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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하지 않은 택배가 왔다

    주문하지 않은 택배가 왔다

    내가 주문한 것이 아닌데

    토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아내가 주방에 있어서 제가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문을 열자 택배 기사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택배 왔습니다.”

    상자를 받아 들었습니다.

    크지도 무겁지도 않았습니다.

    “당신 뭐 샀어?”

    주방을 향해 물었습니다.

    “아니요.”

    “택배 왔는데?”

    “당신 거 아니에요?”

    “내가 산 게 없는데.”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송장을 봤습니다.

    이름은 제 이름이었습니다.

    주소도 맞았습니다.

    전화번호 끝 네 자리도 제 번호였습니다.

    며칠 전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보다가 주문했나 싶었습니다.

    쇼핑몰 주문 내역을 열어봤습니다.

    없었습니다.

    카드 사용 내역도 확인했습니다.

    그쪽에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행주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왔습니다.

    “보낸 사람은요?”

    송장에는 처음 보는 업체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생활용품을 파는 곳 같았습니다.

    “모르는 데야.”

    “그럼 잘못 온 거 아니에요?”

    “내 이름으로 왔잖아.”

    아내도 송장을 들여다봤습니다.

    “주소도 맞네.”

    둘이 상자를 앞에 두고 잠깐 서 있었습니다.

    “일단 뜯어봐요.”

    “남의 물건이면?”

    “당신 이름으로 왔는데 무슨 남의 물건이에요.”

    가위를 가져왔습니다.

    테이프를 자르고 상자를 열었습니다.

    안에는 전기주전자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주전자네.”

    새 제품이었습니다.

    포장 비닐도 뜯지 않은 채였습니다.

    우리는 잠깐 서로 얼굴을 봤습니다.

    전기주전자라면 이미 있었습니다.

    싱크대 한쪽에 오래된 것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손잡이 아래쪽에 금이 가 검은 테이프를 감아놓기는 했지만 아직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새 주전자를 보다가 저를 봤습니다.

    “혹시 당신이 주문하고 잊어버린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저거 바꾸자고 몇 번 말했잖아요.”

    “당신이 말했지. 내가 산다고 했어?”

    “그건 아니고.”

    상자 안을 다시 살폈습니다.

    제품 밑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용설명서인 줄 알았습니다.

    꺼내 보니 손으로 쓴 메모였습니다.

    ‘그날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름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제 손에 든 메모를 읽었습니다.

    “누구예요?”

    “그러니까.”

    저도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날 커피 잘 마셨습니다.

    “최근에 누구한테 커피 타줬어요?”

    “글쎄.”

    “집에 온 사람 생각해봐요.”

    그제야 최근에 집에 왔던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봤습니다.

    많지는 않았습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도 밖에서 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휴대전화의 최근 통화 목록도 내려봤습니다.

    몇 사람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중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 혹시 나한테 뭐 보냈냐?”

    “뭘?”

    “주전자.”

    “아니. 갑자기 웬 주전자야?”

    “아니면 됐어.”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아니래요?”

    “응.”

    “사람들한테 하나씩 다 전화해볼 거예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우스웠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찾겠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주전자를 보냈느냐고 전화를 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놔둬요. 보낸 사람이 연락하겠죠.”

    상자는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었습니다.

    한번 궁금해지고 나니 지나갈 때마다 눈이 갔습니다.

    선물을 받았는데 고맙다고 할 사람을 모른다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아내가 상자에서 새 주전자를 꺼냈습니다.

    “이거 그냥 쓰면 안 돼요?”

    “잠깐 놔둬봐.”

    “왜요?”

    “누가 보낸 건지는 알아야지.”

    “알면 물이 더 잘 끓어요?”

    제가 쳐다보자 아내가 웃었습니다.

    “알았어요. 안 쓸게요.”

    새 주전자는 다시 상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커피 잘 마셨습니다

    저녁 무렵 커피를 마시려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낡은 주전자에 물을 받았습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검은 테이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몇 주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하나가 집에 왔었습니다.

    예전에는 자주 만났는데 요즘은 두어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면 많이 보는 편이었습니다.

    그날도 특별한 약속을 하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생각나서 들렀다고 했습니다.

    제가 커피를 끓였습니다.

    친구가 식탁에 앉아 있다가 주전자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형, 이거 아직도 써?”

    “왜?”

    “손잡이가 왜 이래?”

    “조금 깨졌어.”

    “조금 깨진 게 아니라 테이프까지 감았구먼.”

    “물 끓이는 데는 문제없어.”

    친구가 주전자를 들어 손잡이 쪽을 살펴봤습니다.

    “이러다 뜨거운 물 쏟으면 어쩌려고 그래.”

    “안 쏟아.”

    “하나 사. 얼마 한다고.”

    “네가 사주든가.”

    제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친구도 웃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바꾸자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친구가 바로 아내 편을 들었습니다.

    “형수님, 그냥 버리세요. 안 버리니까 계속 쓰는 겁니다.”

    “내 물건을 왜 마음대로 버려.”

    그때는 셋이 웃고 말았습니다.

    곧 다른 이야기가 시작됐고 주전자는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너 혹시 나한테 주전자 보냈냐?’

    곧바로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저녁 준비를 하던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문자 보냈어.”

    “뭐래요?”

    “아직.”

    잠시 뒤 문자 알림이 울렸습니다.

    친구였습니다.

    ‘갔어?’

    그 짧은 답을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네가 보낸 거야?”

    “갔으면 됐네.”

    “야, 이걸 왜 보냈어?”

    “형이 사달라며.”

    “내가 언제?”

    “기억도 안 나?”

    잠깐 생각하다가 웃음이 나왔습니다.

    “야, 그건 농담으로 한 말이지.”

    “나는 진담으로 들었는데?”

    “누가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주전자를 보내냐.”

    “커피 때문에 보낸 거 아니야.”

    “그럼?”

    “그날 형이 물 따르는데 손잡이가 흔들리더라.”

    저도 모르게 싱크대 쪽을 봤습니다.

    검은 테이프를 감아놓은 주전자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을 이었습니다.

    “형은 맨날 쓰니까 모르겠지만 나는 오랜만에 봤잖아. 저걸 아직도 쓰나 싶더라고.”

    “물은 잘 끓어.”

    “물이 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손잡이가 깨졌잖아.”

    “안 떨어져.”

    “떨어지고 나서 바꾸려고?”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예요?”

    제가 휴대전화를 잠깐 떼고 대답했습니다.

    “응. 맞아.”

    아내가 전화기 쪽으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잘하셨어요. 내가 그렇게 바꾸자고 해도 안 바꿔요.”

    친구가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거봐. 형수님도 내 편이잖아.”

    “둘이 아주 잘한다.”

    “형, 새것 써. 옛날 것은 버리고.”

    “알았어.”

    “알았다고만 하지 말고 진짜 버려.”

    “내가 알아서 해.”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상자를 열었습니다.

    새 주전자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잘됐네. 이제 저건 버리면 되겠네.”

    싱크대에 있던 낡은 주전자를 가리켰습니다.

    저도 그쪽을 봤습니다.

    “그래야겠지.”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새 주전자를 씻었습니다.

    물을 한 번 가득 받아 끓였다가 버리고 다시 헹궜습니다.

    낡은 주전자는 싱크대 구석으로 밀려났습니다.

    새것이 있는데도

    다음 날 아침 새 주전자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물을 받고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며칠 동안은 자연스럽게 새것을 썼습니다.

    낡은 주전자는 싱크대 구석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버리지도 않았고 다시 쓸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깬 채 주방으로 나왔습니다.

    주전자를 집어 물을 받고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식탁에 있던 아내가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그걸 왜 써요?”

    그제야 손에 잡은 것을 봤습니다.

    낡은 주전자였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그냥 집었네.”

    “새것이 바로 옆에 있는데?”

    “손에 먼저 잡혔어.”

    “그러니까 저걸 버려야 한다니까.”

    “나중에.”

    “언제요?”

    “못 쓰게 되면.”

    아내가 주전자 손잡이를 가리켰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못 쓰게 생겼어요.”

    “물은 잘 끓잖아.”

    말하고 나니 며칠 전 친구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습니다.

    아내는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물이 끓었습니다.

    컵에 물을 붓다가 손잡이를 한 번 더 단단히 잡았습니다.

    그날 오후 낡은 주전자를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언제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샀는지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선물한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언제 산 건지 기억나?”

    아내가 주전자를 봤습니다.

    “아니요.”

    “당신이 산 거 아니야?”

    “내가요?”

    “나는 산 기억이 없는데.”

    “나도 없어요.”

    “그럼 누가 샀지?”

    “둘 중 하나가 샀겠죠.”

    아내가 웃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친구가 물었습니다.

    “참, 주전자는 잘 써?”

    “응.”

    “옛날 것은 버렸고?”

    “아직.”

    친구가 웃었습니다.

    “설마 아직도 쓰는 건 아니지?”

    “가끔.”

    “형은 진짜 이상하다.”

    “뭐가.”

    “새것이 있는데 왜 깨진 걸 계속 써?”

    “멀쩡한 걸 왜 버려.”

    “또 멀쩡하대.”

    잠시 뒤 친구가 말했습니다.

    “근데 형, 그 주전자 진짜 오래됐다.”

    “그런가?”

    “내가 옛날에 형네 집 자주 들락거릴 때도 그걸로 커피 끓였잖아.”

    “그때도 저거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저도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친구가 우리 집에 자주 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아도 근처를 지나다가 들르곤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기도 했고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있었던 것 같네.”

    “그럼 더 오래됐네.”

    “그렇겠지.”

    “그러니까 버려.”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얘기가 왜 또 거기로 가.”

    친구도 웃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버린다

    주말에 그 친구가 근처에 볼일이 있다며 집에 들렀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더니 주방 쪽을 한번 봤습니다.

    새 주전자와 낡은 주전자가 여전히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친구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형.”

    “왜.”

    “설마 저거 아직도 쓰는 거야?”

    “가끔.”

    친구가 낡은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아봤습니다.

    들뜬 테이프를 손가락으로 눌렀습니다.

    “이거 봐. 더 벌어졌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친구가 주전자를 들어 올렸습니다.

    “안 되겠다. 오늘은 내가 버린다.”

    “놔.”

    제 입에서 바로 말이 나왔습니다.

    친구가 저를 봤습니다.

    “왜?”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놔.”

    “이유가 뭐야?”

    “내 물건이잖아.”

    친구는 잠깐 저를 보더니 주전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알았어. 형 마음대로 해.”

    제가 새 주전자에 물을 받았습니다.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습니다.

    “그래도 커피는 새것으로 끓여주네.”

    “손님이니까.”

    “새것으로 끓이면 맛이 좀 다른가?”

    “똑같아.”

    “내가 사준 거라 더 맛있을 텐데.”

    “네가 무슨 주전자 장인이냐.”

    친구가 웃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는 요즘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뻐근하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많이 걸으라는 말을 들었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하루 걸음 수를 보여줬습니다.

    저도 제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누가 더 많이 걷느냐를 비교하다가 지난주에는 어디를 걸었는지, 동네에 새로 생긴 산책길은 어떤지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주전자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두 시간쯤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테이프를 다시 떼었다

    며칠 뒤 아침이었습니다.

    낡은 주전자에 물을 받으려다가 손잡이의 테이프가 다시 들뜬 것을 봤습니다.

    끝부분이 손가락에 걸렸습니다.

    서랍을 열었습니다.

    검은 테이프를 꺼냈습니다.

    가위로 한 조각을 잘랐습니다.

    주전자를 식탁 위에 놓고 들뜬 부분을 눌러 한 바퀴 감았습니다.

    두 번째를 감으려다가 손을 멈췄습니다.

    아내가 주방을 지나가다가 저를 봤습니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아무 말 없이 방금 감은 테이프를 다시 떼었습니다.

    “버리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래야겠지.”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코드를 감았습니다.

    주전자를 들고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문 앞에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한번 봤습니다.

    손잡이에는 오래 붙어 있던 검은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내가 안에서 물었습니다.

    “뭐 해요?”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시간쯤 뒤 외출하려고 문을 열었습니다.

    주전자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우리 집 문 앞이 먼저 보였습니다.

    주전자는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신발을 벗었습니다.

    “주전자 없어졌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누가 치웠나 봐.”

    “그랬겠죠.”

    아내는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도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방에는 새 주전자 하나만 남았습니다.

    며칠 뒤 친구가 근처에 왔다며 전화를 했습니다.

    “형, 집이야?”

    “응.”

    “잠깐 들러도 돼?”

    “와.”

    십여 분 뒤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친구가 들어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커피 한 잔 줘.”

    “오자마자 커피부터 찾냐.”

    “그거 얻어먹으려고 주전자까지 사줬는데.”

    제가 웃으며 주방으로 갔습니다.

    새 주전자에 물을 받았습니다.

    친구가 주방 쪽을 보다가 말했습니다.

    “어?”

    “왜.”

    “옛날 거 없어졌네.”

    “버렸어.”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잘했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실 거지?”

    “그거 얻어먹으려고 왔다니까.”

    물이 끓었습니다.

    커피 두 잔을 만들어 식탁으로 가져갔습니다.

    친구가 한 모금 마시더니 저를 봤습니다.

    “형.”

    “왜.”

    “주전자는 좋아졌는데 커피 맛은 그대로네.”

    “그럼 마시지 마.”

    “공짜니까 마셔야지.”

    친구가 다시 컵을 들었습니다.

    한동안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친구가 빈 컵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잘 마셨어.”

    “다음에는 네가 사 와.”

    “뭘?”

    “커피.”

    “주전자까지 사줬으면 됐지.”

    친구가 웃으며 현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닫고 돌아오니 아내가 싱크대에 놓인 컵을 씻고 있었습니다.

    컵을 엎어놓고 새 주전자를 옆으로 조금 밀었습니다.

    “이제 이것도 제법 익숙해졌네.”

    “그러게.”

    다음 날 아침 주방으로 나왔습니다.

    주전자에 물을 받았습니다.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물이 끓는 동안 컵을 꺼내 커피를 담았습니다.

    잠시 뒤 스위치가 올라갔습니다.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부었습니다.

  • 우리,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까?

    우리,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까?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왔습니다.

    세 사람이었습니다.
    알고 지낸 햇수를 굳이 세어본 적은 없지만, 처음 만났던 때의 얼굴보다 지금의 얼굴이 더 익숙할 만큼 오래된 사이였습니다.
    예전에는 따로 날짜를 잡지 않아도 자주 마주쳤고, 일이 끝날 무렵 누군가 밥이나 먹자고 하면 별다른 약속 없이도 한자리에 앉았습니다.
    요즘은 한 사람이 먼저 연락하고, 세 사람의 사정을 맞추고, 한두 번 날짜를 바꾼 뒤에야 겨우 얼굴을 봅니다.

    그래도 막상 만나면 오래간만이라는 느낌은 금세 사라집니다.

    한 사람은 메뉴판을 오래 들여다보다 결국 늘 먹던 것을 골랐고, 다른 사람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꺼냈습니다.
    누가 먼저 그 일을 시작했느냐를 두고 기억이 달라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 했던 이야기였지만 아무도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이 나오고 한참이 지나도록 이야기가 이어졌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처음 주문할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해봐야 각자의 생활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식당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길 건너편 정류장으로 가야 했고, 한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남은 한 사람은 반대편 골목으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연락해.”

    늘 하던 인사였습니다.

    한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넜고 두 사람도 각자의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오늘 잘 만났으니 다음에 또 만나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까?

    오래 알았다는 것과 앞으로 많이 본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밥을 먹었고, 웃었고, 다음에 또 보자며 헤어졌습니다.
    사이가 멀어진 것도 아닙니다.
    전화번호도 그대로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많이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데 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오늘 못 보면 내일 볼 수 있었고 이번 주에 시간이 맞지 않으면 다음 주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집에 가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다시 얼굴을 볼 테니까요.

    그때는 한 번의 만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셀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먹은 밥이 몇 끼인지 모릅니다.
    일을 마치고 같이 걸었던 길도, 잠깐 앉아 이야기를 나눈 저녁도 몇 번인지 알지 못합니다.
    기억에 남지 않은 날이 훨씬 많습니다.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식사가 대부분이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사라진 오후도 많습니다.

    돌아보면 바로 그런 날들이 관계의 대부분을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사건 몇 개가 사람 사이를 오래 붙들어준 것이 아니라, 별일 없던 수많은 날에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다시 만나는 일이 쉬웠기 때문에 한 번의 만남에 의미를 붙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한 사람은 좀 멀리 이사를 갔고 다른 사람은 하루의 시간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마주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지만 이제는 만나기 위해 약속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계를 설명하는 말은 그대로였습니다.

    오래된 친구이고, 가까운 사람이고,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은 달력에 없다

    며칠 뒤 세 사람이 있는 대화방에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다음에는 ○○도 같이 보자.”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이름이 나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좋지.”

    “한번 보자.”

    두 사람이 곧바로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대화가 끝났습니다.

    누구도 날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약속을 잡아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한 달쯤 지나 연락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며칠 뒤 다른 일정을 확인하려고 달력을 펼쳤다가 그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이미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집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고, 그다음 주에는 먼저 잡힌 약속이 있었습니다.
    한 주를 더 넘기니 달력도 다음 달로 넘어갔습니다.

    분명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달력에는 ‘언제든’이라는 날이 없었습니다.

    날짜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나는 날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먼저 날짜를 정해야 했습니다.
    내가 되는 날과 상대가 되는 날이 같아야 했고, 세 사람이면 세 사람의 시간이 겹쳐야 했습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한 날까지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아야 했고, 그날이 오면 실제로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시간이 있다는 것과 만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한 해에는 열두 달이 있습니다.
    달력만 보면 아직 많은 날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날은 그 많은 날짜 가운데 드문드문 있을 뿐입니다.

    그날을 한번 넘기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음 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이 오면 또 그다음 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사람도 미룬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조금 불편한 사실도 보였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언제나 바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있었는데도 만나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일로 미룬 적도 있었고,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번 주에는 그냥 집에 있고 싶어 다음으로 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반가운 이름이 떠올랐지만 전화를 걸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렇게 미룬 적이 많았습니다.

    다음에 연락해도 이해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달 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오래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습니다.

    한동안 만나지 않아도 관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람 사이를 편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 믿음 덕분에 만남을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급한 일은 오늘 합니다.
    기한이 있는 일도 먼저 처리합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약속이라면 시간을 맞춥니다.

    오래된 사람에게는 다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못 보면 다음 주가 있고, 이번 달에 못 보면 다음 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복잡할 때 뒤로 밀리는 것은 오히려 오래된 사람일 때가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번을 미루어도 관계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관계는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만나지 않은 시간은 지나갑니다.

    자주 만나야 좋은 사이일까

    여기까지 생각하면 금세 한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자주 만나야 하고, 미루지 말아야 하며, 시간이 있을 때 얼굴을 봐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 사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도 충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면서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편한 사이가 있습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서로의 자리를 의심하지 않는 관계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주 만난다고 반드시 가까운 것도 아닙니다.

    매일 마주쳐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을 수 있고, 자주 식사를 하면서도 정해진 이야기만 주고받는 사이가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로 관계의 깊이를 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지를 생각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횟수를 늘리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를 얼마나 자주 만나야 좋은 관계가 되는지 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의 질문은 다른 곳을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쉽게 씁니다.

    오늘 못 보면 다음에 보면 되고, 이번 달에 안 되면 다음 달에 보면 됩니다.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이 있다는 것과 다음이 저절로 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연락하고 다른 사람이 답해야 합니다.
    날짜 하나가 정해져야 하고, 그날까지 각자의 생활을 지나온 사람들이 실제로 한곳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한 번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안 뒤부터 약속을 서둘러 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활은 여전히 생활대로 흘러갔습니다.

    다만 누군가 “다음에 보자”고 말할 때 그 말을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듣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삼십 년과 앞으로의 한 번

    오래된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지나온 시간부터 셉니다.

    십 년을 알았고, 이십 년을 함께 지냈고, 삼십 년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 햇수 안에는 수많은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서로 처음 어떤 일을 시작했는지도 기억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에서 밥을 먹었던 이야기를 하고,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두고 여전히 서로 기억이 맞다고 우깁니다.

    그 많은 기억 때문에 관계가 넉넉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함께한 시간이 많으니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삼십 년은 이미 생긴 시간입니다.

    앞으로의 한 번은 아직 없습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과거에는 수없이 많이 만났더라도 앞으로 한 번을 더 만나려면 다시 날짜를 정해야 합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헤어질 때 인사를 해야 비로소 새로운 한 번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남은 만남을 계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사람을 앞으로 열 번 보려면 십 년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람 사이가 너무 삭막해집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세고 싶지도 않습니다.

    몇 번 남았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처음 떠올랐던 질문에는 애초부터 숫자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질문이 남긴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래 알았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한 번까지 만들어놓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만나지 않은 날도 우리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만나지 않은 시간을 아깝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각자 살아야 할 하루가 있었습니다.

    일을 해야 했고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있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날도 있었으며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약속 하나 없이 보내는 오후가 좋았던 날도 있습니다.

    그 시간 역시 삶입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다고 잘못 보낸 하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달력을 보면서도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았습니다.
    대화방에 다시 날짜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생활은 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이라는 말은 전과 똑같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쌓여 있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실제로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으로 셀 수도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하루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만나지 않는다고 오늘을 잘못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남았습니다.

    한 번은 그냥 한 번이었다

    몇 달 뒤 세 사람은 다시 만났습니다.

    누가 먼저 연락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날짜를 맞추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 말한 날에는 한 사람이 안 됐고, 다음 날짜에는 다른 사람에게 일이 있었습니다.
    몇 번 메시지가 오간 끝에 토요일 점심으로 정했습니다.

    지난번과 다른 식당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조금 늦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이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습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우리도 방금 왔어.”

    사실 십 분쯤 기다렸습니다.

    자리에 앉자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의 뒤가 이어졌습니다.
    몇 달이 지나 있었지만 대화는 잠깐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음식을 먹다가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우리 지난번에 언제 봤지?”

    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사진을 찾아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됐어. 밥이나 먹어.”

    휴대전화를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도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올해 몇 번째 만남인지도 세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지 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밥을 먹었습니다.

    한 사람이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꺼냈습니다.

    “그 이야기 지난번에도 했어.”

    “내가 언제?”

    “했어.”

    “기억 안 나는데?”

    또 웃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만날지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그냥 한 번이었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고, 별것 아닌 일로 웃는 몇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한 번이 너무 흔해서 세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세지 않는 이유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셀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었으니까요.

    다음에 또 보자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만 우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처마 아래에 서서 비가 잦아들기를 잠깐 기다렸습니다.

    한 사람이 주차장까지 뛰어가 차를 가져오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이 됐다며 손을 저었습니다.
    역까지 멀지 않으니 그냥 가겠다고 했습니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결국 각자 가기로 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누군가 말했습니다.

    “다음에 또 보자.”

    예전과 똑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날짜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한 사람은 우산을 펴고 걸어갔고 다른 사람은 가방을 머리 위에 올렸습니다.
    몇 걸음 지나자 세 사람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습니다.

    몇 번 남았는지 세지 않았습니다.

    셀 수도 없었습니다.

    나도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한 사람이 불렀습니다.

    “야.”

    돌아보았습니다.

    “다음엔 네가 사.”

    웃음이 나왔습니다.

    “알았어.”

    그 사람이 손을 한번 들고 다시 걸어갔습니다.

    다음이 언제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 이제는 왜 만남이 예전 같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조금 허전했을까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 날이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날짜를 맞추고 장소를 정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습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무심코 고개가 그쪽으로 향합니다.

    잠시 뒤 익숙한 얼굴이 들어옵니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봅니다. 걸음걸이도 낯설지 않고,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드는 모습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대로입니다.

    “오랜만이다.”

    마주 앉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함께 알던 사람들의 소식을 나눕니다. 오래전 있었던 일을 한 사람이 꺼내자 다른 사람이 그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잊고 있던 이름 하나가 나오고, 그 이름을 따라 장소가 나오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 줄지어 따라 나옵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웃음이 터지고 시간은 금세 흘러갑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합니다. 늘 하던 인사입니다.

    분명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투지도 않았고 불편한 말이 오간 것도 아닙니다. 대화가 끊겨 어색하게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혼자 돌아오는 길에 작은 허전함이 남습니다. 반가웠고 즐거웠는데 예전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예전에는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도 이야기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이야기했습니다. 별것 아닌 일을 두고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오늘도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오늘의 이야기보다 지난 이야기가 더 많았습니다.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함께 지나온 시간을 만나고 온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지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을까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마주 앉으면 꺼낼 이야기가 많습니다. 처음 만났던 때를 알고 있고, 함께 무언가를 시작했던 때도 기억합니다. 일이 잘되던 시절도 보았고 뜻대로 풀리지 않던 때도 곁에서 보았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말이야.”

    그 한마디면 이야기가 절로 열립니다.

    오래 만난 남자들 사이에서는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 자리도 있습니다. 제대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느 부대에서 지냈는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갑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했고 그전에도 했습니다. 듣는 사람도 이미 결말을 압니다. 그런데도 또 웃습니다.

    함께 알고 있는 과거에는 이런 편안함이 있습니다. 새로 설명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앞부분을 꺼내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채웁니다. 같은 기억 속에 두 사람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에만 남아 있던 시간을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대화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젊은 날에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을 시작할지, 어디에 가볼지, 다음에는 무엇을 해볼지 이야기했습니다. 앞에 놓인 시간이 대화 속으로 자주 들어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뒤를 돌아볼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졌으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두 시간을 이야기하고 헤어진 뒤 대부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만 남았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집니다.

    나는 오늘 그 사람의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을까요.

    오래 안다는 말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누군가를 오래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좋아하는 음식도 알고 말버릇도 압니다. 무엇에 쉽게 웃는지 알고, 어떤 일을 불편해하는지도 압니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꽤 많은 말을 막힘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요. 십 년 전 그 사람을 보며 알게 된 것도 있고, 이십 년 전의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멈추어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오래 남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소리 없이 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좋아하던 것에 관심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을 쓰는 방법이 달라지고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지 그 순서도 바뀝니다. 그 변화는 대개 요란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조금씩 생깁니다.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 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새로 시작했는지, 무엇을 그만두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마음에 품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익숙한 사람부터 찾습니다. 기억 속의 그 사람입니다.

    “넌 원래 그랬잖아.”

    많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동시에 오래전에 알게 된 모습을 오늘까지 억지로 이어 붙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자기 삶을 살았습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를 많이 안다는 뜻이지, 오늘의 그 사람까지 다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익숙함이 오히려 지금 눈앞의 사람을 가리는 벽이 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마주 앉으면 자연스럽게 질문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쉬는 날에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묻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묻고, 상대가 말을 하면 귀 기울여 듣습니다. 아직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 안에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사람 앞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질문하기 전에 짐작하는 일이 먼저 앞섭니다.

    “넌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너라면 그렇게 했겠지.”

    그 짐작이 맞을 때도 많습니다. 오랜 관계가 주는 편안함은 이런 데서 생깁니다. 하지만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묻지 않게 되는 것도 늘어납니다. 상대가 말을 시작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미리 예상하기도 하고, 끝까지 듣기도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예전 모습과 이어 붙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방금 그가 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알던 사람을 혼자 듣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오래된 사이에서도 흔히 건네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냥 그렇지 뭐”, “나도 똑같아”라는 대답으로 넘어가고 곧바로 옛날이야기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질문의 무게를 조금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요즘 주로 뭐 하면서 시간 보내는데?”

    한 번 더 가만히 묻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뜻밖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동안 배우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아침마다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을 재미있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제야 조금 낯선 사람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까움이 깊어질수록 물을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 안다고 여겨 묻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모르고 지나간 시간이 길어졌을 뿐입니다.

    그 사람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며 ‘참 많이 달라졌네’ 하고 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방식이 전과 다른 것 같고 관심사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잘 통하던 이야기에 별 반응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은연중에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움직인 사람은 그 사람만이 아닙니다. 나 역시 내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던 이야기가 지금은 별것 아닐 수 있습니다. 한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작게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때는 지나쳤던 사소한 이야기에 오래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 같은 자리에 서 있다가 한 사람만 멀리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향으로 수많은 하루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지금의 만남을 기억 속의 만남과 비교합니다.

    “예전에는 말하지 않아도 다 통했는데.”

    “예전에는 만나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과거를 떠올릴 때 모든 날을 똑같이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유난히 많이 웃었던 날, 특별히 즐거웠던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별말 없이 헤어진 평범한 날들은 기억 속에서 흐려집니다. 그렇게 추려진 선명한 과거와 오늘의 담담한 한 끼를 나란히 놓으면, 오늘이 유독 심심하고 허전해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두 사람은 이제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듯, 그 사람도 자기 시간을 통과해 지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반드시 관계가 멀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흘러온 세월을 이제야 서로의 얼굴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함께한 시간이 오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래된 관계에는 함께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과 최근 삼 년 동안 몇 번 만나지 못했다면, 두 사람에게는 십 년의 인연과 함께 서로 모르는 삼 년의 공백이 놓여 있습니다.

    그동안 각자 다른 아침을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났고 다른 일로 속을 끓였습니다. 혼자 감당해야 했던 일이 있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보지 못했고, 그 사람 역시 내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나는 순간에는 그 빈 시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을 알아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전 자리로 금세 돌아간 듯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마지막으로 자주 만났던 시절에서 쉽게 시작하지만, 눈앞에는 그 뒤의 세월까지 살아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 간격은 옛날이야기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통했던 말에 설명이 필요해지기도 하고, 한때 함께 좋아했던 것에 상대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의 낯섦은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표시라기보다, 서로 보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함께한 시간이 두 사람의 지난 시절을 이어주었다면, 함께하지 않은 시간은 서로에게 새로 물어보아야 할 것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오래된 사람 앞에서 느끼는 낯섦은 벽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모습이 이 사람 안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만남에는 오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시 처음의 식탁으로 돌아가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지난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밀어낼 이유는 없습니다.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오래된 관계만이 주는 편안함도 분명합니다.

    그러다 지난 이야기가 잠시 숨을 고를 때, 가만히 물어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

    형식적인 인사로 흘려보내지 않고 진심으로 대답을 기다립니다.

    최근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새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무엇인지, 전과 달라진 하루가 어떤 모습인지 조금씩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낯선 이야기들이 식탁 위로 올라옵니다. 상대도 나에게 묻고, 나 역시 지나온 시간 속에서 달라진 내 모습을 꺼내놓습니다.

    이제 식탁에는 세 가지 시간이 함께 놓입니다.

    둘이 함께 지나온 시간, 서로 보지 못했던 시간, 그리고 지금 마주 앉아 보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중 마지막 것은 아직 지나간 추억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생겨나고 있는 현재입니다. 오늘 처음 들은 이야기는 다음번에 만났을 때 둘이 함께 아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래된 추억도 처음부터 추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날의 소박한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하루가 세월이 흐른 뒤 둘만 아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오래된 관계의 힘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만남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는 아쉬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처럼 막힘없이 이야기하고 싶고, 아무 설명 없이도 통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세월을 지나온 지금의 그 사람 앞에 앉는 일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함께한 과거가 있고, 서로 보지 못한 시간이 있으며, 오늘 새로 알게 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 셋이 함께 어우러질 때 오래된 만남은 단순히 옛날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처음 듣는 이야기가 생깁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깊은 모습을 지금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사이의 깊이는 다 알고 있어서 더 물을 것이 없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다시 물어볼 오늘이 남아 있는 데서 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번에도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넵니다. 늘 하던 말이지만 그 울림은 조금 다릅니다. 예전의 우리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새로 마주한 서로를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자는 뜻입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달라진 두 사람이 오늘의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