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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1963년 12월, 김포공항에 낯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오르면 한동안 돌아오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목적지는 서독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곳은 사무실도 공장도 아니었습니다.

    탄광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까지 가서 땅속으로 내려가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시절 한국에도 탄광은 많았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산에서는 날마다 석탄이 나왔습니다. 광부가 캔 석탄은 선탄장을 지나 화차에 실렸고, 도시의 연탄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연탄이 된 석탄은 다시 트럭과 손수레에 실려 골목을 지나 집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석탄의 길을 조금 더 멀리 따라가면 뜻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석탄이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석탄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건너다

    1963년 한국과 서독 사이에서 광부 파견이 시작됐습니다.

    첫 파견 광부들은 1963년 12월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후 1977년까지 수천 명의 한국인 광부가 독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¹⁾

    광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지원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임금과 비교하면 독일 광산에서 벌 수 있는 돈은 상당했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 앞으로의 기반을 마련할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¹⁾

    하지만 돈만 보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나라였습니다.

    말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일터가 탄광이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뒤에는 광산에서 사용하는 말과 작업 방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겨 지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탄광 일을 해본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하다가 지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출국할 때 광부 모집에 합격했다는 사실과 실제 막장에서 광부로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몸이 다시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시간도 견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독일까지의 거리는 비행기가 데려다주었지만, 낯선 일터에 자리를 잡는 일은 결국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땅 아래에서 시작된 하루

    탄광의 하루는 지상에서 시작됐지만 일의 대부분은 땅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작업복을 갖춰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지하 작업장까지 이동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석탄을 캐고, 작업을 마치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몸을 써야 했습니다. 먼지와 소음이 있었고 위험도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말보다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장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지 몸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이름과 사정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에게 돈을 보내야 했고 누군가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볼 것인지 생각하며 독일행을 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업복을 입고 갱도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해야 할 일이 같았습니다.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 나라 사이를 이어준 것은 거창한 말보다 먼저 일이었습니다.

    월급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받은 월급이 모두 독일에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남기고 일부를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보내기 위한 송금 관련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²⁾

    돈이 도착하는 곳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쪽에서는 돈을 벌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돈으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먼 나라의 땅속에서 일하는 사람과 한국의 한 가정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이 서독 차관의 직접적인 담보였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관련 자료와 연구에서 사실관계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져 왔으므로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 크게 만들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충분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독일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번 돈의 일부를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한 나라의 외화 획득이라는 숫자로 보면 경제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조금 달라집니다.

    독일에서 월급날을 기다리는 사람과 한국에서 송금을 기다리는 사람이 같은 돈으로 한 달의 생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탄광촌의 불이 밝았다

    그 사람들이 독일 광산에서 일하던 시기, 한국의 탄광도 한창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탄광에 사람이 몰리면 광부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 집이 필요했습니다. 밥을 먹을 식당이 생겼고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 늘면 학교가 필요했고 사람들이 오가면 버스와 택시도 움직였습니다.

    광산 주변에 생활이 만들어졌습니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갔습니다. 탄을 실은 차량이 움직였고 식당에서는 끼니를 준비했습니다. 장날이면 시장에 사람이 모였습니다. 월급날이 지나면 상점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광산에서 나온 돈은 광산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고 옷을 사고 아이들의 준비물을 샀습니다. 식당의 밥값이 되고 가게의 매출이 되었습니다.

    탄광은 석탄을 생산하는 장소였지만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움직이는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이 많을 때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방을 구하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이들이 자랐고 골목이 생겼습니다.

    검은 석탄이 산 아래에 하나의 동네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집 안의 변화가 산속까지 올라갔다

    그 풍경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도시의 집에서는 난방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연탄을 갈아야 따뜻해지던 방에 다른 난방 방식이 들어왔습니다. 석유와 가스 사용이 늘었고 연탄에 의존하던 생활도 서서히 줄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내 석탄산업은 이전과 다른 상황을 맞게 됩니다.³⁾

    처음에는 한 집의 작은 변화처럼 보였습니다.

    연탄을 덜 주문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쌓아두는 연탄의 양이 줄었습니다.

    골목을 오가던 연탄 배달도 예전만큼 바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나 같은 변화가 수많은 집에서 일어나면 그 끝은 탄광까지 닿습니다.

    연탄이 덜 팔리면 공장에서 필요한 석탄도 줄어듭니다. 운반해야 할 양이 줄고 광산에서 캐야 할 양도 달라집니다.

    집 안에서 사라지는 연탄 한 장과 산속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탄광에서 도시의 아궁이까지 이어졌던 길을 따라 변화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광산의 문이 닫히다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많은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에서 2,43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지만 1995년에는 27개 탄광, 570만 톤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폐광지원 대상이 된 탄광은 335개였고 지원을 받은 근로자는 3만 명을 넘었습니다.⁴⁾

    숫자만 보면 산업의 축소입니다.

    탄광 앞에서 보면 다른 장면이 됩니다.

    어제까지 들어가던 갱도에 더는 들어갈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입던 작업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익힌 일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광산 밖에도 있었습니다.

    광부가 줄면 식당의 손님이 줄었습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줄었습니다.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학교의 아이들도 줄었습니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 줄고 빈집이 생겼습니다.

    탄광 하나의 문이 닫힐 때 철문 하나만 닫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하루가 함께 달라졌습니다.

    떠나는 방향이 바뀌었다

    태백을 비롯한 탄광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인구 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때 석탄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오던 곳에서 이제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태백은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시기에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산업 합리화와 폐광이 이어지면서 빠른 인구 감소를 겪었습니다.⁵⁾

    광부 한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고 한 사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줄어든 가게 주인도 다른 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광산을 상대로 일하던 운송과 서비스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광산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제는 그 광산이 사라지면서 다른 곳의 일을 찾아 떠났습니다.

    산업이 사람을 불러들이던 힘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탄광촌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일자리는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일이 생기면 사람이 들어옵니다.

    사람이 들어오면 집과 가게가 생깁니다.

    학교와 시장과 교통이 그 뒤를 따릅니다.

    오랫동안 그 중심이던 일이 사라지면 주변의 생활도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탄광촌은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독일로 떠난 사람과 탄광촌을 떠난 사람

    1963년 독일로 떠난 광부와 수십 년 뒤 국내 탄광촌을 떠난 사람을 같은 사건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시기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파독 광부들이 떠나던 시기의 한국에서는 석탄 생산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폐광촌에서 사람들이 떠나던 때에는 국내 석탄산업이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장면을 멀리서 함께 바라보면 한 가지가 겹쳐 보입니다.

    사람은 일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일자리가 먼 나라에 있으면 국경을 건넜습니다.

    탄광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산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다시 다른 일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남은 사람도 있었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떠날 수 없어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산업이 바뀌는 순간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의 모양도 함께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일이 내일도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니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석탄 한 덩어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산속에서 검은 돌을 캐는 광부가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는 캐낸 석탄을 고르는 사람이 있었고 철도와 차량으로 그것을 나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석탄을 연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가게가 있었고 골목 끝 집까지 연탄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연탄을 갈던 손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니 석탄을 캐기 위해 독일까지 건너간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광산이 문을 닫아 새로운 일터를 찾아 탄광촌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석탄 자체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돌을 따라가면 한 시대에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했고 어디로 움직였는지가 보입니다.

    산업이 커진다는 말 뒤에는 출근할 곳을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업이 쇠퇴한다는 말 뒤에는 내일부터 어디에서 일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바뀌면 난방기구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캐던 일과 나르던 일, 연탄을 만들고 팔던 일이 함께 줄었습니다. 그 일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동네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1963년 겨울, 독일로 떠난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뒤에는 국내 탄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다른 한쪽은 사라지는 일자리 뒤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출발한 이유도, 도착한 곳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장면 사이에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할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일이 움직일 때 사람의 삶도 움직였습니다.

    석탄은 땅속에 있었지만, 석탄을 따라 움직인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각주

    1. 행정안전부·국가기록원 파독 광부 관련 기록. 1963년 12월 시작된 한국 광부의 서독 파견과 모집·출국 과정에 관한 기록. 독일 측 관련 기록에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7,936명이 파견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2. 국가기록원 소장 파독 근로자 관련 기록. 파독 광부의 임금과 국내 송금, 당시 송금 관련 자료.
    3. 국가기록원 및 석탄산업 관련 공공 기록. 1980년대 후반 이후 연탄 수요 감소와 국내 석탄산업 구조 변화에 관한 자료.
    4.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육성 및 석탄산업 합리화」.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생산량 2,430만 톤에서 1995년 27개 탄광·570만 톤으로 감소. 1989~1995년 폐광지원 대상 335개 탄광 및 3만 명 이상의 근로자 지원 기록.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탄광지역 관련 공공 기록.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태백 등 주요 탄광지역의 인구 감소와 지역사회 변화에 관한 자료.
  •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산 아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도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장이 먼저 들어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산 깊은 곳에 검은 돌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 돌을 캐기 시작하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들어오자 집이 늘었습니다. 밥을 파는 곳이 생겼고 물건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물자를 실은 차가 오갔고, 철길을 따라 석탄이 도시로 빠져나갔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여러 탄광촌에서 벌어진 변화였습니다.

    그 중심에 석탄이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연료가 필요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석탄 생산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1951년 국내 석탄 생산량은 약 16만 톤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뒤 생산시설이 복구되고 증산정책이 추진되면서 1955년에는 131만 톤, 1960년에는 535만 톤으로 늘었습니다. 1965년에는 1,025만 톤, 1975년에는 1,759만 톤에 이르렀습니다.1)

    숫자가 커지는 동안 나라의 사정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무너진 생산시설과 교통망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산업을 움직일 에너지가 필요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할 연료도 필요했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연료만 바라보기 어려운 형편에서 국내에서 캘 수 있는 석탄은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를 중점과제로 두었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경영합리화와 석탄 증산을 제시했습니다.2)

    하지만 생산량이라는 숫자만 보고 있으면 그 시대의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석탄은 저절로 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광부의 출근길은 땅속으로 이어졌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출근길은 땅 아래로 향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갱 입구를 통과했다고 일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작업장이 깊은 곳에 있으면 막장까지 이동해야 했습니다.

    석탄층까지 길을 만들고 갱도를 뚫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보를 세우고, 석탄을 떼어내고, 캐낸 것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기계와 전기설비를 다루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뒤에는 석탄과 함께 섞여 나온 돌과 불순물을 가려내는 일이 기다렸습니다.

    광부 한 사람이 곡괭이를 들고 석탄을 캐는 장면만으로 탄광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탄광의 하루는 낮에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갑방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을방은 오후 4시부터 자정, 병방은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일하는 3교대 생활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근무조는 일주일 단위로 바뀌었습니다.3)

    한 작업조가 갱 밖으로 나오면 다음 작업조가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저녁밥을 먹는 시간에 출근하는 광부가 있었고, 마을이 잠든 자정에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출근은 회사 문을 열고 책상에 앉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차를 타고 경사진 갱도를 따라 지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과정도 하루 일과의 일부였습니다.3)

    이렇게 보면 석탄 생산량 뒤에는 톤으로 표시되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밤과 낮을 바꾸어 일한 사람의 시간입니다.

    석탄을 골라내는 사람도 있었다

    막장에서 캐낸 것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석탄은 아니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돌과 불순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를 골라내고 상품으로 쓸 석탄을 가려내는 선탄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탄광의 일을 남성 광부의 모습으로만 기억하면 땅 위의 선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탄광 기록에는 갱외부의 직무를 선탄부·운반부·전기기계부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선탄부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4)

    석탄산업은 막장에서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땅속에서 캐는 사람과 땅 위에서 가려내는 사람, 설비를 움직이는 사람과 운반하는 사람이 차례로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앞의 일이 멈추면 뒤의 일도 멈췄습니다.

    한 덩어리의 석탄이 상품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석탄을 캐는 것만큼 나르는 일도 중요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다음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송입니다.

    아무리 많이 캐도 필요한 곳까지 보내지 못하면 석탄은 산 아래 쌓여 있을 뿐입니다.

    전쟁 뒤 석탄 증산과 함께 철도망 확충이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이 개통됐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철도 확충이 석탄 수송 여건을 크게 개선했으며, 특히 영암선이 오늘날 태백 일원의 석탄 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기록합니다.5)

    철길이 열리자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대량으로 다른 지역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탄광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철도에서 다시 시작됐습니다.

    석탄을 화차에 실어야 했습니다. 열차를 운행해야 했고 선로와 차량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도착지에서는 다시 석탄을 내려 다음 운송수단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생산과 운송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더 캐려면 더 많이 나를 길이 필요했고, 수송 여건이 좋아지면 탄광은 더 넓은 시장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검은 돌 하나가 철길을 필요로 했고, 철길은 다시 새로운 일을 불러왔습니다.

    정부도 석탄을 더 캐려고 했다

    석탄 증산은 탄광회사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도 제도와 정책을 통해 생산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대한석탄공사는 1950년 11월 1일 발족했습니다. 이후 1950년대에는 석탄 증산계획이 추진됐고, 1961년에는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에는 「광업개발 조성법」이 마련됐습니다. 인접 광구를 묶어 규모 있게 개발하기 위한 탄좌회사 설립도 이어졌습니다.6)

    석탄은 어느 한 탄광의 상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산업을 키우고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다뤄졌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전력과 석탄을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라는 이름으로 함께 다룬 것도 같은 흐름에 있었습니다.2)

    땅속에 묻혀 있던 검은 돌이 정부의 산업계획, 철도와 기업, 수많은 노동자의 일과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일자리가 생기자 사람이 모였다

    탄광이 커지면서 산골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누군가는 혼자 왔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이 늘어나면 탄광 밖에도 일이 생깁니다.

    사람은 먹어야 했습니다. 잠잘 집이 필요했습니다. 옷과 신발, 생활용품도 사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학교가 필요했고 몸이 아프면 의료시설과 약국을 찾았습니다.

    광부가 받은 월급은 광부의 주머니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는 돈이 되고 아이의 학용품 값이 됐습니다. 식당의 매출이 됐고 가게 주인의 수입이 됐습니다.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에게도 일이 돌아갔습니다.

    석탄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의 생계도 탄광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탄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속도는 마을이 준비되는 속도와 늘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따라 먼저 사람이 들어오고, 그 뒤에 생활에 필요한 공간과 장사가 따라붙었습니다. 탄광을 중심으로 생긴 지역을 볼 때 생산시설만 살펴서는 변화의 크기를 알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도구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먹고 쉬어야 했고, 다시 다음 교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습니다. 장을 볼 곳과 아이들이 다닐 곳, 몸을 씻고 생활을 이어갈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탄광은 두 겹의 일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석탄을 직접 캐고 고르고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도록 받쳐주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영역을 모두 석탄산업의 직접 고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식당 주인이나 상점 주인이 석탄회사 직원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탄광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거나 규모가 훨씬 작았을 장사와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석탄 한 덩어리가 몇 개의 직업을 만들었다’고 숫자를 만들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 고용과 주변 상권, 운송과 생활서비스를 어디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탄광의 고용이 갱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산업의 일자리는 광산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모이면 그들의 생활을 받치는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면 광부에서 선탄부로, 선탄장에서 철도로, 철도에서 탄광촌의 가게와 식당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검은 돌 하나가 사람의 이동과 생활의 자리까지 바꾸고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세 개의 시간이 흘렀다

    탄광촌의 하루는 탄광의 교대시간과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갑방 광부가 출근하는 아침에 병방 광부는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갑방과 을방이 엇갈렸고, 자정이 되면 병방이 다시 갱도로 향했습니다.3)

    누군가에게 아침인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퇴근 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한집에서도 생활시간이 달랐습니다. 낮에 자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은 소리를 줄여야 했고, 저녁 무렵 출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식사시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마친 광부에게는 몸에 묻은 탄가루를 씻는 일도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퇴근한 광부들이 목욕탕을 이용했던 모습도 전합니다.3)

    탄광촌을 단순히 ‘광산 옆에 생긴 마을’이라고 부르면 이런 시간이 빠집니다.

    탄광의 교대시간은 광부만의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잠과 식사, 상점과 식당의 손님이 움직이는 시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탄광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시절, 마을에는 서로 다른 하루가 겹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석탄의 값어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석탄산업이 계속 한 방향으로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생산이 빠르게 늘면서 석탄은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7)

    에너지의 중심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석탄의 역할이 곧바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은 수입 석유에 대한 부담을 키웠고 국내 석탄의 중요성을 다시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내 석탄 생산량은 1970년 1,239만 톤에서 1975년 1,759만 톤으로 늘었습니다.1)

    이 변화는 숫자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석탄 수요가 늘면 탄광이 바빠졌습니다. 생산이 늘면 운송량도 늘어났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이 들어오면 탄광촌의 생활도 커졌습니다.

    반대로 다른 에너지원이 석탄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 역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역의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연료를 선택하는가는 멀리 떨어진 산골의 일자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돌을 캐는 데는 대가도 따랐다

    석탄이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이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땅속의 일은 위험했습니다.

    갱도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고 발파와 운반 과정에서도 사고가 날 수 있었습니다. 탄가루와 암석 먼지가 가득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일한 광부에게 진폐증은 심각한 직업병이었습니다.

    산업이 성장했다는 말 뒤에는 그 산업을 몸으로 떠받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석탄 생산량이 몇백만 톤 늘었다는 통계와 한 사람이 막장으로 내려가는 장면은 같은 역사의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한쪽만 보아서는 그 시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그 에너지를 캐기 위해 땅속으로 내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 석탄을 골라낸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실어 나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돌아갈 집과 함께 살아갈 마을이 있었습니다.

    석탄산업의 역사는 이 모두를 함께 보아야 사람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는 몇 사람의 일이 들어 있었을까

    검은 석탄 한 덩어리를 손에 올려놓으면 그저 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돌이 땅속에 있을 때부터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갱도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갱도를 지키고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캐낸 것을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고 석탄과 돌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 밖에는 철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고 선로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밥을 파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 정확히 몇 사람의 일이 연결돼 있었다고 하나의 숫자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숫자를 억지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땅속에서 한 사람이 캐낸 석탄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졌습니다. 선탄장을 지나 철도에 실렸고, 다시 필요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받은 임금은 탄광촌의 생활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한 산업이 다른 산업과 생활을 만나면서 일의 사슬이 길어진 것입니다.

    석탄은 연료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일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월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게의 손님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검은 돌의 여행은 탄광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길을 타고 도시로 온 석탄은 다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잘게 부서진 석탄은 일정한 모양으로 찍혀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료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 장, 두 장씩 세어 샀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석탄은 이제 연탄이라는 이름으로 골목 안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연탄을 만드는 사람, 싣는 사람, 파는 사람, 그리고 집집마다 나르는 사람입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일의 길이 도시의 골목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석탄은 어떻게 연탄 한 장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한 장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리의 아궁이 앞까지 왔을까.


    각주

    1.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국내 석탄 생산량을 1951년 16만 톤, 1955년 131만 톤, 1960년 535만 톤, 1965년 1,025만 톤, 1970년 1,239만 톤, 1975년 1,759만 톤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2. 대한민국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주요 시책으로 ‘전력, 석탄 등 에너지공급원의 확보’를 제시하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개편·경영합리화와 석탄증산을 명시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와 방침」. 우리역사넷 원문 자료
    3.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탄광」의 탄광 생활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3교대 작업과 갱내 이동, 작업 후 생활 모습을 확인했다. 국가기록원 「탄광」
    4. 국가기록원의 탄광 관련 기록물에는 탄광의 직무를 사무·채광·전기·선탄·공작·노무·갱외·기계 등으로 구분하고, 갱외부의 선탄부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탄광 관련 기록물 상세내용. 국가기록원 기록물 상세내용
    5.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의 개통으로 석탄수송 여건이 크게 개선됐으며, 특히 영암선이 현재 태백시 일원의 석탄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6. 대한석탄공사는 대한석탄공사법에 따라 1950년 11월 1일 발족했다. 이후 1961년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 「광업개발 조성법」 등이 제정됐으며 인접 광구를 통합한 탄좌회사 설립도 추진됐다. 국가기록원,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7. 국가기록원 「석탄정책」은 석탄이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으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위치를 내주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