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마을길은 질척거렸습니다.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홈이 생겼고 낮은 곳에는 물이 고였습니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며칠 들면 이번에는 흙먼지가 일었습니다. 논밭으로 가는 사람도, 장에 가는 사람도,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그 길을 밟았습니다. 농산물이 밖으로 나가고 읍내에서 사 온 물건이 들어오는 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초, 그런 마을에 전에 없던 양의 시멘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970~1971년 정부는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추진하면서 전국 33,267개 마을에 각각 시멘트 336포를 공급했습니다. 마을 앞길을 넓히고 공동빨래터와 공동우물을 만드는 등의 공동사업에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후 사업성과가 우수하다고 평가된 1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이 추가로 지원됐습니다.1)
지금 보면 시멘트 336포가 대단한 숫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농촌마을에서 그 시멘트는 포대 안에 든 건축재료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흙으로 남아 있던 공간을 사람들이 직접 바꾸어볼 수 있는 재료가 마을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를 내려놓는다고 길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를 먼저 고칠지 정하고 바닥을 다진 뒤 모래와 자갈, 물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길에 펼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처럼 레미콘 차량이 와서 이미 배합된 콘크리트를 쏟아놓는 풍경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마을의 소규모 콘크리트 공사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콘크리트를 비비는 일이 흔했습니다.
넓은 철판을 놓고 그 위에 모래와 자갈, 시멘트를 펼친 뒤 물을 더했습니다. 사람들이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습니다. 손에 든 것은 흙을 깊이 파는 삽보다는 날이 납작하고 네모난 삽이었습니다.
콘크리트를 비비는 모습도 지금 생각하는 삽질과 조금 달랐습니다. 재료를 높이 퍼 올려 뒤집기보다는 마주 선 사람들이 재료 밑으로 삽을 밀어 넣어 서로의 앞으로 보냈습니다. 맞은편 사람이 다시 자기 앞의 재료를 상대편 쪽으로 밀어 보내면서 모래와 자갈, 시멘트와 물을 섞었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사람이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동안 따로 놀던 재료가 조금씩 한 덩어리의 콘크리트가 되어갔습니다.
공장에서 거대한 설비를 거쳐 만들어진 시멘트가 마을에 도착한 마지막 순간에는 사람의 손을 만났습니다.
거대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시멘트는 마지막에 사람의 삽을 만났습니다.
시멘트는 공장에서 만들었지만 길은 마을에서 만들었다
마을길 몇십 미터를 포장하는 데도 손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는 모래와 자갈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은 물을 날랐습니다. 땅을 파고 바닥을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판 위에서 콘크리트를 비비고, 그것을 옮겨 길에 펼치는 사람도 있어야 했습니다.
정부가 시멘트를 마을까지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대 속 회색가루를 실제 길로 바꾸는 일은 결국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초기 새마을가꾸기사업이 마을 앞길 확장, 공동빨래터와 공동우물 같은 공동사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완성된 시설 하나를 가져다 놓는 것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필요한 일을 정하고 노동을 보태야 하는 사업이 많았습니다.
시멘트 336포는 그래서 물건인 동시에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무엇을 먼저 고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구의 손으로 할 것인가.
길 하나가 바뀌자 하루가 달라졌다
마을 안길 포장이라는 말을 지금 읽으면 그저 토목공사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매일 흙길을 밟고 살던 사람에게 길의 변화는 하루의 변화였습니다.
비가 온 뒤 진창을 피해 걷던 발걸음이 달라졌고 수레와 자전거가 지나가는 길도 달라졌습니다. 농산물을 밖으로 내보내고 생활물자를 마을 안으로 들여오는 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을길은 더 큰 도로와 연결되었고 그 도로는 다시 읍내와 도시로 이어졌습니다.
시멘트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물질이었지만, 그 위에서는 사람과 물건이 이전보다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회색 시멘트가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만들어낸 변화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변화는 발밑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또 하나의 변화가 보였습니다.
지붕이었습니다.
1967년 이미 「농어촌 지붕개량 촉진법」이 제정되어 정부의 지붕개량 정책이 시작됐고, 새마을가꾸기사업에 지붕개량이 포함되면서 사업은 더욱 강하게 추진됐습니다. 1971년 대통령비서실이 작성한 「농가지붕 개량사업 년차별 지원계획」에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지원계획과 개량 동수, 이에 필요한 시멘트 소요량까지 담겨 있습니다. 초가지붕을 기와와 슬레이트, 함석 등으로 바꾸는 것이 당시 지붕개량의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2)
그래서 마을의 변화는 발밑과 머리 위에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흙길 옆에 콘크리트길이 생기는 동안 초가지붕 사이에는 새로운 재료를 얹은 지붕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마을 전체가 새 모습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한동안 같은 골목 안에 나란히 존재했습니다.
지붕개량에는 외관을 바꾸는 것 이상의 정책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초가지붕에 사용하던 볏짚을 가마니나 새끼 같은 고공품 생산과 농외소득, 연료 등 다른 용도로 돌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정책에서는 생활환경과 소득문제를 서로 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길이 달라지고 지붕이 달라졌으며 담장과 배수로, 공동시설도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당시 새마을운동을 설명하면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빠집니다.
마을만 고치는 운동은 아니었다
새마을운동이 바꾸려 했던 대상에는 사람의 생활태도와 의식도 들어 있었습니다.
1971년 새마을정신은 근면·자조·협동으로 규정됐고, 정부는 1972년부터 이를 본격적인 새마을운동으로 확대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역점과제를 생활환경개선·소득증대·의식개혁의 세 영역으로 구분합니다.3)
이 대목은 당시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길을 넓히고 지붕을 바꾸는 것으로 마을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남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해보며,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은 힘을 합쳐 해결하자는 생활태도까지 함께 강조했습니다.
1972년 작성된 새마을운동 관련 문서에도 근면·자조·협동과 함께 환경개선, 소득증대, 정신계발이 실천과제로 제시돼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단순한 농촌 토목사업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길을 고치는 일과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하나의 운동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도박도 마을이 고쳐야 할 문제였다
의식개혁이라는 말은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1970~1973년 새마을운동의 의식개혁 사업을 설명하면서 퇴폐풍조 일소, 협동분위기 조성, 근검절약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당시 농촌마을의 고질적인 병폐로 여겨졌던 도박을 근절하려는 움직임도 이 과정에 포함됐습니다.4)
그러니 도박 없는 마을이라는 말은 어느 한두 마을에서 우연히 등장한 별난 구호로만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활환경을 고치는 것과 함께 마을의 생활습관과 공동체 질서를 바꾸려는 흐름이 넓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범죄 없는 마을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1972년 대한뉴스 제867호에는 충북 단양군 매포면 어의곡에서 열린 ‘범죄없는 마을 육성 단합대회’가 등장합니다. 효부와 효자, 모범청년을 표창하고 경찰관들이 주민에게 영농기술을 교육하면서 새마을정신을 강조하는 모습까지 영상기록에 남아 있습니다.5)
훗날 별도의 제도로 발전한 ‘범죄없는 마을’과 1970년대 초의 이런 움직임을 같은 제도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마을에서 무엇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길만 깨끗하면 새마을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돈을 쓰고, 서로 어떻게 협력하며 살아갈 것인지까지 변화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운동은 환경개량운동인 동시에 생활개선운동이었고, 당시의 표현으로는 의식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시멘트와 정신이 함께 들어왔다
이제 처음의 시멘트 336포를 다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정부가 마을에 내려보낸 것은 시멘트였습니다. 하지만 시멘트를 받아든 마을에 요구된 것은 노동과 참여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 의논하고, 필요한 재료를 마련하고, 함께 몸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부는 사업실적을 평가해 성과가 좋은 마을에 추가 자재를 지원하는 방식도 사용했습니다. 16,600개 마을에 추가된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은 그런 차등지원 방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자발적인 주민 참여와 강한 국가 주도의 행정이 함께 있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으로 당시 모습을 설명하면 전체를 놓치게 됩니다.
주민들이 자기 마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면서 얻은 경험이 있었고, 동시에 국가가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가치와 생활방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강력한 정책적 추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의 풍경에는 시멘트 포대와 삽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을회의가 있었고 새마을지도자가 있었으며 교육과 표어가 있었습니다. 환경개선과 소득증대, 의식개혁이 따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진행됐습니다.
마을의 모양을 바꾸는 일과 사람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을 함께 시도했던 것입니다.
삽은 그 시대의 기계였다
다시 철판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장에서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에는 거대한 기계가 있었습니다. 석회석을 부수는 쇄석기가 있었고, 원료를 갈아주는 분쇄설비와 높은 온도로 원료를 구워내는 킬른이 있었습니다. 완성된 시멘트는 포대에 담겨 트럭과 철도를 타고 전국으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기계가 마을의 마지막 자리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을길의 작은 구간을 포장하고 배수로를 만들 때는 사람의 몸이 기계가 닿지 못한 자리를 채웠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사람들이 납작한 네모삽을 재료 밑으로 밀었습니다. 맞은편으로 보낸 재료가 다시 돌아왔고, 그 동작을 되풀이하는 동안 마른 재료에 물이 스며들어 콘크리트가 되었습니다.
허리를 펴면 잠깐이었고 다시 삽을 밀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노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마을 곳곳의 작은 공사를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습니다. 큰 장비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과 재료가 있는 자리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화를 거대한 공장과 고속도로만으로 기억하면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기계가 시멘트를 만들었다면, 마을에서는 사람이 그 시멘트를 생활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회색길 위로 다음 시대가 들어왔다
마을 안길이 단단해지면 그 위를 지나는 것도 달라졌습니다. 자전거와 수레가 다니던 길에 경운기가 들어오고, 조금씩 자동차도 마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농로가 정비되고 농업기반시설이 확충되면서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새마을운동 역시 초기의 생활환경개선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농로 개설과 농지정리, 협동영농과 소득증대사업으로 범위가 넓어졌고, 이후에는 농촌을 넘어 도시와 공장, 직장과 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됐습니다.
시멘트 한 포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 사람의 일과 생활로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길이 달라지면 이동이 달라지고, 이동이 달라지면 물건을 사고파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새로운 재료와 장비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만들고 운반하고 판매하고 고치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사람이 철판 위에서 삽으로 비비던 콘크리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믹서와 레미콘차, 콘크리트펌프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마을이 달라지는 동안 노동의 모습도 함께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이제 한국의 과거에만 남아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2026년 7월에도 피지와 파푸아뉴기니의 시범마을 지도자와 공무원 등 39명이 한국에서 9박 10일 동안 새마을교육을 받고 각 지역에 적용하기 위한 실행계획을 만들었습니다.6)
그들이 1970년대 한국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가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마다 경제수준과 문화, 행정제도와 공동체의 모습이 다르므로 당시 한국에서 사용한 방법이 다른 나라에서 똑같은 결과를 낸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경험을 배우려는 움직임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배우려는 것은 시멘트 336포를 나누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지역의 문제를 주민이 함께 찾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며, 외부의 지원과 주민의 참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지역개발의 경험에 더 가깝습니다.
한때 한국의 마을에서 길을 닦으며 사용했던 근면·자조·협동이라는 말이 반세기를 건너 다른 나라의 농촌개발 현장에서 다시 검토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은 남고 사람은 늙었다
옛 마을에 가면 처음 포장했던 콘크리트길을 그대로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위에 아스팔트가 다시 깔리고 길이 넓어졌으며 배수로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한때 근대화의 상징처럼 등장했던 슬레이트 지붕 역시 세월이 지나 철거되거나 다른 지붕재로 교체되었습니다.
풍경은 또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길 아래에는 이전의 길이 있습니다.
처음 시멘트가 마을에 들어왔던 날 포대를 뜯었던 사람이 있었고, 철판을 놓고 모래와 자갈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선 채 네모난 삽을 앞으로 밀었습니다. 맞은편으로 간 재료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콘크리트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길에 펼쳐 굳혔습니다.
그 위로 사람들이 걸었습니다. 수레와 자전거가 지나갔고 경운기와 자동차가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 학교에 갔으며 어른들은 논밭과 장터로 향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때 삽을 잡았던 사람들은 늙었지만, 그들이 만들었던 길은 다시 포장되고 넓어져 다음 시대의 길 속에 남았습니다.
회색 시멘트를 따라가다 사람을 만났다
처음에는 시멘트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캐낸 석회석이 어떻게 회색가루가 되었는지 살펴보았고, 그 한 포대를 만들고 운반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산업과 사람의 일이 연결되는지도 따라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포대가 마을에 도착한 뒤를 따라와 보니 시멘트보다 사람이 더 많이 보였습니다.
포대를 뜯고 모래와 자갈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삽을 밀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 길부터 고칠지 의논하고 함께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가 바꾸려 했던 것도 길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흙길을 고치고 지붕을 바꾸는 생활환경개선이 있었으며, 농가의 소득을 높이려는 사업이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도박과 퇴폐풍조를 없애고 근검절약과 협동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려는 의식개혁도 추진됐습니다.
근면·자조·협동은 그래서 길가에 붙어 있던 세 단어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마을의 모양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는 주민 스스로 움직인 힘이 있었고 국가의 강한 추진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다시 살펴볼 부분 역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길과 집만 고친 환경정비사업으로 새마을운동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것은 회색 시멘트였습니다.
그 시멘트를 길로 만든 것은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철판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네모난 삽을 밀던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콘크리트만 비비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길 위로 자전거가 지나가고 경운기가 들어왔으며 자동차가 들어왔습니다. 오래된 초가지붕 옆에는 새로운 지붕이 올라갔고, 마을 밖 세상과 이어지는 길은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사람에게도 달라질 것을 요구한 시대가 함께 지나갔습니다.
어떤 시대는 거대한 기계보다 몇 자루의 삽에서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철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앞으로 삽을 밀던 그 사람들이 만든 회색길 위로, 다음 시대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각주
-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이란」, 새마을운동 기록물. 1970~1971년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6포를 공급했으며, 사업성과가 우수한 1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 지원했다고 기록한다.
- 대통령비서실 경제제1비서관실, 「농가지붕 개량사업 년차별 지원계획」, 1971.12.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EA0005513. 1972~1976년 지붕개량 지원계획과 개량 동수에 따른 시멘트 소요량 등을 담고 있으며, 국가기록원 관련 해설에는 기와·슬레이트·함석 등의 지붕재가 제시되어 있다.
- 지방행정연수원, 「새마을운동(박정희 대통령 친필문서)」, 1972.4.26,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Z00000201.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제시하고 환경개선·소득증대·정신계발을 실천과제로 제시한다.
-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물―1970년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역점과제를 생활환경개선·소득증대·의식개혁으로 구분하며, 기반조성기의 의식개혁 내용으로 퇴폐풍조 일소, 협동분위기 조성, 근검절약 실천 및 도박 근절을 설명한다.
- 국정홍보처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867호 「이런일 저런일」, 1972.2.19. 충북 단양군 매포면 어의곡의 ‘범죄없는 마을 육성 단합대회’를 기록하고 있다.
- 새마을운동중앙회, 「2026 피지·파푸아뉴기니 초청 새마을교육 수료식 개최」, 2026.7.31. 양국 시범마을 지도자와 공무원 등 39명이 9박 10일간 교육을 받고 현지 적용을 위한 실행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