그리고 한번 올라간 계단은 쉽게 내려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제에서는 가격이 아래쪽으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 이런 성격을 ‘가격의 하방경직성’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깃값이 내려가는 동안 인건비가 올랐을 수 있습니다. 전기와 가스요금이 높은 수준에 머물 수 있습니다. 임대료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원재료가 급등하던 시기에 상승분을 판매가격에 모두 반영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비용 부담을 회복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쟁도 영향을 줍니다.

    가격 자체를 내리는 대신 할인하거나 양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번 오른 메뉴가격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폭리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비용도 있으니까”라는 말만으로 소비자의 질문을 끝낼 수도 없습니다.

    가격을 올릴 때 제시했던 이유가 사라졌다면 그 뒤 가격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다시 보는 것은 충분히 필요한 질문입니다.

    4. 주유소의 ‘로켓과 깃털’

    주유소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가격판이 길가에 크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30원이 오르면 바로 보입니다. 국제유가가 올랐다는 뉴스까지 봤다면 두 숫자를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반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유가가 떨어졌다는 뉴스를 보면 이제 주유소 가격도 내려가겠다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당장 가격판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뉴스에서 보는 국제 원유가격과 오늘 주유소에서 판매하는 휘발유 가격은 같은 시점의 같은 가격이 아닙니다.

    원유를 들여와 정제해야 합니다. 공급단계를 거쳐 주유소로 갑니다. 세금도 포함됩니다. 이전 가격으로 구입한 재고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환율도 영향을 줍니다.

    즉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이 나옵니다.

    오를 때에도 정제하고 운송하고 재고를 거쳐야 하는데 왜 상승은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질까.

    이 질문은 운전자들만 해온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에서는 원가가 오를 때 판매가격이 빠르게 올라가고, 원가가 내려갈 때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현상을 흔히 ‘Rockets and Feathers’, 즉 ‘로켓과 깃털’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오를 땐 새마을호, 내릴 땐 비둘기호.

    국내 휘발유 가격을 대상으로 이 현상을 검증한 연구들도 있습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국제 원유가격이 하락할 때보다 상승할 때 국내 휘발유 가격이 더 빠르게 반응하는 비대칭성이 관찰됐습니다. 반면 국제 휘발유 제품가격을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는 같은 비대칭성이 나타나지 않은 연구도 있습니다.³⁾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기름값은 무조건 오를 때 빨리 오르고 내릴 때 늦게 내린다”고 단정해도 안 됩니다.

    반대로 “소비자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잘라 말해도 안 됩니다.

    어떤 가격을 기준으로 삼았는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실제 소비자가격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5. ‘안 내려가는 것’과 ‘아직 안 내려온 것’은 다르다

    가격을 볼 때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시간입니다.

    오늘 국제시장에서 원유가격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동네 주유소에 있는 휘발유가 오늘 산 원유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배추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산지가격이 크게 떨어졌다고 마트 진열대의 모든 배추가 오늘 아침 밭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돼지고기 도매가격이 오늘 내려갔다고 음식점 냉장고 속 고기의 매입가격이 오늘 가격으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밀가루나 국제 곡물가격이 내려가도 이미 사놓은 원료나 계약물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아직 내려오지 않은 가격과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은 가격입니다.

    처음에는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재고가 바뀌고 새로운 매입가격이 적용되고 생산과 운송을 거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내려왔는가.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반영 속도는 어땠는가.

    다른 비용은 그 사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렇게 보면 내일 당장 가격이 안 내렸다고 화낼 필요도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데 “원래 시차가 있습니다”라는 설명만 듣고 넘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6. 밀가루가 내렸는데 라면과 빵은 왜 그대로일까

    마트 진열대에서도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국제 곡물가격이나 특정 원재료 가격이 내려갔다는 뉴스를 봅니다.

    그런데 라면과 과자, 빵 가격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에서도 원재료와 완제품을 바로 연결하면 답을 놓칩니다.

    라면 한 봉지는 밀가루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원료가 들어가고 공장을 돌립니다. 포장재가 필요하고 상자에 담아 창고에 보관합니다. 화물차로 운송하고 마트와 편의점에서 판매합니다.

    그 과정에는 전기와 연료와 인건비가 들어갑니다.

    원재료 하나가 내려가도 다른 비용이 그대로라면 완제품 전체 가격이 내려갈 수 있는 폭은 제한됩니다.

    시차도 있습니다.

    오늘 국제시장에서 곡물가격이 내려갔다고 오늘 마트에 진열된 라면이 그 가격으로 구입한 원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질문은 유효합니다.

    원재료 상승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렸다면 그 원재료가 충분히 내려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것은 “원료값이 내렸으니 내일부터 제품값을 내려라”라는 요구와 다릅니다.

    가격을 올렸던 이유와 지금 가격을 유지하는 이유가 같은지를 묻는 것입니다.

    7. 중간에서 누군가 다 가져가는 것일까

    농민은 싸서 어렵다고 합니다.

    소비자는 비싸서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쉬운 결론 하나가 떠오릅니다.

    중간에 있는 누군가가 차액을 모두 가져가는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가격 차이만으로 그렇게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유통에는 실제 비용이 들어갑니다.

    화물차는 연료를 사용합니다. 창고와 냉장시설에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선별하고 포장하고 운반합니다. 상품이 상하거나 팔리지 않아 생기는 손실도 있습니다. 소매점에도 임대료와 인건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통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모든 가격 차이를 자동으로 설명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경쟁이 충분한지, 단계별 비용과 마진이 어떻게 변했는지, 앞 단계에서 크게 떨어진 가격이 다음 단계에는 언제 얼마나 반영됐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좋습니다.

    “누가 중간에서 다 가져가는가?”

    보다

    “내가 낸 1만 원은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 오는 동안 어디에서 얼마씩 붙었는가?”

    두 번째 질문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이 막연한 의심보다 강합니다.

    가격 뉴스를 볼 때 네 가지만 보자

    앞으로 “원유 급락”, “산지가격 폭락”, “국제 곡물가격 하락”이라는 뉴스를 봤는데 생활 속 가격은 그대로라면 네 가지를 차례로 보면 됩니다.

    가격을 볼 때확인할 것
    출발점산지가격·도매가격·국제 원재료가격 중 무엇이 움직였는가
    원가 비중그 원재료가 최종가격에서 차지하는 몫은 어느 정도인가
    전달 시간재고·계약·생산·운송을 거칠 시간이 충분히 지났는가
    도착점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소비자가격은 실제 얼마나 움직였는가

    특히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실제로 얼마나 내려왔는가.

    이 질문까지 가야 “유통비가 있으니까 그렇다”는 설명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격이 걸어온 길을 보면 숫자가 달라 보인다

    “오를 땐 새마을호, 내릴 땐 비둘기호.”

    이 말이 언제나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배추와 돼지고기와 휘발유와 라면은 가격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다릅니다.

    농산물에는 산지와 도매시장이 있습니다. 축산물에는 도축과 부위별 유통이 있습니다. 석유에는 국제가격과 환율, 정제와 세금, 재고가 있습니다. 가공식품에는 여러 원재료와 생산·포장·물류비가 함께 들어갑니다.

    그러니 모든 가격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업이나 유통업자를 무조건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원래 유통비가 그렇다”는 설명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어디의 가격이 움직였는가.

    그 가격은 최종가격에서 얼마를 차지하는가.

    소비자에게 도착할 시간이 충분히 지났는가.

    그리고 결국 얼마가 내려왔는가.

    이 네 가지를 보면 가격표가 전과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농민은 싸서 못 팔겠다고 하고 소비자는 비싸서 못 사겠다고 하는 일이 반드시 모순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국제유가가 내렸는데 오늘 주유소 가격이 그대로라고 해서 곧바로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격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묻는 일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처음부터 알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가격을 올렸던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 하락분은 어디로 가는가.

    다음번 가격표 앞에서 다시 이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오를 땐 새마을호, 내릴 땐 비둘기호.”

    그때는 그냥 웃고 지나치지 않아도 됩니다.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떤 길을 지나왔으며, 내려갈 때는 그 길을 어디까지 되돌아왔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그때부터 계산대의 숫자는 단순한 가격이 아니라, 그 가격이 걸어온 길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각주

    1. 농림축산식품부, 농산물 유통구조 관련 설명자료. 배추의 산지거래부터 도·소매까지의 유통 과정에는 운송비·포장비·상하차비·감모와 유통주체의 이윤 등이 함께 포함된다. 농식품부는 배추의 높은 유통비용을 단순한 중간상인의 이윤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2. 축산물품질평가원, 「설 명절, 축산물 공급량 증가하고 소비자가격은 대부분 하락」. 2024년 설 성수기 조사에서 전년 동기 대비 돼지고기 도매가격은 13.1%, 소비자가격은 5.7% 하락했다.
    3. 국내 휘발유 가격의 비대칭성을 다룬 연구에서는 분석 대상과 자료 주기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국제 원유가격을 기준으로 상승과 하락에 대한 국내 휘발유 가격의 비대칭적 반응이 관찰된 연구가 있는 반면, 국제 휘발유 제품가격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비대칭성이 나타나지 않은 분석도 있다. 따라서 ‘오를 때는 빠르고 내릴 때는 느리다’를 모든 시기와 가격 단계에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1963년 12월, 김포공항에 낯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오르면 한동안 돌아오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목적지는 서독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곳은 사무실도 공장도 아니었습니다.

    탄광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까지 가서 땅속으로 내려가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시절 한국에도 탄광은 많았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산에서는 날마다 석탄이 나왔습니다. 광부가 캔 석탄은 선탄장을 지나 화차에 실렸고, 도시의 연탄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연탄이 된 석탄은 다시 트럭과 손수레에 실려 골목을 지나 집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석탄의 길을 조금 더 멀리 따라가면 뜻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석탄이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석탄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건너다

    1963년 한국과 서독 사이에서 광부 파견이 시작됐습니다.

    첫 파견 광부들은 1963년 12월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후 1977년까지 수천 명의 한국인 광부가 독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¹⁾

    광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지원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임금과 비교하면 독일 광산에서 벌 수 있는 돈은 상당했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 앞으로의 기반을 마련할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¹⁾

    하지만 돈만 보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나라였습니다.

    말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일터가 탄광이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뒤에는 광산에서 사용하는 말과 작업 방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겨 지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탄광 일을 해본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하다가 지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출국할 때 광부 모집에 합격했다는 사실과 실제 막장에서 광부로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몸이 다시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시간도 견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독일까지의 거리는 비행기가 데려다주었지만, 낯선 일터에 자리를 잡는 일은 결국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땅 아래에서 시작된 하루

    탄광의 하루는 지상에서 시작됐지만 일의 대부분은 땅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작업복을 갖춰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지하 작업장까지 이동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석탄을 캐고, 작업을 마치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몸을 써야 했습니다. 먼지와 소음이 있었고 위험도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말보다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장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지 몸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이름과 사정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에게 돈을 보내야 했고 누군가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볼 것인지 생각하며 독일행을 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업복을 입고 갱도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해야 할 일이 같았습니다.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 나라 사이를 이어준 것은 거창한 말보다 먼저 일이었습니다.

    월급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받은 월급이 모두 독일에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남기고 일부를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보내기 위한 송금 관련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²⁾

    돈이 도착하는 곳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쪽에서는 돈을 벌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돈으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먼 나라의 땅속에서 일하는 사람과 한국의 한 가정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이 서독 차관의 직접적인 담보였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관련 자료와 연구에서 사실관계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져 왔으므로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 크게 만들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충분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독일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번 돈의 일부를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한 나라의 외화 획득이라는 숫자로 보면 경제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조금 달라집니다.

    독일에서 월급날을 기다리는 사람과 한국에서 송금을 기다리는 사람이 같은 돈으로 한 달의 생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탄광촌의 불이 밝았다

    그 사람들이 독일 광산에서 일하던 시기, 한국의 탄광도 한창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탄광에 사람이 몰리면 광부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 집이 필요했습니다. 밥을 먹을 식당이 생겼고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 늘면 학교가 필요했고 사람들이 오가면 버스와 택시도 움직였습니다.

    광산 주변에 생활이 만들어졌습니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갔습니다. 탄을 실은 차량이 움직였고 식당에서는 끼니를 준비했습니다. 장날이면 시장에 사람이 모였습니다. 월급날이 지나면 상점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광산에서 나온 돈은 광산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고 옷을 사고 아이들의 준비물을 샀습니다. 식당의 밥값이 되고 가게의 매출이 되었습니다.

    탄광은 석탄을 생산하는 장소였지만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움직이는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이 많을 때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방을 구하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이들이 자랐고 골목이 생겼습니다.

    검은 석탄이 산 아래에 하나의 동네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집 안의 변화가 산속까지 올라갔다

    그 풍경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도시의 집에서는 난방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연탄을 갈아야 따뜻해지던 방에 다른 난방 방식이 들어왔습니다. 석유와 가스 사용이 늘었고 연탄에 의존하던 생활도 서서히 줄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내 석탄산업은 이전과 다른 상황을 맞게 됩니다.³⁾

    처음에는 한 집의 작은 변화처럼 보였습니다.

    연탄을 덜 주문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쌓아두는 연탄의 양이 줄었습니다.

    골목을 오가던 연탄 배달도 예전만큼 바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나 같은 변화가 수많은 집에서 일어나면 그 끝은 탄광까지 닿습니다.

    연탄이 덜 팔리면 공장에서 필요한 석탄도 줄어듭니다. 운반해야 할 양이 줄고 광산에서 캐야 할 양도 달라집니다.

    집 안에서 사라지는 연탄 한 장과 산속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탄광에서 도시의 아궁이까지 이어졌던 길을 따라 변화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광산의 문이 닫히다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많은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에서 2,43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지만 1995년에는 27개 탄광, 570만 톤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폐광지원 대상이 된 탄광은 335개였고 지원을 받은 근로자는 3만 명을 넘었습니다.⁴⁾

    숫자만 보면 산업의 축소입니다.

    탄광 앞에서 보면 다른 장면이 됩니다.

    어제까지 들어가던 갱도에 더는 들어갈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입던 작업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익힌 일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광산 밖에도 있었습니다.

    광부가 줄면 식당의 손님이 줄었습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줄었습니다.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학교의 아이들도 줄었습니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 줄고 빈집이 생겼습니다.

    탄광 하나의 문이 닫힐 때 철문 하나만 닫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하루가 함께 달라졌습니다.

    떠나는 방향이 바뀌었다

    태백을 비롯한 탄광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인구 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때 석탄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오던 곳에서 이제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태백은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시기에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산업 합리화와 폐광이 이어지면서 빠른 인구 감소를 겪었습니다.⁵⁾

    광부 한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고 한 사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줄어든 가게 주인도 다른 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광산을 상대로 일하던 운송과 서비스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광산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제는 그 광산이 사라지면서 다른 곳의 일을 찾아 떠났습니다.

    산업이 사람을 불러들이던 힘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탄광촌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일자리는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일이 생기면 사람이 들어옵니다.

    사람이 들어오면 집과 가게가 생깁니다.

    학교와 시장과 교통이 그 뒤를 따릅니다.

    오랫동안 그 중심이던 일이 사라지면 주변의 생활도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탄광촌은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독일로 떠난 사람과 탄광촌을 떠난 사람

    1963년 독일로 떠난 광부와 수십 년 뒤 국내 탄광촌을 떠난 사람을 같은 사건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시기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파독 광부들이 떠나던 시기의 한국에서는 석탄 생산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폐광촌에서 사람들이 떠나던 때에는 국내 석탄산업이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장면을 멀리서 함께 바라보면 한 가지가 겹쳐 보입니다.

    사람은 일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일자리가 먼 나라에 있으면 국경을 건넜습니다.

    탄광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산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다시 다른 일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남은 사람도 있었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떠날 수 없어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산업이 바뀌는 순간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의 모양도 함께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일이 내일도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니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석탄 한 덩어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산속에서 검은 돌을 캐는 광부가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는 캐낸 석탄을 고르는 사람이 있었고 철도와 차량으로 그것을 나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석탄을 연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가게가 있었고 골목 끝 집까지 연탄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연탄을 갈던 손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니 석탄을 캐기 위해 독일까지 건너간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광산이 문을 닫아 새로운 일터를 찾아 탄광촌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석탄 자체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돌을 따라가면 한 시대에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했고 어디로 움직였는지가 보입니다.

    산업이 커진다는 말 뒤에는 출근할 곳을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업이 쇠퇴한다는 말 뒤에는 내일부터 어디에서 일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바뀌면 난방기구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캐던 일과 나르던 일, 연탄을 만들고 팔던 일이 함께 줄었습니다. 그 일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동네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1963년 겨울, 독일로 떠난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뒤에는 국내 탄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다른 한쪽은 사라지는 일자리 뒤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출발한 이유도, 도착한 곳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장면 사이에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할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일이 움직일 때 사람의 삶도 움직였습니다.

    석탄은 땅속에 있었지만, 석탄을 따라 움직인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각주

    1. 행정안전부·국가기록원 파독 광부 관련 기록. 1963년 12월 시작된 한국 광부의 서독 파견과 모집·출국 과정에 관한 기록. 독일 측 관련 기록에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7,936명이 파견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2. 국가기록원 소장 파독 근로자 관련 기록. 파독 광부의 임금과 국내 송금, 당시 송금 관련 자료.
    3. 국가기록원 및 석탄산업 관련 공공 기록. 1980년대 후반 이후 연탄 수요 감소와 국내 석탄산업 구조 변화에 관한 자료.
    4.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육성 및 석탄산업 합리화」.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생산량 2,430만 톤에서 1995년 27개 탄광·570만 톤으로 감소. 1989~1995년 폐광지원 대상 335개 탄광 및 3만 명 이상의 근로자 지원 기록.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탄광지역 관련 공공 기록.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태백 등 주요 탄광지역의 인구 감소와 지역사회 변화에 관한 자료.
  • 연탄불의 두 얼굴

    연탄불의 두 얼굴

    겨울밤 방이 따뜻해지면 사람들은 이불을 폈습니다.

    밖에서 돌아와 아랫목에 발을 넣으면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면 밖의 찬바람이 잠시 먼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온기는 아궁이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연탄을 사용하던 집에서 따뜻한 방이 반드시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방은 아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살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불이 잘 타고 있는지도 보았지만, 연기가 제대로 빠져나가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방바닥에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연통이 벌어진 곳은 없는지 신경을 썼습니다.

    잘못하면 연탄가스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탄 사용이 늘어난 1960년대에는 연탄가스 중독사고도 급증했습니다. 한겨울에 수백 명이 희생될 정도였습니다. 정부가 강습회를 열고 관련 영화를 상영하며 예방운동을 벌였지만 사고는 쉽게 줄지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70~80년대에 연탄가스 사고가 오히려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¹⁾

    한쪽에는 겨울을 견디게 해준 따뜻한 아랫목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밤새 조심해야 하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연탄불의 두 얼굴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연탄가스

    연탄가스 중독에서 특히 위험한 것은 일산화탄소였습니다.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차 눈이 맵다면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일산화탄소는 그렇게 쉽게 경고해주지 않습니다.

    잠든 사이 몸에 들어오면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워지고,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워낙 많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연탄은 어느 특별한 장소에서만 사용하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단독주택과 골목 안 작은 집, 새로 지은 주택에서도 흔히 사용했습니다. 한 집에서 매일 사용하는 난방연료의 위험이었으니 겨울이 올 때마다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습니다.

    사고가 이어지면서 원인을 사람의 부주의만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아궁이에서 나온 가스가 굴뚝까지 빠져나가는 과정에는 여러 곳이 연결돼 있었습니다.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구들이 있었습니다.

    연기가 지나가는 길이 있었고 끝에는 굴뚝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곳에 틈이 생겨도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집을 어떻게 짓느냐도 중요해졌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정부 주도의 연구사업이 시작됐고, 사고가 발생한 건물의 건물주와 시공사에 책임을 묻는 조치도 나왔습니다. 미장이에게 안전한 시공법을 교육하고 수료증을 발급했으며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는 안전검사를 실시했습니다.¹⁾

    연탄가스 사고가 한 가정의 조심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주거 안전의 문제로 넓어진 것입니다.

    따뜻한 방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탄만 잘 태우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이 지나가는 길까지 안전해야 했습니다.

    방바닥과 연통을 살피던 겨울

    1988년 11월 23일 대한뉴스에는 「연탄가스 사고주의」라는 41초짜리 짧은 영상이 방송됐습니다.

    내용은 놀랄 만큼 구체적입니다.

    방바닥에 틈이 없는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연통의 틈으로 가스가 새지 않도록 막으라고 했습니다.

    가스경보기와 가스배출기를 켜놓으라는 안내도 나왔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119에 신고하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습니다.²⁾

    1988년이면 연탄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런데도 겨울이 오면 국가가 방송을 통해 방바닥과 연통을 확인하라고 알려야 했습니다.

    당시 촬영된 미공개 대한뉴스 영상에는 그 경고가 실제 생활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남아 있습니다.

    연탄가스 사고 환자가 구급차로 실려 갑니다.

    가정에서는 가스가 새는 곳을 살핍니다.

    화면은 병원 응급실로 이어지고 고압산소치료기도 등장합니다.³⁾

    한쪽에서는 평범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연탄불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 불 때문에 사람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을 준비한다는 말에는 연탄을 마련하는 일만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집도 살펴야 했습니다.

    방바닥에 전에 없던 금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연통이 빠지거나 벌어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했습니다.

    작은 틈 하나가 대수롭지 않은 집수리가 아니라 사람의 안전과 관계된 문제가 됐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을 손보는 일에도 이런 걱정이 따라다녔습니다.

    방바닥에 생긴 금을 메우고 아궁이와 굴뚝 사이를 살폈습니다. 연통이 빠졌거나 벌어진 곳은 없는지도 확인했습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작은 틈이 연탄을 때기 시작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됐습니다.

    연탄가스 사고를 막는 일은 특별한 날 한 번 하는 점검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난방을 계속하는 동안 집의 상태도 함께 살펴야 했습니다. 연탄을 사용하는 겨울에는 집 자체가 난방기구의 한 부분이었던 셈입니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연탄가스 사고를 막기 위한 여러 대책을 추진했고, 1980년대 말까지도 가스경보기와 배출기를 사용하라는 캠페인이 계속됐습니다.

    1972년 대한뉴스에는 아예 「연탄가스를 조심하자」라는 영상이 제작됐습니다. 16년 뒤인 1988년에도 같은 주제의 캠페인이 다시 등장했습니다.⁴⁾

    오랜 기간 같은 경고가 반복됐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연탄가스 문제가 얼마나 생활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치미를 찾던 집과 병원으로 향하던 사람들

    연탄가스 이야기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조금 뜻밖의 음식 하나가 따라옵니다.

    동치미입니다.

    연탄가스에 취한 사람이 생기면 동치미 국물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동치미 국물 가져와.”

    이 말을 실제로 들었던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집에 동치미가 있었습니다. 병원이 지금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고, 응급의료 체계도 오늘과 달랐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쓰러지면 가족은 당장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던 방법부터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치미 국물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생활과 오늘의 의학은 분명하게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치미 국물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민간의 대처였습니다.

    오늘날 일산화탄소 중독은 신속한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응급상황이며 동치미 국물은 치료법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치미가 연탄가스를 치료했느냐가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이 연탄가스 이야기를 하면서 동치미까지 함께 기억하느냐입니다.

    그 기억 속에는 당시의 생활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집집마다 연탄을 사용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면 가족과 이웃이 먼저 달려왔습니다.

    구급차와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까지 지금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방법으로 먼저 움직였습니다.

    한편 병원에서는 다른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 환자를 살리기 위한 고압산소치료가 도입됐고, 정부도 종합병원 등에 관련 치료장비를 설치하는 대책을 추진했습니다.

    1988년 대한뉴스 미공개 촬영본에 응급실과 고압산소치료기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그런 변화가 이미 의료현장에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³⁾

    집에서 동치미 국물을 찾던 기억과 병원에서 고압산소치료를 받던 장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위험을 두고 생활의 경험과 의료기술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대응하고 있던 모습입니다.

    군대의 겨울에는 페치카가 있었다

    같은 시절 군대에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이 있었습니다.

    페치카였습니다.

    오래전에 군 생활을 한 사람에게 페치카라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뻬치카나 베치카처럼 조금씩 다르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2001년 MBC는 병영 개선사업으로 사라져가는 군부대 페치카를 취재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페치카는 1950년대부터 군 내무반 난방기구로 사용됐습니다. 처음에는 나무와 분탄을 때다가 1970년대부터 조개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말까지 거의 모든 군부대가 페치카를 사용했습니다.⁵⁾

    군대의 겨울은 집과 달랐습니다.

    특히 전방에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에게 따뜻한 내무반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문제는 페치카가 저절로 타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MBC 보도에는 아예 ‘페치카 담당병’이 등장합니다.

    겨울이 오면 담당병이 바빠졌습니다.

    잠깐 한눈을 팔아 불이 꺼지면 다시 살려야 했습니다. 난방을 계속하려면 연료를 넣고 불의 상태를 살펴야 했습니다.

    특히 추위가 매서운 곳에서는 불이 꺼진 뒤에야 그 차이가 분명해졌습니다. 밤새 식은 내무반을 다시 데우려면 시간이 걸렸습니다. 페치카를 맡은 병사에게 불은 단순히 켜고 끄는 난방기구가 아니었습니다.

    근무를 나가는 병사와 돌아오는 병사가 밤새 바뀌는 동안에도 난방은 이어져야 했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잠든 시간에도 불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군 생활의 페치카 기억에는 따뜻함과 함께 불을 꺼뜨리지 않아야 했던 수고가 남아 있습니다.

    집에서 가족이 아궁이를 확인하던 시간에 군대에서는 병사가 페치카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페치카 주변에는 난방 이상의 생활도 모였습니다.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도에 등장한 군인의 회고에는 페치카에서 몰래 라면을 끓여 먹다가 걸려 얼차려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참들이 따뜻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힘들어하는 이등병을 불러 손을 녹이게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⁵⁾

    그래서 페치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난방기구의 구조보다 먼저 자기 군 생활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밖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습니다.

    페치카에는 불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언 손을 녹였습니다.

    다음 근무를 나갈 사람도 같은 불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런 기억은 난방기구의 성능표에 남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에게 남습니다.

    따뜻한 불 뒤에는 관리하는 일이 있었다

    연탄불과 페치카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연료를 넣는다고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이 제대로 타는지 살펴야 했습니다.

    집에서는 가스가 새지 않는지도 확인해야 했습니다.

    사고가 계속되면서 그 주변의 일은 더 세분됐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연탄가스가 새지 않도록 시공해야 했습니다.

    미장이에게 안전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공동주택에는 안전검사가 들어갔습니다.

    가스가 새는 것을 알리는 경보기가 생겼습니다.

    가스를 밖으로 빼내는 장치도 사용됐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구급차가 움직였고 병원에서는 중독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연탄가스 문제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예방교육과 캠페인을 계속했습니다.⁶⁾

    이 대목에서 앞서 살펴본 석탄과 연탄의 길이 다시 조금 달라집니다.

    탄광에서 시작한 석탄은 공장을 거쳐 연탄이 됐고, 연탄가게와 골목을 지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연탄이 집에 도착했다고 그 물건을 둘러싼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사용하는 동안에는 다른 종류의 수고가 이어졌습니다.

    불을 관리했습니다.

    집을 손봤습니다.

    안전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을 알렸습니다.

    중독된 사람을 치료하는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연탄가스라는 위험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집을 짓는 방법과 겨울을 보내는 습관, 병원의 치료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70~80년대에도 사고가 증가했다는 국가기록원의 기록은 그 변화가 짧은 기간에 끝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¹⁾

    연탄은 값싸고 편리한 생활연료였지만 그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손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난방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난방이 바뀌자 겨울밤도 달라졌다

    연탄의 자리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연료였고 많은 집이 연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가정의 난방 방식에는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스와 기름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연탄 사용은 점차 줄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연탄가스 사고가 생활 주변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을 1990년대 가스와 기름보일러 사용이 보편화된 때와 연결해 설명합니다.¹⁾

    연료가 바뀌었다는 말만으로는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겨울밤에 해야 할 일이 달라졌습니다.

    잠들기 전에 방바닥과 연통을 살피는 일은 점차 줄었습니다.

    연탄가스가 새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는 집도 줄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불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예전의 풍경이 됐습니다.

    군대도 변했습니다.

    1990년대 병영 개선사업이 진행되면서 기름보일러가 페치카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MBC가 취재했을 때 페치카는 최전방에서도 보기 힘든 시설이 됐습니다. 당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페치카는 철거하지 않고 군 역사시설로 보존하기로 했습니다.⁵⁾

    난방기구 하나가 바뀌면서 군대에서 맡아야 했던 일 하나도 함께 없어졌습니다.

    페치카 담당병입니다.

    예전에는 병사가 불을 살렸습니다.

    새로운 난방시설에서는 기계가 온도를 유지했습니다.

    집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사람이 아궁이를 열어 불을 확인하던 자리에 보일러가 들어왔습니다.

    불을 직접 보지 않아도 방을 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온도조절기의 숫자를 맞추면 난방기가 알아서 작동했습니다.

    생활은 편해졌고 연탄가스 사고의 위험도 크게 줄었습니다.

    그러나 편리해진 만큼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따뜻한 방 하나를 유지하는 데 사람이 얼마나 자주 움직여야 하는지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불을 살피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통을 손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는 페치카 앞을 지키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난방이 자동화되면서 그런 모습은 겨울 풍경에서 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같은 불을 다르게 기억한다

    연탄불을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랫목부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가운 발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 올라오던 온기를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연탄가스가 먼저 떠오릅니다.

    겨울이면 방바닥과 연통을 살폈던 일, 주변에서 들었던 사고 소식, 갑자기 사람이 쓰러졌을 때 동치미 국물을 찾던 어른들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군 생활을 오래전에 마친 사람에게는 페치카가 있습니다.

    야간근무 뒤 언 손을 녹이던 자리였고, 담당병에게는 꺼뜨리지 말아야 할 불이었습니다.

    같은 난방기구를 두고도 기억이 다른 까닭은 그 앞에서 했던 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연탄은 따뜻했습니다.

    동시에 위험했습니다.

    페치카는 추운 내무반을 덥혀주었지만 그 온도를 유지하려면 병사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연탄불의 역사를 따뜻했던 옛날 이야기로만 남기면 절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위험한 연료였다고만 말해도 나머지 절반을 놓칩니다.

    그 불 덕분에 수많은 집이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 불 때문에 수많은 집이 밤마다 조심했습니다.

    사고가 반복되자 집을 짓는 방법이 달라졌고 안전장치가 생겼습니다.

    병원에는 새로운 치료장비가 들어왔습니다.

    더 안전하고 편리한 난방이 보급되자 아궁이와 페치카는 생활의 중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은 온도조절기의 숫자를 맞추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때는 잠들기 전에 불부터 보았습니다.

    방이 따뜻한 밤 뒤에는 아궁이를 열어보던 손이 있었습니다.

    군대의 겨울밤에는 페치카 앞을 지키던 병사가 있었습니다.

    따뜻함은 불이 만들었지만, 그 불을 밤새 이어간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각주

    1.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연탄」 및 「길고 춥던 그 시절 겨울 풍경―연탄재 쌓인 골목길」. 1960년대 연탄 사용 증가와 중독사고, 미장이 교육·공동주택 안전검사, 1970~80년대 사고 증가 및 1990년대 난방연료 전환에 관한 기록.
    2.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1724호 「연탄가스 사고주의」, 1988년 11월 23일. 방바닥과 연통의 틈 점검, 가스경보기·가스배출기 및 119 신고 안내.
    3. e영상역사관, 미공개 대한뉴스 「감 익은 풍경, 연탄가스, 고압산소기, 강남병원」, 1988년 11월 23일. 연탄가스 사고 환자의 구급차 수송, 가정의 가스 누출 예방, 병원 응급실과 고압산소치료기 촬영 기록.
    4. 국가기록원 연탄 관련 기록물. 대한뉴스 제911호 「연탄가스를 조심하자」(1972)와 제1724호 「연탄가스 사고주의」(1988).
    5. MBC 뉴스데스크, 「군 병영 개선사업으로 내무반 페치카 사라져」, 2001년 11월 10일. 1950년대 이후 페치카 사용, 1970년대 조개탄 사용, 페치카 담당병, 1980년대 말까지 거의 모든 군부대에서 사용된 사실과 병영개선에 따른 퇴장에 관한 보도.
    6. 국가기록원, 연탄가스 예방과 안전대책 관련 기록. 연탄가스 사고에 따른 시공·교육·검사 및 예방활동에 관한 자료.
  • 연탄 한 장으로 겨울을 나던 시절

    연탄 한 장으로 겨울을 나던 시절

    아침에 눈을 뜨면 방바닥부터 짚어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따뜻하면 밤새 불이 살아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냉기가 돌면 이불 속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간밤에 갈아놓은 연탄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거나 어느새 불이 다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시절 겨울에는 시계에 적혀 있지 않은 시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연탄 갈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에 한 번 갈아놓았다고 하루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에 언제 갈아야 하는지 기억해야 했고, 외출이 길어질 때는 나가기 전에 불부터 살폈습니다. 밤이 깊었어도 때가 되면 새 연탄을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원할 때 난방을 켭니다.

    그때는 사람이 불의 시간에 맞춰 살았습니다.

    아침은 방바닥의 온도로 시작됐다

    연탄은 장작보다 오래 탔고 비교적 일정하게 열을 냈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가정의 난방연료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식당과 점포, 학교와 사무실에서도 사용됐습니다.¹⁾

    오래 탄다는 것은 분명 편리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불을 붙여놓으면 잊어도 되는 연료는 아니었습니다.

    불이 충분히 남아 있을 때 다음 연탄으로 이어야 했습니다. 때를 놓쳐 완전히 꺼지고 나면 다시 불을 살려야 했습니다.

    연탄을 오래 사용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감각이 생겼습니다. 아궁이를 열어 연탄의 빛깔을 보면 어느 정도 탔는지 짐작했습니다. 새 연탄을 올린 뒤에는 위아래 구멍을 맞췄습니다.

    처음에는 서툴던 일도 겨울을 몇 번 보내고 나면 몸에 익었습니다.

    몇 시에 갈았는지 일일이 적어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한번 봐야겠다.”

    그럴 때쯤이면 정말 아궁이를 살펴볼 때가 되어 있었습니다.

    집 안의 하루와 아궁이 속 시간이 함께 흘렀습니다.

    불이 꺼진 날에는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불을 꺼뜨리는 날은 있었습니다.

    외출이 예상보다 길어질 때도 있었고, 밤사이 새 연탄으로 불이 제대로 옮겨붙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방바닥이 싸늘했습니다.

    아궁이를 열어보면 전날 밤까지 벌겋던 연탄이 식어 있었습니다.

    연탄은 처음 불을 붙이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충분히 마르지 않은 연탄은 불붙이기가 더 어려웠고, 한번 완전히 꺼진 불을 처음부터 다시 살리는 것도 번거로웠습니다.²⁾

    그럴 때 옆집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연탄불 꺼졌는데 하나 좀 빌립시다.”

    불붙은 연탄 한 장을 빌려왔습니다.

    벌겋게 살아 있는 연탄을 자기 집 아궁이에 넣고 그 위에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옆집에서 건너온 불이 자기 집 연탄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연탄이 떨어지면 몇 장을 꾸었습니다.

    불이 꺼지면 불붙은 연탄을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연탄만 꾸는 것이 아니라 불까지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빌려온 것은 연탄 한 장이었지만 정작 필요했던 것은 그 안에 살아 있던 불이었습니다.

    한집에서 건너온 불이 다른 집의 저녁을 다시 데웠습니다.

    연탄집게는 늘 아궁이 곁에 있었다

    연탄을 때던 집에는 연탄집게가 있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쇠붙이였지만 겨울이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습니다.

    새 연탄을 올리고, 타고 남은 연탄을 들어내고, 다 탄 재를 꺼낼 때도 집게를 사용했습니다.

    연탄을 오래 갈다 보면 힘을 주는 정도도 몸에 익었습니다. 너무 거칠게 다루면 다 타가는 연탄이 부서질 수 있었습니다.

    연탄을 간다는 것은 새것과 헌것을 바꾸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아 있는 불을 다음 연탄으로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장에서 다음 한 장으로 불이 이어졌습니다.

    검은 연탄은 하얀 재가 되어 나왔다

    밤새 방을 데운 연탄은 아침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검고 묵직했던 몸은 희끗한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연탄재였습니다.

    불은 끝났지만 사람의 일은 조금 남았습니다.

    열기가 남아 있지 않은지 살핀 뒤 밖으로 내놓았습니다. 온전히 빠져나온 것도 있었고 중간이 깨진 것도 있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푸석하게 무너지며 잿가루가 떨어졌습니다.

    겨울이면 골목 한쪽에 다 타고 남은 연탄재가 쌓였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습니다.³⁾

    며칠 전에는 검은 연탄이 골목을 따라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하얀 재가 되어 같은 골목으로 나왔습니다.

    연탄이 들어오는 것도 보였고, 다 타고 나가는 것도 보였습니다.

    겨울은 그렇게 골목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연탄불 하나가 여러 일을 맡았다

    연탄불은 방만 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의 구조에 따라 밥을 짓고 국을 끓였으며 물을 데우는 데에도 사용했습니다.⁴⁾

    이미 피워놓은 불을 한 가지 용도로만 쓰지 않았습니다.

    방을 데우고 음식을 익혔습니다.

    솥에 물을 올려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불이 꺼진다는 것은 방 하나가 식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집의 여러 생활이 함께 불편해졌습니다.

    지금은 난방과 취사, 온수를 서로 다른 장치가 맡습니다.

    그때는 연탄불 하나가 여러 일을 함께 떠받치고 있던 집이 많았습니다.

    연탄 한 장의 쓰임은 생각보다 집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연탄더미를 보면 남은 겨울이 보였다

    겨울을 앞두고 연탄을 들여놓았습니다.

    검은 연탄이 한쪽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김장을 마치고 연탄까지 들여놓으면 큰 겨울 준비를 해놓은 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든든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질수록 연탄더미는 낮아졌습니다.

    매일 몇 장쯤 쓰는 집에서는 남은 양을 보면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대강 알았습니다.

    날씨가 매섭게 추워지면 줄어드는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바닥이 가까워지면 다시 연탄을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돈만 있다고 언제나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연탄 사용이 크게 늘면서 겨울철 공급난도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 석유파동 이후에는 연탄 수요가 몰리면서 공급을 걱정해 미리 사두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습니다.⁵⁾

    그런 시절에는 쌓여 있는 연탄의 높이가 달리 보였습니다.

    단순히 몇 장 남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겨울의 양처럼 보였습니다.

    집 안에도 이름 없는 일이 있었다

    탄광에서는 광부가 석탄을 캤습니다.

    공장에서는 그 석탄으로 연탄을 만들었습니다.

    트럭이 실어 날랐고 배달하는 사람이 집까지 옮겼습니다.

    그런데 연탄이 집에 도착했다고 사람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의 일은 생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궁이를 살피고 연탄을 갈았습니다. 다 탄 재를 밖으로 내놓았습니다. 쌓아둔 연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헤아렸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일을 거드는 집도 있었습니다.

    월급을 받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직업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면 방이 식었습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수많은 사람의 일이 연탄공장과 배달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탄 한 장의 마지막에는 그것을 불로 이어가는 생활의 손이 있었습니다.

    산업의 끝과 사람의 일상이 아궁이 앞에서 만났습니다.

    연탄은 한 시대의 생활연료였다

    연탄에 대한 기억이 많은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연탄 소비량은 1970년 1,183만 톤에서 1980년 2,083만 톤으로 늘었고, 1986년에는 2,692만 톤에 이르렀습니다. 서울의 연탄 사용 가구도 1983년 211만 가구에서 1986년 234만 가구로 늘었습니다.⁶⁾

    1980년대 중반까지 연탄은 이미 지나간 옛날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수많은 집에서 타고 있던 생활연료였습니다.

    그래서 연탄집게와 연탄재, 골목의 연탄가게와 연탄차가 한 세대의 기억 속에 함께 남았습니다.

    개인의 추억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거대한 에너지 소비의 변화가 놓여 있었습니다.

    산에서 캐낸 석탄이 공장을 거쳐 연탄이 되고, 다시 수많은 집의 아궁이로 들어갔습니다.

    한 장씩 보면 작은 연탄이었습니다.

    모아놓고 보면 한 시대를 데운 연료였습니다.

    연탄이 물러나자 하루도 달라졌다

    그렇게 널리 쓰이던 연탄도 서서히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1986년 무렵 정점에 이른 국내 무연탄 생산은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과 상업 부문의 연탄 소비가 줄었고, 1986년과 1987년 액화천연가스가 도입되면서 취사와 난방 연료도 점차 달라졌습니다.⁷⁾

    연료 하나가 바뀐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생활에서는 여러 가지가 함께 사라졌습니다.

    골목의 연탄가게가 줄었습니다.

    집 한쪽에 겨울치 연탄을 쌓아놓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연탄집게가 손에서 멀어졌습니다.

    아침마다 재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조금씩 불의 시간에서 벗어났습니다.

    연탄은 때가 되면 갈아야 했습니다.

    외출이 길어지면 불이 걱정됐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밤새 이어질 불을 살펴야 했습니다.

    난방 방식이 달라지면서 그런 시간을 헤아리는 일도 사라져갔습니다.

    난방 기술의 변화는 방을 데우는 방법만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을 보내는 사람의 시간도 달라졌습니다.

    연탄 한 장으로 겨울을 난다는 것

    연탄 한 장은 몇 시간이 지나면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음 연탄이 그 불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겨울 내내 계속됐습니다.

    아침에는 방바닥의 온기로 불이 살아 있는지 알았습니다.

    때가 되면 아궁이를 살폈습니다.

    불을 꺼뜨린 날에는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밤새 제 몫을 다한 연탄은 아침이면 하얀 재가 되어 골목으로 나갔습니다.

    그 불로 밥을 짓고 물을 데웠습니다.

    방을 덥혔습니다.

    가족은 그 온기 위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연탄을 기억한다는 것은 검은 연료 하나를 추억하는 일만은 아닙니다.

    연탄을 중심으로 움직였던 하루의 방식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석탄이 어떻게 연탄이 되어 집까지 왔는지를 따라가면 산업이 보입니다.

    그 연탄이 집 안에서 어떻게 타고 사라졌는지를 따라가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생활에는 따뜻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밤새 방을 덥혀주던 바로 그 불 때문에 겨울이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든 사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연탄가스라고 불렀습니다.

    각주

    1.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탄의 가정용 보급과 난방·취사 등 생활연료로서의 이용에 관한 설명.
    2.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탄의 착화 특성과 번개탄의 등장 등에 관한 설명.
    3. 국가기록원, 「길고 춥던 그 시절 겨울 풍경―연탄재 쌓인 골목길」. 1990년대 초까지 연탄이 겨울나기의 주요 연료였으며 골목에 쌓인 연탄재가 흔한 겨울 풍경이었다고 기록한다.
    4.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및 국가기록원 연탄 관련 기록. 연탄은 가정의 난방뿐 아니라 취사 등에도 널리 이용됐다.
    5. 국가기록원, 「길고 춥던 그 시절 겨울 풍경―연탄재 쌓인 골목길」. 겨울철 연탄 수급과 석유파동 이후의 연탄 공급 문제를 다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6.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탄 소비량은 1970년 1,183만 톤, 1980년 2,083만 톤, 1986년 2,692만 톤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서울의 연탄 사용 가구 수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7. 한국학중앙연구원, 「연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내 무연탄 생산은 1986년 약 2,760만 톤을 기점으로 감소했고, 가정·상업 부문의 연탄 소비 감소와 LNG 도입에 따른 연료 전환이 이어졌다.
  • 석탄은 어떻게 연탄이 되어 집으로 들어왔나

    석탄은 어떻게 연탄이 되어 집으로 들어왔나

    깊은 어둠 속 막장에서 땀방울과 함께 캐낸 검은 석탄은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도심의 연탄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잘게 부서진 탄가루는 거친 기계의 압력을 견뎌내며 스물두 개의 숨구멍을 품은 단단한 연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삼륜차에 실려 좁은 골목을 누비고, 리어카에 실리거나 배달부의 굽은 등과 낡은 지게에 얹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 끝에 마침내 우리 집 마당 한구석, 보일러실에 닿았습니다.

    검은 먼지를 털어내며 차곡차곡 쌓인 연탄은 찬 바람 부는 계절마다 아랫목을 설레게 덥히며 가장 소박하고도 뜨거운 겨울의 온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석탄가루가 연탄 한 장이 되기까지

    연탄의 주원료는 무연탄이었습니다.

    공장으로 들어온 원료탄은 그대로 성형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탄을 만들기에 알맞은 상태로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크기가 큰 것은 부수고 원료의 상태를 고르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연탄 제조에서는 석탄가루에 점결제와 수분을 더해 성형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 생산된 무연탄은 점결성이 좋아 별도의 점결제를 섞지 않고 구멍탄을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¹⁾

    준비된 탄가루가 성형기로 들어갔습니다.

    초기에는 사람의 힘으로 연탄을 찍는 수동식 기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석탄박물관에는 19개의 구멍을 가진 연탄을 만들던 수동식 19공탄 제조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후 연탄 소비가 늘면서 한 번에 한 장을 찍는 단탄윤전기에서 두 장을 찍는 쌍탄윤전기, 세 장을 찍어내는 윤전기로 제조설비도 발전했습니다.²⁾

    연탄이 압축될 때 원통 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그 구멍은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탄이 타려면 공기가 지나갈 길이 필요했습니다.

    아래쪽에서 들어온 공기가 구멍을 통과하면서 연소를 도왔습니다. 구멍의 수는 화력과 연소시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³⁾

    성형을 마친 연탄은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다뤄야 했습니다.

    처음 찍어냈을 때 수분을 품고 있던 연탄은 마르면서 무게도 줄었습니다. 당시 일반 가정용 연탄은 처음 성형했을 때 약 3.6킬로그램이었고, 건조된 뒤에는 3.3킬로그램 이상이 기준이었습니다.¹⁾

    그렇게 단단해진 연탄이 공장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석탄가루였던 것이 이제 사람이 들고 나르고 아궁이에 넣을 수 있는 연료 한 장이 된 것입니다.

    19공탄에서 22공탄으로

    연탄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억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시기에 따라 여러 규격이 사용됐습니다.

    구멍 수에 따라 19공탄·31공탄 같은 이름이 사용됐고, 가정에서는 훗날 22개의 구멍을 가진 연탄이 널리 쓰였습니다.¹⁾

    1950년대 중반 시중에 가정용 연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에는 19공탄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지역과 생산업체에 따라 다른 구멍 수의 제품도 만들어졌습니다.⁴⁾

    1970년대에는 가정용으로 19·23·31공탄, 업소용으로 41·42·49공탄 등이 사용됐습니다. 이후 규격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 1978년에는 22공탄으로 통일됐고, 다시 22공탄과 25공탄으로 나뉘었습니다.³⁾

    예전 사람들이 흔히 ‘구공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구멍이 아홉 개인 연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구멍탄’이 변한 말로 연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사용됐습니다.³⁾

    연탄의 규격이 중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타고 있는 연탄 위에 새 연탄을 올려 불을 이어가려면 위아래 연탄의 구멍이 맞아야 했습니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라면 새 연탄을 올려놓고 집게로 살짝 돌리던 손의 움직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구멍이 맞으면 아래쪽의 열과 공기가 새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장에서 똑같은 규격으로 연탄을 찍어내는 일이 결국 한 집의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연탄 한 장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가정에서 사용하던 일반 연탄은 지름 약 15센티미터, 높이 약 14.2센티미터였고 처음 찍어냈을 때 무게는 약 3.6킬로그램이었습니다.¹⁾

    한 장만 놓고 보면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장이면 7킬로그램이 넘습니다.

    열 장이면 36킬로그램입니다.

    백 장이면 360킬로그램입니다.

    몇백 장을 한꺼번에 들여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공장에서 연탄을 찍어내는 것으로 일이 끝날 수 없었습니다.

    연탄을 옮겨야 했습니다.

    차량에 실어야 했습니다.

    판매점으로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집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일의 사슬이 공장 밖에서도 계속됐습니다.

    공장에서 골목까지 사람이 옮겼다

    공장에서 나온 연탄은 소비지로 향했습니다.

    도시 곳곳에는 연탄공장과 연탄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많은 양을 차량으로 옮길 수는 있었지만 자동차가 모든 집의 문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좁은 골목이 있었고, 비탈길에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집도 있었습니다.

    차가 멈춘 곳에서부터는 다시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연탄을 내렸습니다.

    지게나 리어카에 실었습니다.

    집 안의 연탄을 쌓아두는 곳까지 날랐습니다.

    겨울철 주문이 몰리면 이 일은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탄광에서는 광부가 석탄을 캐냈습니다.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연탄을 만들었습니다.

    도로에서는 운전기사가 실어 날랐습니다.

    골목에서는 배달하는 사람이 다시 연탄을 날랐습니다.

    산속에서 시작한 일이 도시의 좁은 골목까지 이어졌습니다.

    새끼줄에 두 장씩 꿰어 들었다

    모든 집이 몇백 장씩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 조금씩 사다 쓰는 집도 있었습니다.

    연탄가게가 가까우면 직접 사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새끼줄이 등장했습니다.

    연탄 구멍에 새끼줄을 꿰어 두 장씩 묶었습니다.

    그것을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당시 골목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습니다. 인천의 생활사를 다룬 기록에도 새끼줄에 두 장의 연탄을 매달아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⁵⁾

    양손에 두 장씩이면 네 장입니다.

    3.6킬로그램을 기준으로 하면 14킬로그램이 넘습니다.

    평지에서 잠깐 드는 것과 언덕길을 걸어 집까지 가져가는 것은 달랐습니다.

    손에는 새끼줄이 걸렸습니다.

    옷에는 검은 탄가루가 묻었습니다.

    그래도 들고 갔습니다.

    그날 밤 방을 덥힐 연료였기 때문입니다.

    연탄 몇 장을 들고 골목을 걷는 모습에는 당시의 살림살이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연탄을 채우고 김장을 하면 겨울 준비가 끝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연탄을 사용하는 집에서는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겨울 동안 사용할 연탄을 들여놓았습니다.

    트럭에서 연탄이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한 장씩 옮겼습니다.

    마당 한쪽이나 창고, 처마 아래처럼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아래부터 줄을 맞췄습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살피며 한 단씩 높였습니다.

    검은 연탄이 벽처럼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김장을 했습니다.

    배추를 절였습니다.

    양념을 만들고 버무렸습니다.

    겨우내 밥상에 올릴 김치를 마련했습니다.

    집집마다 형편도 달랐고 준비하는 양도 달랐습니다.

    그래도 연탄을 채워놓고 김장까지 해놓으면 이제 겨울 준비는 다 했다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는 집을 따뜻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겨울 밥상을 지킬 것이었습니다.

    연탄이 든든하게 쌓이고 김장까지 끝나면 긴 겨울을 맞을 채비가 갖춰졌습니다.

    지금은 난방을 준비한다고 몇 달 치 연료를 집 안에 쌓아놓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겨울을 얼마나 준비했는지가 눈에 보였습니다.

    쌓인 연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겨울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연탄더미는 단순한 연료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한 집이 겨울을 건너기 위해 마련해놓은 준비였습니다.

    연탄은 불을 붙이는 것부터 일이었다

    연탄을 집에 쌓아놓았다고 바로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탄은 성냥불 하나를 갖다 댄다고 금세 활활 타오르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고체연료인 데다 처음 불이 붙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잘 마르지 않은 연탄은 불을 붙이기가 더 어려웠습니다.¹⁾

    그러니 처음 불을 살리는 데에도 수고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불이 살아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타고 있는 연탄 위에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연탄집게로 새 연탄을 조금씩 돌려 아래 연탄과 구멍을 맞췄습니다.

    공기가 통하면서 아래 연탄의 열이 위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 연탄도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다음 연탄을 갈아야 했습니다.

    아침에 살폈습니다.

    저녁에도 살폈습니다.

    잠들기 전에도 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는 집이 있었습니다.

    연탄은 값만 치르고 사오면 끝나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손과 시간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불이 꺼지면 이웃집 연탄을 빌려왔다

    아무리 살펴도 불을 꺼뜨리는 날은 있었습니다.

    갈아야 할 시간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궁이가 싸늘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처음부터 다시 불을 붙이는 방법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웃집에 가서 불이 붙어 있는 연탄 한 장을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벌겋게 살아 있는 연탄을 받아와 자기 집 아궁이에 넣었습니다.

    그 위에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옆집에서 건너온 불이 자기 집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연탄을 꾸기도 했고 불붙은 연탄을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연탄만 꾸는 것이 아니라 불까지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집의 불이 꺼졌을 때 옆집의 불이 다시 그 집의 방을 데웠습니다.

    같은 골목의 집들이 비슷한 연료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웃은 담장 너머에 사는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급할 때 연탄 한 장을 꾸러 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꺼진 불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불붙은 연탄 한 장을 빌릴 수 있는 집이기도 했습니다.

    연탄이 부족하면 겨울이 불안해졌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연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추워질수록 수요가 몰렸습니다.

    공장에서 많이 생산하더라도 운송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필요한 때에 연탄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1966년에는 가격통제와 공급 부족 등이 겹치면서 연탄 부족이 심해졌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한두 장이라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⁶⁾

    연탄이 떨어진다는 것은 생활이 불편해지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난방이 멈췄습니다.

    취사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연탄이 넉넉히 쌓여 있으면 당분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연탄더미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다시 가게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검은 연탄 한 장이 한겨울에는 생활의 시간을 움직였습니다.

    연탄 한 장은 혼자 집까지 오지 않았다

    연탄을 떠올리면 먼저 검은 원통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한 장을 거꾸로 따라가 보면 사람이 보입니다.

    탄광에서 무연탄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료를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탄가루를 준비하고 성형기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찍혀 나온 연탄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을 차량에 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가게에서 주문을 받고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에서는 다시 사람이 연탄을 날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그것을 받아 쌓는 집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온 연탄에는 다시 사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불을 붙였습니다.

    때를 맞춰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구멍을 맞췄습니다.

    재를 치웠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살폈습니다.

    불이 꺼지면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탄광에서 캐낸 검은 돌 하나가 공장을 거쳐 연탄이 되고, 연탄가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와 한 집의 불이 되기까지 수많은 손이 이어졌습니다.

    산업은 공장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집 안으로 들어와 생활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연탄이 쌓여 있었습니다.

    김장은 끝났습니다.

    아궁이에는 연탄불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긴 겨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면 이웃집의 불 한 장이 담장을 넘어왔습니다.

    석탄의 이야기는 그렇게 산업의 이야기에서 사람의 생활 이야기로 들어왔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그 집 안에서 이어집니다.

    연탄 한 장으로 겨울을 나던 시절.

    연탄을 갈고, 꾸어 쓰고, 재를 내다 버리며 하루의 시간을 연탄불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각주

    1.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탄의 원료와 성형 특성, 일반 가정용 연탄의 무게와 규격, 연탄의 착화가 쉽지 않았던 특성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인 연탄 제조에는 점결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내 무연탄은 점결성이 좋아 별도의 점결제를 넣지 않고 구멍탄을 성형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2. 보령석탄박물관, 「석탄의 채굴이용관」. 19공탄을 만들던 수동식 제조기와 연탄 수요 증가에 따라 한 장씩 찍는 단탄윤전기, 두 장씩 찍는 쌍탄윤전기, 세 장씩 생산하는 윤전기로 제조설비가 변화한 과정을 전시·설명하고 있다.

    3. 국립민속박물관, 「그 겨울 우리가 의지했던 연탄」. 연탄의 구멍이 공기 순환과 연소시간에 영향을 주며, 1970년대 가정용 19·23·31공탄과 업소용 41·42·49공탄 등이 사용된 뒤 1978년 22공탄으로 통일되고 이후 다시 22공탄과 25공탄으로 나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4.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연탄」.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이 가정용 난방연료로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1955년 생산된 19공탄이 주를 이루었고, 지역에 따라 구멍 수가 다른 연탄도 생산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5. 인천광역시, 『굿모닝인천』,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혹시 연탄」. 당시 생활 풍경 가운데 새끼줄에 연탄 두 장을 매달아 직접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6.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파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5년 이후 수요 증가와 가격 문제, 1966년의 심각한 공급 부족을 설명하며, 겨울을 앞두고 시민들이 한두 장의 연탄이라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산 아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도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장이 먼저 들어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산 깊은 곳에 검은 돌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 돌을 캐기 시작하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들어오자 집이 늘었습니다. 밥을 파는 곳이 생겼고 물건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물자를 실은 차가 오갔고, 철길을 따라 석탄이 도시로 빠져나갔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여러 탄광촌에서 벌어진 변화였습니다.

    그 중심에 석탄이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연료가 필요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석탄 생산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1951년 국내 석탄 생산량은 약 16만 톤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뒤 생산시설이 복구되고 증산정책이 추진되면서 1955년에는 131만 톤, 1960년에는 535만 톤으로 늘었습니다. 1965년에는 1,025만 톤, 1975년에는 1,759만 톤에 이르렀습니다.1)

    숫자가 커지는 동안 나라의 사정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무너진 생산시설과 교통망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산업을 움직일 에너지가 필요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할 연료도 필요했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연료만 바라보기 어려운 형편에서 국내에서 캘 수 있는 석탄은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를 중점과제로 두었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경영합리화와 석탄 증산을 제시했습니다.2)

    하지만 생산량이라는 숫자만 보고 있으면 그 시대의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석탄은 저절로 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광부의 출근길은 땅속으로 이어졌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출근길은 땅 아래로 향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갱 입구를 통과했다고 일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작업장이 깊은 곳에 있으면 막장까지 이동해야 했습니다.

    석탄층까지 길을 만들고 갱도를 뚫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보를 세우고, 석탄을 떼어내고, 캐낸 것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기계와 전기설비를 다루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뒤에는 석탄과 함께 섞여 나온 돌과 불순물을 가려내는 일이 기다렸습니다.

    광부 한 사람이 곡괭이를 들고 석탄을 캐는 장면만으로 탄광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탄광의 하루는 낮에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갑방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을방은 오후 4시부터 자정, 병방은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일하는 3교대 생활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근무조는 일주일 단위로 바뀌었습니다.3)

    한 작업조가 갱 밖으로 나오면 다음 작업조가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저녁밥을 먹는 시간에 출근하는 광부가 있었고, 마을이 잠든 자정에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출근은 회사 문을 열고 책상에 앉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차를 타고 경사진 갱도를 따라 지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과정도 하루 일과의 일부였습니다.3)

    이렇게 보면 석탄 생산량 뒤에는 톤으로 표시되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밤과 낮을 바꾸어 일한 사람의 시간입니다.

    석탄을 골라내는 사람도 있었다

    막장에서 캐낸 것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석탄은 아니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돌과 불순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를 골라내고 상품으로 쓸 석탄을 가려내는 선탄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탄광의 일을 남성 광부의 모습으로만 기억하면 땅 위의 선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탄광 기록에는 갱외부의 직무를 선탄부·운반부·전기기계부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선탄부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4)

    석탄산업은 막장에서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땅속에서 캐는 사람과 땅 위에서 가려내는 사람, 설비를 움직이는 사람과 운반하는 사람이 차례로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앞의 일이 멈추면 뒤의 일도 멈췄습니다.

    한 덩어리의 석탄이 상품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석탄을 캐는 것만큼 나르는 일도 중요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다음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송입니다.

    아무리 많이 캐도 필요한 곳까지 보내지 못하면 석탄은 산 아래 쌓여 있을 뿐입니다.

    전쟁 뒤 석탄 증산과 함께 철도망 확충이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이 개통됐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철도 확충이 석탄 수송 여건을 크게 개선했으며, 특히 영암선이 오늘날 태백 일원의 석탄 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기록합니다.5)

    철길이 열리자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대량으로 다른 지역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탄광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철도에서 다시 시작됐습니다.

    석탄을 화차에 실어야 했습니다. 열차를 운행해야 했고 선로와 차량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도착지에서는 다시 석탄을 내려 다음 운송수단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생산과 운송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더 캐려면 더 많이 나를 길이 필요했고, 수송 여건이 좋아지면 탄광은 더 넓은 시장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검은 돌 하나가 철길을 필요로 했고, 철길은 다시 새로운 일을 불러왔습니다.

    정부도 석탄을 더 캐려고 했다

    석탄 증산은 탄광회사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도 제도와 정책을 통해 생산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대한석탄공사는 1950년 11월 1일 발족했습니다. 이후 1950년대에는 석탄 증산계획이 추진됐고, 1961년에는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에는 「광업개발 조성법」이 마련됐습니다. 인접 광구를 묶어 규모 있게 개발하기 위한 탄좌회사 설립도 이어졌습니다.6)

    석탄은 어느 한 탄광의 상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산업을 키우고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다뤄졌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전력과 석탄을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라는 이름으로 함께 다룬 것도 같은 흐름에 있었습니다.2)

    땅속에 묻혀 있던 검은 돌이 정부의 산업계획, 철도와 기업, 수많은 노동자의 일과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일자리가 생기자 사람이 모였다

    탄광이 커지면서 산골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누군가는 혼자 왔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이 늘어나면 탄광 밖에도 일이 생깁니다.

    사람은 먹어야 했습니다. 잠잘 집이 필요했습니다. 옷과 신발, 생활용품도 사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학교가 필요했고 몸이 아프면 의료시설과 약국을 찾았습니다.

    광부가 받은 월급은 광부의 주머니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는 돈이 되고 아이의 학용품 값이 됐습니다. 식당의 매출이 됐고 가게 주인의 수입이 됐습니다.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에게도 일이 돌아갔습니다.

    석탄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의 생계도 탄광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탄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속도는 마을이 준비되는 속도와 늘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따라 먼저 사람이 들어오고, 그 뒤에 생활에 필요한 공간과 장사가 따라붙었습니다. 탄광을 중심으로 생긴 지역을 볼 때 생산시설만 살펴서는 변화의 크기를 알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도구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먹고 쉬어야 했고, 다시 다음 교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습니다. 장을 볼 곳과 아이들이 다닐 곳, 몸을 씻고 생활을 이어갈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탄광은 두 겹의 일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석탄을 직접 캐고 고르고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도록 받쳐주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영역을 모두 석탄산업의 직접 고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식당 주인이나 상점 주인이 석탄회사 직원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탄광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거나 규모가 훨씬 작았을 장사와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석탄 한 덩어리가 몇 개의 직업을 만들었다’고 숫자를 만들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 고용과 주변 상권, 운송과 생활서비스를 어디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탄광의 고용이 갱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산업의 일자리는 광산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모이면 그들의 생활을 받치는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면 광부에서 선탄부로, 선탄장에서 철도로, 철도에서 탄광촌의 가게와 식당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검은 돌 하나가 사람의 이동과 생활의 자리까지 바꾸고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세 개의 시간이 흘렀다

    탄광촌의 하루는 탄광의 교대시간과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갑방 광부가 출근하는 아침에 병방 광부는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갑방과 을방이 엇갈렸고, 자정이 되면 병방이 다시 갱도로 향했습니다.3)

    누군가에게 아침인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퇴근 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한집에서도 생활시간이 달랐습니다. 낮에 자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은 소리를 줄여야 했고, 저녁 무렵 출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식사시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마친 광부에게는 몸에 묻은 탄가루를 씻는 일도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퇴근한 광부들이 목욕탕을 이용했던 모습도 전합니다.3)

    탄광촌을 단순히 ‘광산 옆에 생긴 마을’이라고 부르면 이런 시간이 빠집니다.

    탄광의 교대시간은 광부만의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잠과 식사, 상점과 식당의 손님이 움직이는 시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탄광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시절, 마을에는 서로 다른 하루가 겹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석탄의 값어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석탄산업이 계속 한 방향으로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생산이 빠르게 늘면서 석탄은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7)

    에너지의 중심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석탄의 역할이 곧바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은 수입 석유에 대한 부담을 키웠고 국내 석탄의 중요성을 다시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내 석탄 생산량은 1970년 1,239만 톤에서 1975년 1,759만 톤으로 늘었습니다.1)

    이 변화는 숫자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석탄 수요가 늘면 탄광이 바빠졌습니다. 생산이 늘면 운송량도 늘어났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이 들어오면 탄광촌의 생활도 커졌습니다.

    반대로 다른 에너지원이 석탄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 역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역의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연료를 선택하는가는 멀리 떨어진 산골의 일자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돌을 캐는 데는 대가도 따랐다

    석탄이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이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땅속의 일은 위험했습니다.

    갱도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고 발파와 운반 과정에서도 사고가 날 수 있었습니다. 탄가루와 암석 먼지가 가득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일한 광부에게 진폐증은 심각한 직업병이었습니다.

    산업이 성장했다는 말 뒤에는 그 산업을 몸으로 떠받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석탄 생산량이 몇백만 톤 늘었다는 통계와 한 사람이 막장으로 내려가는 장면은 같은 역사의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한쪽만 보아서는 그 시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그 에너지를 캐기 위해 땅속으로 내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 석탄을 골라낸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실어 나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돌아갈 집과 함께 살아갈 마을이 있었습니다.

    석탄산업의 역사는 이 모두를 함께 보아야 사람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는 몇 사람의 일이 들어 있었을까

    검은 석탄 한 덩어리를 손에 올려놓으면 그저 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돌이 땅속에 있을 때부터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갱도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갱도를 지키고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캐낸 것을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고 석탄과 돌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 밖에는 철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고 선로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밥을 파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 정확히 몇 사람의 일이 연결돼 있었다고 하나의 숫자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숫자를 억지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땅속에서 한 사람이 캐낸 석탄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졌습니다. 선탄장을 지나 철도에 실렸고, 다시 필요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받은 임금은 탄광촌의 생활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한 산업이 다른 산업과 생활을 만나면서 일의 사슬이 길어진 것입니다.

    석탄은 연료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일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월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게의 손님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검은 돌의 여행은 탄광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길을 타고 도시로 온 석탄은 다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잘게 부서진 석탄은 일정한 모양으로 찍혀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료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 장, 두 장씩 세어 샀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석탄은 이제 연탄이라는 이름으로 골목 안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연탄을 만드는 사람, 싣는 사람, 파는 사람, 그리고 집집마다 나르는 사람입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일의 길이 도시의 골목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석탄은 어떻게 연탄 한 장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한 장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리의 아궁이 앞까지 왔을까.


    각주

    1.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국내 석탄 생산량을 1951년 16만 톤, 1955년 131만 톤, 1960년 535만 톤, 1965년 1,025만 톤, 1970년 1,239만 톤, 1975년 1,759만 톤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2. 대한민국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주요 시책으로 ‘전력, 석탄 등 에너지공급원의 확보’를 제시하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개편·경영합리화와 석탄증산을 명시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와 방침」. 우리역사넷 원문 자료
    3.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탄광」의 탄광 생활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3교대 작업과 갱내 이동, 작업 후 생활 모습을 확인했다. 국가기록원 「탄광」
    4. 국가기록원의 탄광 관련 기록물에는 탄광의 직무를 사무·채광·전기·선탄·공작·노무·갱외·기계 등으로 구분하고, 갱외부의 선탄부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탄광 관련 기록물 상세내용. 국가기록원 기록물 상세내용
    5.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의 개통으로 석탄수송 여건이 크게 개선됐으며, 특히 영암선이 현재 태백시 일원의 석탄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6. 대한석탄공사는 대한석탄공사법에 따라 1950년 11월 1일 발족했다. 이후 1961년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 「광업개발 조성법」 등이 제정됐으며 인접 광구를 통합한 탄좌회사 설립도 추진됐다. 국가기록원,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7. 국가기록원 「석탄정책」은 석탄이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으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위치를 내주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정책」
  • 회색 시멘트는 어떻게 우리 동네를 바꾸었을까

    회색 시멘트는 어떻게 우리 동네를 바꾸었을까

    비가 오면 마을길은 질척거렸습니다.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홈이 생겼고 낮은 곳에는 물이 고였습니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며칠 들면 이번에는 흙먼지가 일었습니다. 논밭으로 가는 사람도, 장에 가는 사람도,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그 길을 밟았습니다. 농산물이 밖으로 나가고 읍내에서 사 온 물건이 들어오는 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초, 그런 마을에 전에 없던 양의 시멘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970~1971년 정부는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추진하면서 전국 33,267개 마을에 각각 시멘트 336포를 공급했습니다. 마을 앞길을 넓히고 공동빨래터와 공동우물을 만드는 등의 공동사업에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후 사업성과가 우수하다고 평가된 1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이 추가로 지원됐습니다.1)

    지금 보면 시멘트 336포가 대단한 숫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농촌마을에서 그 시멘트는 포대 안에 든 건축재료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흙으로 남아 있던 공간을 사람들이 직접 바꾸어볼 수 있는 재료가 마을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를 내려놓는다고 길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를 먼저 고칠지 정하고 바닥을 다진 뒤 모래와 자갈, 물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길에 펼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처럼 레미콘 차량이 와서 이미 배합된 콘크리트를 쏟아놓는 풍경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마을의 소규모 콘크리트 공사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콘크리트를 비비는 일이 흔했습니다.

    넓은 철판을 놓고 그 위에 모래와 자갈, 시멘트를 펼친 뒤 물을 더했습니다. 사람들이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습니다. 손에 든 것은 흙을 깊이 파는 삽보다는 날이 납작하고 네모난 삽이었습니다.

    콘크리트를 비비는 모습도 지금 생각하는 삽질과 조금 달랐습니다. 재료를 높이 퍼 올려 뒤집기보다는 마주 선 사람들이 재료 밑으로 삽을 밀어 넣어 서로의 앞으로 보냈습니다. 맞은편 사람이 다시 자기 앞의 재료를 상대편 쪽으로 밀어 보내면서 모래와 자갈, 시멘트와 물을 섞었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사람이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동안 따로 놀던 재료가 조금씩 한 덩어리의 콘크리트가 되어갔습니다.

    공장에서 거대한 설비를 거쳐 만들어진 시멘트가 마을에 도착한 마지막 순간에는 사람의 손을 만났습니다.

    거대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시멘트는 마지막에 사람의 삽을 만났습니다.

    시멘트는 공장에서 만들었지만 길은 마을에서 만들었다

    마을길 몇십 미터를 포장하는 데도 손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는 모래와 자갈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은 물을 날랐습니다. 땅을 파고 바닥을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판 위에서 콘크리트를 비비고, 그것을 옮겨 길에 펼치는 사람도 있어야 했습니다.

    정부가 시멘트를 마을까지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대 속 회색가루를 실제 길로 바꾸는 일은 결국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초기 새마을가꾸기사업이 마을 앞길 확장, 공동빨래터와 공동우물 같은 공동사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완성된 시설 하나를 가져다 놓는 것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필요한 일을 정하고 노동을 보태야 하는 사업이 많았습니다.

    시멘트 336포는 그래서 물건인 동시에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무엇을 먼저 고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구의 손으로 할 것인가.

    길 하나가 바뀌자 하루가 달라졌다

    마을 안길 포장이라는 말을 지금 읽으면 그저 토목공사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매일 흙길을 밟고 살던 사람에게 길의 변화는 하루의 변화였습니다.

    비가 온 뒤 진창을 피해 걷던 발걸음이 달라졌고 수레와 자전거가 지나가는 길도 달라졌습니다. 농산물을 밖으로 내보내고 생활물자를 마을 안으로 들여오는 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을길은 더 큰 도로와 연결되었고 그 도로는 다시 읍내와 도시로 이어졌습니다.

    시멘트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물질이었지만, 그 위에서는 사람과 물건이 이전보다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회색 시멘트가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만들어낸 변화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변화는 발밑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또 하나의 변화가 보였습니다.

    지붕이었습니다.

    1967년 이미 「농어촌 지붕개량 촉진법」이 제정되어 정부의 지붕개량 정책이 시작됐고, 새마을가꾸기사업에 지붕개량이 포함되면서 사업은 더욱 강하게 추진됐습니다. 1971년 대통령비서실이 작성한 「농가지붕 개량사업 년차별 지원계획」에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지원계획과 개량 동수, 이에 필요한 시멘트 소요량까지 담겨 있습니다. 초가지붕을 기와와 슬레이트, 함석 등으로 바꾸는 것이 당시 지붕개량의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2)

    그래서 마을의 변화는 발밑과 머리 위에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흙길 옆에 콘크리트길이 생기는 동안 초가지붕 사이에는 새로운 재료를 얹은 지붕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마을 전체가 새 모습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한동안 같은 골목 안에 나란히 존재했습니다.

    지붕개량에는 외관을 바꾸는 것 이상의 정책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초가지붕에 사용하던 볏짚을 가마니나 새끼 같은 고공품 생산과 농외소득, 연료 등 다른 용도로 돌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정책에서는 생활환경과 소득문제를 서로 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길이 달라지고 지붕이 달라졌으며 담장과 배수로, 공동시설도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당시 새마을운동을 설명하면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빠집니다.

    마을만 고치는 운동은 아니었다

    새마을운동이 바꾸려 했던 대상에는 사람의 생활태도와 의식도 들어 있었습니다.

    1971년 새마을정신은 근면·자조·협동으로 규정됐고, 정부는 1972년부터 이를 본격적인 새마을운동으로 확대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역점과제를 생활환경개선·소득증대·의식개혁의 세 영역으로 구분합니다.3)

    이 대목은 당시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길을 넓히고 지붕을 바꾸는 것으로 마을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남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해보며,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은 힘을 합쳐 해결하자는 생활태도까지 함께 강조했습니다.

    1972년 작성된 새마을운동 관련 문서에도 근면·자조·협동과 함께 환경개선, 소득증대, 정신계발이 실천과제로 제시돼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단순한 농촌 토목사업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길을 고치는 일과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하나의 운동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도박도 마을이 고쳐야 할 문제였다

    의식개혁이라는 말은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70~1973년 새마을운동의 의식개혁 사업을 설명하면서 퇴폐풍조 일소, 협동분위기 조성, 근검절약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당시 농촌마을의 고질적인 병폐로 여겨졌던 도박을 근절하려는 움직임도 이 과정에 포함됐습니다.4)

    그러니 도박 없는 마을이라는 말은 어느 한두 마을에서 우연히 등장한 별난 구호로만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활환경을 고치는 것과 함께 마을의 생활습관과 공동체 질서를 바꾸려는 흐름이 넓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범죄 없는 마을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1972년 대한뉴스 제867호에는 충북 단양군 매포면 어의곡에서 열린 ‘범죄없는 마을 육성 단합대회’가 등장합니다. 효부와 효자, 모범청년을 표창하고 경찰관들이 주민에게 영농기술을 교육하면서 새마을정신을 강조하는 모습까지 영상기록에 남아 있습니다.5)

    훗날 별도의 제도로 발전한 ‘범죄없는 마을’과 1970년대 초의 이런 움직임을 같은 제도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마을에서 무엇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길만 깨끗하면 새마을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돈을 쓰고, 서로 어떻게 협력하며 살아갈 것인지까지 변화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운동은 환경개량운동인 동시에 생활개선운동이었고, 당시의 표현으로는 의식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시멘트와 정신이 함께 들어왔다

    이제 처음의 시멘트 336포를 다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정부가 마을에 내려보낸 것은 시멘트였습니다. 하지만 시멘트를 받아든 마을에 요구된 것은 노동과 참여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 의논하고, 필요한 재료를 마련하고, 함께 몸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부는 사업실적을 평가해 성과가 좋은 마을에 추가 자재를 지원하는 방식도 사용했습니다. 16,600개 마을에 추가된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은 그런 차등지원 방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자발적인 주민 참여와 강한 국가 주도의 행정이 함께 있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으로 당시 모습을 설명하면 전체를 놓치게 됩니다.

    주민들이 자기 마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면서 얻은 경험이 있었고, 동시에 국가가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가치와 생활방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강력한 정책적 추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의 풍경에는 시멘트 포대와 삽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을회의가 있었고 새마을지도자가 있었으며 교육과 표어가 있었습니다. 환경개선과 소득증대, 의식개혁이 따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진행됐습니다.

    마을의 모양을 바꾸는 일과 사람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을 함께 시도했던 것입니다.

    삽은 그 시대의 기계였다

    다시 철판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장에서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에는 거대한 기계가 있었습니다. 석회석을 부수는 쇄석기가 있었고, 원료를 갈아주는 분쇄설비와 높은 온도로 원료를 구워내는 킬른이 있었습니다. 완성된 시멘트는 포대에 담겨 트럭과 철도를 타고 전국으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기계가 마을의 마지막 자리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을길의 작은 구간을 포장하고 배수로를 만들 때는 사람의 몸이 기계가 닿지 못한 자리를 채웠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사람들이 납작한 네모삽을 재료 밑으로 밀었습니다. 맞은편으로 보낸 재료가 다시 돌아왔고, 그 동작을 되풀이하는 동안 마른 재료에 물이 스며들어 콘크리트가 되었습니다.

    허리를 펴면 잠깐이었고 다시 삽을 밀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노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마을 곳곳의 작은 공사를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습니다. 큰 장비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과 재료가 있는 자리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화를 거대한 공장과 고속도로만으로 기억하면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기계가 시멘트를 만들었다면, 마을에서는 사람이 그 시멘트를 생활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회색길 위로 다음 시대가 들어왔다

    마을 안길이 단단해지면 그 위를 지나는 것도 달라졌습니다. 자전거와 수레가 다니던 길에 경운기가 들어오고, 조금씩 자동차도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농로가 정비되고 농업기반시설이 확충되면서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새마을운동 역시 초기의 생활환경개선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농로 개설과 농지정리, 협동영농과 소득증대사업으로 범위가 넓어졌고, 이후에는 농촌을 넘어 도시와 공장, 직장과 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됐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 사람의 일과 생활로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길이 달라지면 이동이 달라지고, 이동이 달라지면 물건을 사고파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새로운 재료와 장비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만들고 운반하고 판매하고 고치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사람이 철판 위에서 삽으로 비비던 콘크리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믹서와 레미콘차, 콘크리트펌프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마을이 달라지는 동안 노동의 모습도 함께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이제 한국의 과거에만 남아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2026년 7월에도 피지와 파푸아뉴기니의 시범마을 지도자와 공무원 등 39명이 한국에서 9박 10일 동안 새마을교육을 받고 각 지역에 적용하기 위한 실행계획을 만들었습니다.6)

    그들이 1970년대 한국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가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마다 경제수준과 문화, 행정제도와 공동체의 모습이 다르므로 당시 한국에서 사용한 방법이 다른 나라에서 똑같은 결과를 낸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경험을 배우려는 움직임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배우려는 것은 시멘트 336포를 나누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지역의 문제를 주민이 함께 찾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며, 외부의 지원과 주민의 참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지역개발의 경험에 더 가깝습니다.

    한때 한국의 마을에서 길을 닦으며 사용했던 근면·자조·협동이라는 말이 반세기를 건너 다른 나라의 농촌개발 현장에서 다시 검토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은 남고 사람은 늙었다

    옛 마을에 가면 처음 포장했던 콘크리트길을 그대로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위에 아스팔트가 다시 깔리고 길이 넓어졌으며 배수로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한때 근대화의 상징처럼 등장했던 슬레이트 지붕 역시 세월이 지나 철거되거나 다른 지붕재로 교체되었습니다.

    풍경은 또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길 아래에는 이전의 길이 있습니다.

    처음 시멘트가 마을에 들어왔던 날 포대를 뜯었던 사람이 있었고, 철판을 놓고 모래와 자갈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선 채 네모난 삽을 앞으로 밀었습니다. 맞은편으로 간 재료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콘크리트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길에 펼쳐 굳혔습니다.

    그 위로 사람들이 걸었습니다. 수레와 자전거가 지나갔고 경운기와 자동차가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 학교에 갔으며 어른들은 논밭과 장터로 향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때 삽을 잡았던 사람들은 늙었지만, 그들이 만들었던 길은 다시 포장되고 넓어져 다음 시대의 길 속에 남았습니다.

    회색 시멘트를 따라가다 사람을 만났다

    처음에는 시멘트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캐낸 석회석이 어떻게 회색가루가 되었는지 살펴보았고, 그 한 포대를 만들고 운반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산업과 사람의 일이 연결되는지도 따라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포대가 마을에 도착한 뒤를 따라와 보니 시멘트보다 사람이 더 많이 보였습니다.

    포대를 뜯고 모래와 자갈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삽을 밀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 길부터 고칠지 의논하고 함께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가 바꾸려 했던 것도 길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흙길을 고치고 지붕을 바꾸는 생활환경개선이 있었으며, 농가의 소득을 높이려는 사업이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도박과 퇴폐풍조를 없애고 근검절약과 협동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려는 의식개혁도 추진됐습니다.

    근면·자조·협동은 그래서 길가에 붙어 있던 세 단어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마을의 모양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는 주민 스스로 움직인 힘이 있었고 국가의 강한 추진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다시 살펴볼 부분 역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길과 집만 고친 환경정비사업으로 새마을운동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것은 회색 시멘트였습니다.

    그 시멘트를 길로 만든 것은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철판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네모난 삽을 밀던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콘크리트만 비비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길 위로 자전거가 지나가고 경운기가 들어왔으며 자동차가 들어왔습니다. 오래된 초가지붕 옆에는 새로운 지붕이 올라갔고, 마을 밖 세상과 이어지는 길은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사람에게도 달라질 것을 요구한 시대가 함께 지나갔습니다.

    어떤 시대는 거대한 기계보다 몇 자루의 삽에서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앞으로 삽을 밀던 그 사람들이 만든 회색길 위로, 다음 시대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각주

    1.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이란」, 새마을운동 기록물. 1970~1971년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6포를 공급했으며, 사업성과가 우수한 1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 지원했다고 기록한다.
    2. 대통령비서실 경제제1비서관실, 「농가지붕 개량사업 년차별 지원계획」, 1971.12.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EA0005513. 1972~1976년 지붕개량 지원계획과 개량 동수에 따른 시멘트 소요량 등을 담고 있으며, 국가기록원 관련 해설에는 기와·슬레이트·함석 등의 지붕재가 제시되어 있다.
    3. 지방행정연수원, 「새마을운동(박정희 대통령 친필문서)」, 1972.4.26,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Z00000201.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제시하고 환경개선·소득증대·정신계발을 실천과제로 제시한다.
    4.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물―1970년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역점과제를 생활환경개선·소득증대·의식개혁으로 구분하며, 기반조성기의 의식개혁 내용으로 퇴폐풍조 일소, 협동분위기 조성, 근검절약 실천 및 도박 근절을 설명한다.
    5. 국정홍보처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867호 「이런일 저런일」, 1972.2.19. 충북 단양군 매포면 어의곡의 ‘범죄없는 마을 육성 단합대회’를 기록하고 있다.
    6. 새마을운동중앙회, 「2026 피지·파푸아뉴기니 초청 새마을교육 수료식 개최」, 2026.7.31. 양국 시범마을 지도자와 공무원 등 39명이 9박 10일간 교육을 받고 현지 적용을 위한 실행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 시멘트 한 포대는 몇 사람의 일을 움직였을까

    시멘트 한 포대는 몇 사람의 일을 움직였을까

    공사장 한쪽에 시멘트 포대가 쌓여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종이포대 겉에는 회사 이름과 제품명이 찍혀 있었고, 안에는 회색 가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들어 나르는 사람에게 시멘트는 무거운 물건이었고, 미장하는 사람에게는 물과 모래를 섞어 써야 하는 재료였습니다.

    공장을 짓는 사람에게도 필요했고, 집을 짓는 사람에게도 필요했습니다.

    도로와 다리에도 들어갔고, 학교와 창고와 공장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시멘트 한 포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이 한 포대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사람이 일을 했을까.

    포대를 만든 사람만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색 가루가 어디에서 왔는지 거꾸로 따라가야 합니다.

    한 포대의 시작은 산에 있었다

    시멘트공장보다 먼저 만나는 곳은 산입니다.

    석회석이 있는 곳을 찾는 사람이 있고, 돌을 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발파가 필요했고 굴착장비가 움직였습니다.

    커다란 돌을 잘게 부수는 설비가 돌아갔고, 그것을 공장까지 옮기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공장에 들어왔다고 곧바로 시멘트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료를 고르고 섞고 뜨거운 가마에서 구워야 했습니다.

    다시 식히고 갈아야 했습니다.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고장 난 설비를 고치는 사람도 있어야 했습니다.

    전기가 필요했고 연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멘트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광산과 운송과 기계와 전기와 시험이라는 서로 다른 일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만드는 사람 옆에는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장은 물건을 많이 만드는 곳입니다.

    그러나 많이 만드는 것만으로 공장이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오늘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 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는 사람이 있고 부족한 자재를 사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계를 점검하는 사람이 있고 제품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문을 받고 출하시간을 정하고 차량을 배치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리해야 하고 원가도 계산해야 합니다.

    사람도 관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회색 시멘트였지만 그 뒤에는 생산, 품질, 시험, 설비, 구매, 영업, 운송, 회계와 경영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품질을 맡은 사람의 일은 조금 달랐습니다.

    생산하는 사람은 물건을 만들어야 하지만 품질을 맡은 사람은 때로 그 물건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생산이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내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콘크리트를 만드는 사람 옆에는 콘크리트를 의심하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그 의심은 일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된 물건을 계속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시멘트를 따라갔더니 발전소가 나왔다

    여기서 시멘트와 조금 떨어져 보이는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석탄을 태워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입니다.

    석탄을 태우고 나면 재가 남습니다.

    그 가운데 미세한 재를 포집해 품질을 갖추도록 관리한 플라이애시는 콘크리트에 사용되는 재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제 도로와 교량용 콘크리트에도 플라이애시를 사용한 배합이 적용되어 왔습니다.1)

    한쪽에서는 전기를 만들고 남은 것이 다른 쪽에서는 다시 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시멘트에서 시작했던 길이 석탄과 발전소로 이어집니다.

    석탄을 공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발전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를 모으고 저장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필요한 곳까지 운반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발전소까지 와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제철소가 나타났다

    철을 만드는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철 과정에서 생기는 고로슬래그 역시 적절하게 가공하면 콘크리트에 사용되는 재료가 됩니다.

    플라이애시와 고로슬래그 미분말은 실제 건설공사의 품질관리 대상 재료로 다뤄지고 있습니다.2)

    철을 만드는 산업과 콘크리트를 만드는 산업이 서로 전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철소에서 나온 물질이 가공되고 검사되고 저장되고 운반되어 다시 콘크리트와 만났습니다.

    여기쯤 오면 처음의 시멘트 포대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광산이 나왔습니다.

    발전소가 나왔습니다.

    제철소가 나왔습니다.

    기계공장이 있었고 운송업이 있었습니다.

    시멘트를 포대에 담던 시절에는 포장재를 만드는 산업도 필요했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 안에 이 모든 산업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산업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공장을 떠난 뒤에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이제 방향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시멘트가 만들어지기 전을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번에는 만들어진 시멘트가 어디로 가는지를 따라가겠습니다.

    그중 한 곳이 레미콘공장입니다.

    그곳에는 시멘트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와 자갈이 들어옵니다.

    물이 필요하고 콘크리트의 성질을 조절하기 위한 재료도 들어옵니다.

    이것들을 정해진 비율에 따라 계량하고 섞어야 합니다.

    여기에도 생산하는 사람이 있고 시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골재의 상태가 달라지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재료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이 달라지면 실제 배합도 영향을 받습니다.

    생산하는 사람에게는 일정한 시간에 필요한 물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품질을 맡은 사람에게는 다른 문제가 보입니다.

    제대로 만들어졌는가.

    정해진 조건을 만족하는가.

    사용해도 되는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지만 바라보는 곳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빨리 보내야 하는 사람과 멈춰 세워야 하는 사람

    주문이 몰리는 날에는 공장이 바쁩니다.

    차량이 계속 들어오고 나갑니다.

    한 차량이 늦어지면 다음 차량의 시간에도 영향을 줍니다.

    현장에서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펌프카가 준비되어 있고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며 한번 시작한 타설을 계획대로 이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산은 빨리 보내야 합니다.

    현장은 제시간에 받아야 합니다.

    경영은 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품질을 맡은 사람은 때로 이 흐름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면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산은 속도를 보았고 품질은 기준을 보았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도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빨리 만드는 것과 제대로 만드는 것은 서로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지켜내는 것이 산업의 일이었습니다.

    레미콘차가 공장 문을 나섰다

    배합을 마친 레미콘을 실은 차량이 공장을 출발합니다.

    이쯤이면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레미콘은 공장에서 모양이 완성되어 포장되는 일반적인 공산품과 조금 달랐습니다.

    시멘트와 물이 만난 뒤에는 반응이 진행됩니다.

    차량이 달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릅니다.

    여름과 겨울의 조건이 다르고 현장까지 가는 시간도 매번 같지 않습니다.

    교통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공장에서 제대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현장에 도착한 순간의 상태까지 아무 확인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미콘차가 현장에 도착하면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립니다.

    현장에는 다시 시험하는 사람이 있었다

    차량이 도착했다고 곧바로 콘크리트를 붓는 것은 아닙니다.

    현장에서는 굳지 않은 콘크리트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필요한 시험을 하고 시료를 채취합니다.

    이후 강도를 확인하기 위한 공시체도 만듭니다.

    공장에서 품질을 관리했는데 현장에서 왜 다시 확인해야 할까요.

    공장에서 확인한 것과 현장에서 지금 사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완전히 같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산과 현장의 시간이 다시 만납니다.

    타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몇 분도 아깝습니다.

    콘크리트가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뻑뻑하면 작업도 힘들어집니다.

    그렇다고 작업하기 편하게 만들겠다고 현장에서 임의로 물을 더한다면 물-시멘트비가 달라집니다.

    시멘트의 양에 비해 물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처음 설계했던 콘크리트가 목표했던 강도와 내구성에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당장은 부드러워져 다루기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는 오늘 붓고 오늘 끝나는 물건이 아닙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장에도 확인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공장에서 시작된 의심은 공장 문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몇 분과 몇십 년이 마주치는 곳

    공사현장을 생각해보면 품질을 확인하는 사람의 자리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차량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비도 기다립니다.

    사람도 기다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은 늘어납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때 누군가는 말해야 합니다.

    사용해도 되는가.

    아니면 멈춰야 하는가.

    몇 분의 공정과 앞으로 오랫동안 사용해야 할 구조물이 같은 자리에서 마주칩니다.

    도로와 다리, 터널과 철도처럼 한번 만들어 오랫동안 사용하는 구조물이라면 그 판단의 무게는 더욱 커집니다.

    콘크리트가 구조물 속에서 굳어버린 뒤에는 공장에서 만든 작은 제품처럼 불량품 하나만 꺼내 새것으로 갈아 끼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품질은 마지막에 한 번 검사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료를 고르는 데서 시작해 생산하고 운반하고 현장에서 확인하고 타설하고 굳히는 과정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의 일이 끝나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책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시멘트 한 포대와 연결된 직업의 숫자를 세어보고 싶었습니다.

    열 개일까.

    오십 개일까.

    백 개가 넘을까.

    예전에 시멘트 한 포대가 수많은 일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한 포대를 끝까지 따라와 보니 숫자 하나를 정하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어디까지를 시멘트와 연결된 일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경계가 계속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석회석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시멘트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계를 고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품을 시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문을 받고 원가를 계산하고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발전소에서 나온 재를 다시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철소에서 나온 물질을 가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멘트를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고 레미콘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장에는 도착한 콘크리트를 다시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빨리 가려고 할 때 잠시 멈춰 세우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크리트가 도로가 되고 다리가 되고 철도가 되고 공장이 되었습니다.

    그 도로를 따라 다시 물건이 움직였습니다.

    그 철도를 따라 사람이 이동했습니다.

    새로운 공장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멘트 한 포대가 몇 개의 직업을 만들었는지를 숫자 하나로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 포대의 시멘트를 따라갔을 뿐인데, 그 뒤에서 한 시대의 산업과 사람의 일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각주

    1. 한국도로공사 관련 콘크리트용 광물질 혼화재 품질자료에서는 플라이애시를 결합재로 사용하는 포장콘크리트와 플라이애시·고로슬래그 미분말을 함께 사용하는 고성능 콘크리트 적용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건설기술정보시스템(CODIL), 「콘크리트용 혼화재료 품질 잠정지침에 따른 시험비 설계반영 요청」.
    2. 건설공사 품질관리 자료에서는 플라이애시를 KS L 5405, 고로슬래그 미분말을 KS F 2563에 따라 시험·검사하도록 제시하고 있으며, 한국도로공사의 건설재료 품질기준에서도 시멘트·레미콘·플라이애시·고로슬래그 미분말 등을 각각 품질관리 대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건설기술정보시스템(CODIL),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건설재료 품질기준」.
  • 돌은 어떻게 시멘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었을까

    돌은 어떻게 시멘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었을까

    산을 바라보면 돌이 먼저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능선이 보입니다. 산허리를 깎아놓은 채석장에 들어가서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돌이 숨어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 가운데 석회석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회색빛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을 캐고 부수고 뜨거운 가마에서 구운 뒤 다시 곱게 갈면 전혀 다른 물건이 됩니다.

    시멘트입니다.

    오늘은 시멘트를 쉽게 만납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도 있고, 학교와 병원에도 있고, 우리가 달리는 도로와 다리에도 있습니다. 터널과 댐, 공장과 항만에도 들어갑니다.

    너무 흔해서 우리는 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멘트는 한때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했던 회색가루를 스스로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풍경도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다시 세우려면 먼저 재료가 필요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집은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끊어진 길도 이어야 했습니다. 학교와 공장, 철도와 항만도 복구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돌아와도 사람이 살아갈 공간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세우려면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목재도 필요했고 철도 필요했습니다. 유리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시멘트가 필요했습니다.

    1950년대 한국은 필요한 시멘트를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기존 생산시설까지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엔한국재건단은 전후 복구사업 가운데 하나로 삼척의 시멘트 생산시설을 복구했고, 생산능력을 연 6만 톤에서 10만 톤으로 늘렸습니다. 이어 문경에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시멘트공장이 들어섰습니다. 1957년 준공된 문경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약 20만 톤이었습니다.¹⁾

    지금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공장이 생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공장을 조금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공장 하나만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생겼습니다.

    돌을 캐는 곳에서 일이 시작됐다

    시멘트공장은 아무 곳에나 세울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료인 석회석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했습니다.

    산을 조사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석회석을 캐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단단한 암반을 뚫고 발파하고, 떨어져 나온 돌을 모으고, 큰 돌을 잘게 부수고, 그것을 공장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굴착기와 운반장비가 필요했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고치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했고 연료가 필요했습니다.

    한 덩이의 돌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이미 여러 사람의 일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1970년 국립영화제작소가 남긴 시멘트공업 기록도 이야기를 석회석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기록은 석회석을 시멘트의 중요한 원료로 소개하면서 채굴에서 생산과 출하, 건설현장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²⁾

    석회석은 공장에 도착했다고 곧바로 시멘트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돌을 부숩니다.

    다른 원료와 적절하게 섞습니다.

    곱게 갈아 가마로 보냅니다.

    가마 안에서는 매우 높은 온도로 원료가 구워집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덩어리 모양의 클링커가 만들어집니다.

    클링커를 식힌 뒤 석고 등을 더해 다시 곱게 갈면 우리가 아는 시멘트가 됩니다.

    공정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생산설비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었고, 가마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료를 검사하고 제품의 품질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기설비를 관리하는 사람, 기계를 정비하는 사람, 공장 안에서 원료와 제품을 옮기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멘트 한 포대는 이미 이 긴 과정을 지나온 물건입니다.

    부족했던 시멘트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변화의 속도는 빨랐습니다.

    1962년 국내 시멘트 생산능력은 약 73만 톤이었고 실제 생산량은 약 51만 톤이었습니다.

    1971년에는 생산능력이 약 692만 톤, 실제 생산량이 약 687만 톤까지 늘어났습니다.

    10년도 되지 않는 사이 실제 생산량이 열 배를 훌쩍 넘게 증가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시멘트를 수입해야 했던 나라가 1971년에는 약 94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습니다.³⁾

    숫자만 보면 생산량이 늘어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보면 조금 다릅니다.

    새 공장이 생겼습니다.

    채석장이 커졌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제품을 옮길 철도와 화물차가 필요해졌습니다.

    시멘트를 저장하고 나누어 보내는 시설이 생겼습니다.

    건설현장에서는 더 많은 시멘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시멘트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그 앞뒤에 붙어 있는 일도 함께 커졌습니다.

    포대 하나에도 다른 산업이 들어 있었다

    예전 시멘트 하면 종이포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포대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종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시멘트를 담아도 쉽게 찢어지지 않는 포대가 필요했습니다.

    포대를 만들고 인쇄하고 접착하고 검사해야 했습니다.

    완성된 포대는 다시 시멘트공장으로 운반됐습니다.

    시멘트가 포대에 담기고 나면 창고로 갑니다.

    다시 화차나 화물차에 실립니다.

    도착지에서는 내려야 합니다.

    판매하는 사람이 있고 현장으로 배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포대의 무게를 사람이 직접 어깨에 지고 옮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설 규모가 커질수록 포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시멘트를 포대에 넣지 않고 대량으로 운반하는 벌크 방식이 확대됐습니다. 저장 사일로와 전용 운송장비가 필요해졌고, 소비지 가까이에는 분쇄·포장·레미콘 시설도 늘어났습니다.³⁾

    물건이 바뀌자 운반방법이 바뀌었습니다.

    운반방법이 바뀌자 다시 새로운 설비와 일이 생겼습니다.

    시멘트는 공장 밖으로 나가면서 더 많은 일을 만들었다

    공장에서 나온 시멘트는 그 자체로 완성된 건물이 아닙니다.

    물과 골재가 필요합니다.

    모래가 필요하고 자갈이 필요합니다.

    철근과 거푸집도 필요합니다.

    콘크리트를 만들고 운반하고 타설하고 다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로를 만드는 곳으로 갔습니다.

    다리를 만드는 곳으로 갔습니다.

    댐과 항만으로 갔습니다.

    공장과 학교를 짓는 데 들어갔습니다.

    집을 짓는 데도 들어갔습니다.

    1970년에 제작된 정부 기록영상에는 당시 시멘트가 댐, 항만, 제방, 터널, 철도침목, 교량, 고속도로, 고가도로, 지하도와 아파트 건설 등에 사용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²⁾

    여기서 시멘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시멘트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 하나가 다른 산업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시멘트공장 노동자의 일이 끝난 곳에서 건설노동자의 일이 시작됐습니다.

    광산과 제조업이 운송업을 만나고, 운송업이 건설업을 만났습니다.

    하나의 산업이 다른 산업을 불러냈습니다.

    회색 포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시멘트가 들어간 곳은 거대한 국가시설만이 아니었습니다.

    1970년 정부의 새마을가꾸기사업 추진 기록에는 전국 3만3267개 행정리동에 마을마다 시멘트 336포대를 지원하는 계획이 나옵니다.

    그 시멘트는 마을길을 넓히고, 작은 하천의 둑을 손보고, 공동우물과 공동빨래터를 만드는 데 사용됐습니다.

    이후 사업성과가 좋은 1만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했습니다.⁴⁾

    여기서는 평가보다 장면 하나가 중요합니다.

    시멘트가 공장에서 나와 기차와 화물차를 타고 어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포대를 내렸습니다.

    그 시멘트를 가지고 길을 고쳤습니다.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하수구를 손봤습니다.

    흙과 돌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기간산업을 세우던 재료가 어느 순간 평범한 사람이 사는 마을의 골목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시멘트가 바꾼 것은 건물의 크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바닥의 모습까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시멘트라고 모두 같은 시멘트는 아니었다

    건설이 늘어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디에나 똑같은 시멘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건축물에 필요한 성질과 거대한 댐에 필요한 성질은 달랐습니다.

    바닷물이나 황산염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도 달랐습니다.

    추운 날씨에 공사를 해야 하거나 짧은 시간 안에 초기 강도를 확보해야 하는 현장에서는 또 다른 성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포틀랜드 시멘트도 용도와 특성에 따라 보통, 중용열, 조강, 저열, 내황산염 등으로 나뉩니다.

    여기에서 시멘트산업은 단순히 많이 만드는 산업에서 필요한 성질을 만들어내는 산업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옥천의 당재터널은 이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재터널은 당시 경부고속도로 터널 가운데 가장 긴 난공사 구간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지』 자료에는 이 터널 공사에서 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⁵⁾

    약한 지반과 싸우며 공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런 현장에서는 콘크리트가 단순히 단단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시간 안에 강도를 내야 했습니다.

    당재터널 공사에서는 빠르게 초기 강도를 발현하는 조강시멘트가 사용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기업이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장이 시멘트에 새로운 성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시멘트는 더 이상 회색가루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요구되는 성능이 달라지는 기술제품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콘크리트가 굳는 시간까지 다루기 시작했다

    시멘트가 물과 만나면 반응이 시작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굳고 강도를 얻습니다.

    처음에는 단단하게 잘 굳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조물이 커질수록 문제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시멘트가 물을 만나면 단순히 젖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멘트 속 여러 성분이 물과 화학반응을 시작합니다. 이를 수화반응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서 시멘트 입자들이 서로 결합하고, 처음에는 부드럽던 콘크리트가 차츰 굳어 강도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화학반응에서는 열도 발생합니다. 이것이 수화열입니다. 작은 구조물에서는 발생한 열이 비교적 쉽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만, 댐이나 대형 기초, 두꺼운 교량 부재처럼 콘크리트의 부피가 커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열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콘크리트 내부의 온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과 밖이 똑같이 식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표면은 외부 공기와 접해 먼저 식는데 내부에는 열이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온도 차이로 콘크리트 안에 변형과 응력이 생기고, 조건에 따라 균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콘크리트를 다루는 기술자에게는 얼마나 강하게 만들 것인가만큼이나 얼마나 뜨거워지고, 언제 굳으며, 어떻게 식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타설한 부분이 너무 일찍 굳어버린 뒤 새로운 콘크리트가 이어지면 두 부분이 제대로 일체화되지 못하는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늦게 굳으면 다음 공정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현대의 콘크리트 기술은 강도만 설계하지 않습니다.

    혼화제와 혼화재, 배합과 타설순서 등을 이용해 응결과 경화의 진행도 관리합니다.

    국토교통 분야 건설기술 연구자료에서도 혼화재 사용량에 따라 초결과 종결시간이 달라지고, 필요에 따라 지연제나 촉진제를 사용해 응결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⁶⁾

    교량이나 거대한 구조물을 생각하면 이 기술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아침부터 콘크리트를 붓기 시작해 타설이 여러 시간 계속되는 구조물이라면 먼저 부은 콘크리트와 나중에 부은 콘크리트의 상태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현장 조건과 구조물의 특성에 따라 먼저 타설한 부분의 응결을 늦추고 뒤이어 들어오는 콘크리트와 일체성을 확보하도록 계획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콘크리트의 강도뿐 아니라 콘크리트의 시간까지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돌을 부수어 시멘트를 만들던 단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강해진 콘크리트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건물이 높아지자 콘크리트에는 다시 새로운 요구가 생겼습니다.

    더 큰 하중을 견뎌야 했습니다.

    기둥과 벽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더 큰 힘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강도 콘크리트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높였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한 콘크리트는 배합에 따라 점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높은 곳까지 펌프로 보내야 합니다.

    촘촘한 철근 사이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굳은 뒤에는 필요한 강도를 내야 합니다.

    화재와 장기간의 변형도 고려해야 합니다.

    롯데월드타워에는 80MPa급 고강도 콘크리트가 사용됐습니다.

    2015년에는 150MPa급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지상에서 309m 높이까지 수직 압송하는 시험에도 성공했습니다.

    관련 기술자료는 높은 점성 때문에 배관 막힘과 압송 지연 가능성이 있어 배합설계부터 제조와 펌프압송까지 함께 해결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⁷⁾

    여기서 우리는 아주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에 있던 석회석은 사람이 캐야 움직이는 돌이었습니다.

    그 돌을 부수고 구웠습니다.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물을 섞었습니다.

    콘크리트가 됐습니다.

    사람은 그 콘크리트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굳는 시간을 조절했습니다.

    흐르는 성질을 조절했습니다.

    마침내 수백 미터 위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돌이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시멘트 한 포대 뒤에는 몇 사람의 일이 있었을까

    여기까지 따라오면 처음의 질문이 다시 생깁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만드는 데 도대체 몇 사람의 일이 필요했을까요.

    석회석을 찾는 사람.

    돌을 캐는 사람.

    발파하는 사람.

    쇄석기를 움직이는 사람.

    가마를 관리하는 사람.

    기계를 정비하는 사람.

    전기를 관리하는 사람.

    품질을 시험하는 사람.

    포대를 만드는 사람.

    시멘트를 포장하는 사람.

    화차와 화물차로 운반하는 사람.

    창고와 사일로를 관리하는 사람.

    레미콘을 만드는 사람.

    펌프를 운전하는 사람.

    거푸집을 만드는 사람.

    철근을 조립하는 사람.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다지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

    재료를 연구하는 사람.

    강도를 시험하는 사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멘트공장의 기계를 만든 사람까지 따라가면 또 다른 산업이 나타납니다.

    가마 안을 견디는 내화재를 따라가도 새로운 산업이 나옵니다.

    시멘트 포대의 종이를 따라가면 제지산업이 나옵니다.

    화물차를 따라가면 자동차와 정비와 연료가 나옵니다.

    철도를 따라가면 또 다른 직업의 세계가 열립니다.

    건설현장 뒤를 따라가면 아파트와 학교와 공장과 도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까지 이어집니다.

    어디까지를 한 포대의 시멘트가 만든 일이라고 볼 것인가는 경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섣불리 숫자를 하나 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시멘트 한 포대는 혼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돌 하나를 따라가자 시대가 보였다

    처음에는 산에 묻힌 돌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돌의 쓸모를 알아냈습니다.

    돌을 캐는 일이 생겼습니다.

    공장이 생겼습니다.

    철도가 연결됐습니다.

    화물차가 달렸습니다.

    건설현장이 커졌습니다.

    마을길이 바뀌었습니다.

    집이 바뀌었습니다.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높아지면서 사람은 콘크리트의 강도와 흐름과 굳는 시간까지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길 아래에도 그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벽과 기둥에도 있습니다.

    다리를 건널 때도, 터널을 지날 때도 우리는 그것을 지나갑니다.

    너무 흔해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시멘트의 역사를 생산량 몇 톤으로만 읽으면 이 많은 사람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사람의 일을 따라가면 숫자 뒤에서 시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산에서 돌을 캐던 사람과 가마 앞에서 일하던 사람, 포대를 나르던 사람, 철근을 묶던 사람, 콘크리트를 붓던 사람, 배합을 연구하던 사람은 서로 다른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한 줄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돌 하나가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그 돌에서 가능성을 찾아내고, 캐고, 굽고, 갈고, 나르고, 시험하고, 부어 굳힌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일로 먹고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시멘트를 다시 들여다보는 까닭은 회색가루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만은 아닙니다.

    평범한 물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일을 만들고, 그 일이 다시 사람의 생활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끝까지 따라가면 그 뒤에 또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그 한 포대 뒤에는 과연 몇 사람의 일이 연결되어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각주

    1.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UNKRA의 업적」, 1957,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073;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콜터장군」, 1958,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154.
    2. 국립영화제작소, 「산업시리즈(시멘트 공업)」, 1970,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3511.
    3.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멘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대통령비서실, 「새마을가꾸기 사업추진 상황보고(2차)」, 1970.9.22.,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EA0007016;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물」.
    5. 한국도로공사,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지』, 1974, 국가기록원 소장자료 C11M24673; 국가기록원,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
    6. 국토교통 분야 건설기술 연구자료, 「친환경 콘크리트 기준 개정 보고서」, 2022, 건설기술정보시스템(CODIL).
    7. 롯데건설, 「국내 최초 150MPa 초고강도 콘크리트 수직압송 성공」, 2015.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