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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석탄을 따라간 사람들

    1963년 12월, 김포공항에 낯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오르면 한동안 돌아오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목적지는 서독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곳은 사무실도 공장도 아니었습니다.

    탄광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까지 가서 땅속으로 내려가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시절 한국에도 탄광은 많았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산에서는 날마다 석탄이 나왔습니다. 광부가 캔 석탄은 선탄장을 지나 화차에 실렸고, 도시의 연탄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연탄이 된 석탄은 다시 트럭과 손수레에 실려 골목을 지나 집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석탄의 길을 조금 더 멀리 따라가면 뜻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석탄이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석탄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건너다

    1963년 한국과 서독 사이에서 광부 파견이 시작됐습니다.

    첫 파견 광부들은 1963년 12월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후 1977년까지 수천 명의 한국인 광부가 독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¹⁾

    광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지원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임금과 비교하면 독일 광산에서 벌 수 있는 돈은 상당했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 앞으로의 기반을 마련할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¹⁾

    하지만 돈만 보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나라였습니다.

    말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일터가 탄광이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뒤에는 광산에서 사용하는 말과 작업 방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겨 지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탄광 일을 해본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하다가 지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출국할 때 광부 모집에 합격했다는 사실과 실제 막장에서 광부로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몸이 다시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시간도 견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독일까지의 거리는 비행기가 데려다주었지만, 낯선 일터에 자리를 잡는 일은 결국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땅 아래에서 시작된 하루

    탄광의 하루는 지상에서 시작됐지만 일의 대부분은 땅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작업복을 갖춰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지하 작업장까지 이동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석탄을 캐고, 작업을 마치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몸을 써야 했습니다. 먼지와 소음이 있었고 위험도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말보다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서야 하는지, 장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지 몸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이름과 사정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에게 돈을 보내야 했고 누군가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볼 것인지 생각하며 독일행을 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업복을 입고 갱도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해야 할 일이 같았습니다.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 나라 사이를 이어준 것은 거창한 말보다 먼저 일이었습니다.

    월급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받은 월급이 모두 독일에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남기고 일부를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보내기 위한 송금 관련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²⁾

    돈이 도착하는 곳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쪽에서는 돈을 벌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돈으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먼 나라의 땅속에서 일하는 사람과 한국의 한 가정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이 서독 차관의 직접적인 담보였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관련 자료와 연구에서 사실관계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져 왔으므로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 크게 만들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충분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독일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번 돈의 일부를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한 나라의 외화 획득이라는 숫자로 보면 경제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조금 달라집니다.

    독일에서 월급날을 기다리는 사람과 한국에서 송금을 기다리는 사람이 같은 돈으로 한 달의 생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탄광촌의 불이 밝았다

    그 사람들이 독일 광산에서 일하던 시기, 한국의 탄광도 한창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탄광에 사람이 몰리면 광부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 집이 필요했습니다. 밥을 먹을 식당이 생겼고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 늘면 학교가 필요했고 사람들이 오가면 버스와 택시도 움직였습니다.

    광산 주변에 생활이 만들어졌습니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갔습니다. 탄을 실은 차량이 움직였고 식당에서는 끼니를 준비했습니다. 장날이면 시장에 사람이 모였습니다. 월급날이 지나면 상점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광산에서 나온 돈은 광산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고 옷을 사고 아이들의 준비물을 샀습니다. 식당의 밥값이 되고 가게의 매출이 되었습니다.

    탄광은 석탄을 생산하는 장소였지만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생활을 움직이는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이 많을 때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방을 구하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이들이 자랐고 골목이 생겼습니다.

    검은 석탄이 산 아래에 하나의 동네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집 안의 변화가 산속까지 올라갔다

    그 풍경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도시의 집에서는 난방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연탄을 갈아야 따뜻해지던 방에 다른 난방 방식이 들어왔습니다. 석유와 가스 사용이 늘었고 연탄에 의존하던 생활도 서서히 줄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내 석탄산업은 이전과 다른 상황을 맞게 됩니다.³⁾

    처음에는 한 집의 작은 변화처럼 보였습니다.

    연탄을 덜 주문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쌓아두는 연탄의 양이 줄었습니다.

    골목을 오가던 연탄 배달도 예전만큼 바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나 같은 변화가 수많은 집에서 일어나면 그 끝은 탄광까지 닿습니다.

    연탄이 덜 팔리면 공장에서 필요한 석탄도 줄어듭니다. 운반해야 할 양이 줄고 광산에서 캐야 할 양도 달라집니다.

    집 안에서 사라지는 연탄 한 장과 산속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탄광에서 도시의 아궁이까지 이어졌던 길을 따라 변화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광산의 문이 닫히다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많은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에서 2,43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지만 1995년에는 27개 탄광, 570만 톤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폐광지원 대상이 된 탄광은 335개였고 지원을 받은 근로자는 3만 명을 넘었습니다.⁴⁾

    숫자만 보면 산업의 축소입니다.

    탄광 앞에서 보면 다른 장면이 됩니다.

    어제까지 들어가던 갱도에 더는 들어갈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입던 작업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익힌 일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광산 밖에도 있었습니다.

    광부가 줄면 식당의 손님이 줄었습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줄었습니다.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학교의 아이들도 줄었습니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 줄고 빈집이 생겼습니다.

    탄광 하나의 문이 닫힐 때 철문 하나만 닫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하루가 함께 달라졌습니다.

    떠나는 방향이 바뀌었다

    태백을 비롯한 탄광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인구 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때 석탄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오던 곳에서 이제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태백은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시기에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산업 합리화와 폐광이 이어지면서 빠른 인구 감소를 겪었습니다.⁵⁾

    광부 한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고 한 사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줄어든 가게 주인도 다른 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광산을 상대로 일하던 운송과 서비스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광산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제는 그 광산이 사라지면서 다른 곳의 일을 찾아 떠났습니다.

    산업이 사람을 불러들이던 힘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탄광촌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일자리는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일이 생기면 사람이 들어옵니다.

    사람이 들어오면 집과 가게가 생깁니다.

    학교와 시장과 교통이 그 뒤를 따릅니다.

    오랫동안 그 중심이던 일이 사라지면 주변의 생활도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탄광촌은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독일로 떠난 사람과 탄광촌을 떠난 사람

    1963년 독일로 떠난 광부와 수십 년 뒤 국내 탄광촌을 떠난 사람을 같은 사건으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시기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파독 광부들이 떠나던 시기의 한국에서는 석탄 생산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폐광촌에서 사람들이 떠나던 때에는 국내 석탄산업이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장면을 멀리서 함께 바라보면 한 가지가 겹쳐 보입니다.

    사람은 일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일자리가 먼 나라에 있으면 국경을 건넜습니다.

    탄광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산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다시 다른 일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남은 사람도 있었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떠날 수 없어 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산업이 바뀌는 순간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의 모양도 함께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일이 내일도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니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석탄 한 덩어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산속에서 검은 돌을 캐는 광부가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는 캐낸 석탄을 고르는 사람이 있었고 철도와 차량으로 그것을 나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석탄을 연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가게가 있었고 골목 끝 집까지 연탄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연탄을 갈던 손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니 석탄을 캐기 위해 독일까지 건너간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광산이 문을 닫아 새로운 일터를 찾아 탄광촌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석탄 자체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돌을 따라가면 한 시대에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했고 어디로 움직였는지가 보입니다.

    산업이 커진다는 말 뒤에는 출근할 곳을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업이 쇠퇴한다는 말 뒤에는 내일부터 어디에서 일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바뀌면 난방기구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캐던 일과 나르던 일, 연탄을 만들고 팔던 일이 함께 줄었습니다. 그 일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동네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1963년 겨울, 독일로 떠난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뒤에는 국내 탄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다른 한쪽은 사라지는 일자리 뒤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출발한 이유도, 도착한 곳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장면 사이에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할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일이 움직일 때 사람의 삶도 움직였습니다.

    석탄은 땅속에 있었지만, 석탄을 따라 움직인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각주

    1. 행정안전부·국가기록원 파독 광부 관련 기록. 1963년 12월 시작된 한국 광부의 서독 파견과 모집·출국 과정에 관한 기록. 독일 측 관련 기록에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7,936명이 파견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2. 국가기록원 소장 파독 근로자 관련 기록. 파독 광부의 임금과 국내 송금, 당시 송금 관련 자료.
    3. 국가기록원 및 석탄산업 관련 공공 기록. 1980년대 후반 이후 연탄 수요 감소와 국내 석탄산업 구조 변화에 관한 자료.
    4.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육성 및 석탄산업 합리화」. 1988년 전국 347개 탄광·생산량 2,430만 톤에서 1995년 27개 탄광·570만 톤으로 감소. 1989~1995년 폐광지원 대상 335개 탄광 및 3만 명 이상의 근로자 지원 기록.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탄광지역 관련 공공 기록.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태백 등 주요 탄광지역의 인구 감소와 지역사회 변화에 관한 자료.
  • 석탄은 어떻게 연탄이 되어 집으로 들어왔나

    석탄은 어떻게 연탄이 되어 집으로 들어왔나

    깊은 어둠 속 막장에서 땀방울과 함께 캐낸 검은 석탄은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도심의 연탄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잘게 부서진 탄가루는 거친 기계의 압력을 견뎌내며 스물두 개의 숨구멍을 품은 단단한 연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삼륜차에 실려 좁은 골목을 누비고, 리어카에 실리거나 배달부의 굽은 등과 낡은 지게에 얹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 끝에 마침내 우리 집 마당 한구석, 보일러실에 닿았습니다.

    검은 먼지를 털어내며 차곡차곡 쌓인 연탄은 찬 바람 부는 계절마다 아랫목을 설레게 덥히며 가장 소박하고도 뜨거운 겨울의 온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석탄가루가 연탄 한 장이 되기까지

    연탄의 주원료는 무연탄이었습니다.

    공장으로 들어온 원료탄은 그대로 성형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탄을 만들기에 알맞은 상태로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크기가 큰 것은 부수고 원료의 상태를 고르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연탄 제조에서는 석탄가루에 점결제와 수분을 더해 성형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 생산된 무연탄은 점결성이 좋아 별도의 점결제를 섞지 않고 구멍탄을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¹⁾

    준비된 탄가루가 성형기로 들어갔습니다.

    초기에는 사람의 힘으로 연탄을 찍는 수동식 기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석탄박물관에는 19개의 구멍을 가진 연탄을 만들던 수동식 19공탄 제조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후 연탄 소비가 늘면서 한 번에 한 장을 찍는 단탄윤전기에서 두 장을 찍는 쌍탄윤전기, 세 장을 찍어내는 윤전기로 제조설비도 발전했습니다.²⁾

    연탄이 압축될 때 원통 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그 구멍은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탄이 타려면 공기가 지나갈 길이 필요했습니다.

    아래쪽에서 들어온 공기가 구멍을 통과하면서 연소를 도왔습니다. 구멍의 수는 화력과 연소시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³⁾

    성형을 마친 연탄은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다뤄야 했습니다.

    처음 찍어냈을 때 수분을 품고 있던 연탄은 마르면서 무게도 줄었습니다. 당시 일반 가정용 연탄은 처음 성형했을 때 약 3.6킬로그램이었고, 건조된 뒤에는 3.3킬로그램 이상이 기준이었습니다.¹⁾

    그렇게 단단해진 연탄이 공장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석탄가루였던 것이 이제 사람이 들고 나르고 아궁이에 넣을 수 있는 연료 한 장이 된 것입니다.

    19공탄에서 22공탄으로

    연탄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억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시기에 따라 여러 규격이 사용됐습니다.

    구멍 수에 따라 19공탄·31공탄 같은 이름이 사용됐고, 가정에서는 훗날 22개의 구멍을 가진 연탄이 널리 쓰였습니다.¹⁾

    1950년대 중반 시중에 가정용 연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에는 19공탄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지역과 생산업체에 따라 다른 구멍 수의 제품도 만들어졌습니다.⁴⁾

    1970년대에는 가정용으로 19·23·31공탄, 업소용으로 41·42·49공탄 등이 사용됐습니다. 이후 규격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 1978년에는 22공탄으로 통일됐고, 다시 22공탄과 25공탄으로 나뉘었습니다.³⁾

    예전 사람들이 흔히 ‘구공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구멍이 아홉 개인 연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구멍탄’이 변한 말로 연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사용됐습니다.³⁾

    연탄의 규격이 중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타고 있는 연탄 위에 새 연탄을 올려 불을 이어가려면 위아래 연탄의 구멍이 맞아야 했습니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라면 새 연탄을 올려놓고 집게로 살짝 돌리던 손의 움직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구멍이 맞으면 아래쪽의 열과 공기가 새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장에서 똑같은 규격으로 연탄을 찍어내는 일이 결국 한 집의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연탄 한 장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가정에서 사용하던 일반 연탄은 지름 약 15센티미터, 높이 약 14.2센티미터였고 처음 찍어냈을 때 무게는 약 3.6킬로그램이었습니다.¹⁾

    한 장만 놓고 보면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장이면 7킬로그램이 넘습니다.

    열 장이면 36킬로그램입니다.

    백 장이면 360킬로그램입니다.

    몇백 장을 한꺼번에 들여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공장에서 연탄을 찍어내는 것으로 일이 끝날 수 없었습니다.

    연탄을 옮겨야 했습니다.

    차량에 실어야 했습니다.

    판매점으로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집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일의 사슬이 공장 밖에서도 계속됐습니다.

    공장에서 골목까지 사람이 옮겼다

    공장에서 나온 연탄은 소비지로 향했습니다.

    도시 곳곳에는 연탄공장과 연탄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많은 양을 차량으로 옮길 수는 있었지만 자동차가 모든 집의 문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좁은 골목이 있었고, 비탈길에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집도 있었습니다.

    차가 멈춘 곳에서부터는 다시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연탄을 내렸습니다.

    지게나 리어카에 실었습니다.

    집 안의 연탄을 쌓아두는 곳까지 날랐습니다.

    겨울철 주문이 몰리면 이 일은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탄광에서는 광부가 석탄을 캐냈습니다.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연탄을 만들었습니다.

    도로에서는 운전기사가 실어 날랐습니다.

    골목에서는 배달하는 사람이 다시 연탄을 날랐습니다.

    산속에서 시작한 일이 도시의 좁은 골목까지 이어졌습니다.

    새끼줄에 두 장씩 꿰어 들었다

    모든 집이 몇백 장씩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 조금씩 사다 쓰는 집도 있었습니다.

    연탄가게가 가까우면 직접 사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새끼줄이 등장했습니다.

    연탄 구멍에 새끼줄을 꿰어 두 장씩 묶었습니다.

    그것을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당시 골목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습니다. 인천의 생활사를 다룬 기록에도 새끼줄에 두 장의 연탄을 매달아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⁵⁾

    양손에 두 장씩이면 네 장입니다.

    3.6킬로그램을 기준으로 하면 14킬로그램이 넘습니다.

    평지에서 잠깐 드는 것과 언덕길을 걸어 집까지 가져가는 것은 달랐습니다.

    손에는 새끼줄이 걸렸습니다.

    옷에는 검은 탄가루가 묻었습니다.

    그래도 들고 갔습니다.

    그날 밤 방을 덥힐 연료였기 때문입니다.

    연탄 몇 장을 들고 골목을 걷는 모습에는 당시의 살림살이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연탄을 채우고 김장을 하면 겨울 준비가 끝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연탄을 사용하는 집에서는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겨울 동안 사용할 연탄을 들여놓았습니다.

    트럭에서 연탄이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한 장씩 옮겼습니다.

    마당 한쪽이나 창고, 처마 아래처럼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아래부터 줄을 맞췄습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살피며 한 단씩 높였습니다.

    검은 연탄이 벽처럼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김장을 했습니다.

    배추를 절였습니다.

    양념을 만들고 버무렸습니다.

    겨우내 밥상에 올릴 김치를 마련했습니다.

    집집마다 형편도 달랐고 준비하는 양도 달랐습니다.

    그래도 연탄을 채워놓고 김장까지 해놓으면 이제 겨울 준비는 다 했다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는 집을 따뜻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겨울 밥상을 지킬 것이었습니다.

    연탄이 든든하게 쌓이고 김장까지 끝나면 긴 겨울을 맞을 채비가 갖춰졌습니다.

    지금은 난방을 준비한다고 몇 달 치 연료를 집 안에 쌓아놓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겨울을 얼마나 준비했는지가 눈에 보였습니다.

    쌓인 연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겨울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연탄더미는 단순한 연료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한 집이 겨울을 건너기 위해 마련해놓은 준비였습니다.

    연탄은 불을 붙이는 것부터 일이었다

    연탄을 집에 쌓아놓았다고 바로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탄은 성냥불 하나를 갖다 댄다고 금세 활활 타오르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고체연료인 데다 처음 불이 붙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잘 마르지 않은 연탄은 불을 붙이기가 더 어려웠습니다.¹⁾

    그러니 처음 불을 살리는 데에도 수고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불이 살아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타고 있는 연탄 위에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연탄집게로 새 연탄을 조금씩 돌려 아래 연탄과 구멍을 맞췄습니다.

    공기가 통하면서 아래 연탄의 열이 위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 연탄도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다음 연탄을 갈아야 했습니다.

    아침에 살폈습니다.

    저녁에도 살폈습니다.

    잠들기 전에도 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는 집이 있었습니다.

    연탄은 값만 치르고 사오면 끝나는 연료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손과 시간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불이 꺼지면 이웃집 연탄을 빌려왔다

    아무리 살펴도 불을 꺼뜨리는 날은 있었습니다.

    갈아야 할 시간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궁이가 싸늘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처음부터 다시 불을 붙이는 방법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웃집에 가서 불이 붙어 있는 연탄 한 장을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벌겋게 살아 있는 연탄을 받아와 자기 집 아궁이에 넣었습니다.

    그 위에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옆집에서 건너온 불이 자기 집 연탄으로 이어졌습니다.

    연탄을 꾸기도 했고 불붙은 연탄을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연탄만 꾸는 것이 아니라 불까지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집의 불이 꺼졌을 때 옆집의 불이 다시 그 집의 방을 데웠습니다.

    같은 골목의 집들이 비슷한 연료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웃은 담장 너머에 사는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급할 때 연탄 한 장을 꾸러 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꺼진 불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불붙은 연탄 한 장을 빌릴 수 있는 집이기도 했습니다.

    연탄이 부족하면 겨울이 불안해졌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연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추워질수록 수요가 몰렸습니다.

    공장에서 많이 생산하더라도 운송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필요한 때에 연탄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1966년에는 가격통제와 공급 부족 등이 겹치면서 연탄 부족이 심해졌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한두 장이라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⁶⁾

    연탄이 떨어진다는 것은 생활이 불편해지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난방이 멈췄습니다.

    취사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연탄이 넉넉히 쌓여 있으면 당분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연탄더미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다시 가게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검은 연탄 한 장이 한겨울에는 생활의 시간을 움직였습니다.

    연탄 한 장은 혼자 집까지 오지 않았다

    연탄을 떠올리면 먼저 검은 원통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한 장을 거꾸로 따라가 보면 사람이 보입니다.

    탄광에서 무연탄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료를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탄가루를 준비하고 성형기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찍혀 나온 연탄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을 차량에 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탄가게에서 주문을 받고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에서는 다시 사람이 연탄을 날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그것을 받아 쌓는 집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온 연탄에는 다시 사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불을 붙였습니다.

    때를 맞춰 새 연탄을 올렸습니다.

    구멍을 맞췄습니다.

    재를 치웠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살폈습니다.

    불이 꺼지면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탄광에서 캐낸 검은 돌 하나가 공장을 거쳐 연탄이 되고, 연탄가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와 한 집의 불이 되기까지 수많은 손이 이어졌습니다.

    산업은 공장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집 안으로 들어와 생활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연탄이 쌓여 있었습니다.

    김장은 끝났습니다.

    아궁이에는 연탄불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긴 겨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면 이웃집의 불 한 장이 담장을 넘어왔습니다.

    석탄의 이야기는 그렇게 산업의 이야기에서 사람의 생활 이야기로 들어왔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그 집 안에서 이어집니다.

    연탄 한 장으로 겨울을 나던 시절.

    연탄을 갈고, 꾸어 쓰고, 재를 내다 버리며 하루의 시간을 연탄불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각주

    1.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탄의 원료와 성형 특성, 일반 가정용 연탄의 무게와 규격, 연탄의 착화가 쉽지 않았던 특성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인 연탄 제조에는 점결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내 무연탄은 점결성이 좋아 별도의 점결제를 넣지 않고 구멍탄을 성형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2. 보령석탄박물관, 「석탄의 채굴이용관」. 19공탄을 만들던 수동식 제조기와 연탄 수요 증가에 따라 한 장씩 찍는 단탄윤전기, 두 장씩 찍는 쌍탄윤전기, 세 장씩 생산하는 윤전기로 제조설비가 변화한 과정을 전시·설명하고 있다.

    3. 국립민속박물관, 「그 겨울 우리가 의지했던 연탄」. 연탄의 구멍이 공기 순환과 연소시간에 영향을 주며, 1970년대 가정용 19·23·31공탄과 업소용 41·42·49공탄 등이 사용된 뒤 1978년 22공탄으로 통일되고 이후 다시 22공탄과 25공탄으로 나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4.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연탄」.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이 가정용 난방연료로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1955년 생산된 19공탄이 주를 이루었고, 지역에 따라 구멍 수가 다른 연탄도 생산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5. 인천광역시, 『굿모닝인천』,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혹시 연탄」. 당시 생활 풍경 가운데 새끼줄에 연탄 두 장을 매달아 직접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6.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탄파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5년 이후 수요 증가와 가격 문제, 1966년의 심각한 공급 부족을 설명하며, 겨울을 앞두고 시민들이 한두 장의 연탄이라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석탄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되었을까

    산 아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도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장이 먼저 들어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산 깊은 곳에 검은 돌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 돌을 캐기 시작하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들어오자 집이 늘었습니다. 밥을 파는 곳이 생겼고 물건을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물자를 실은 차가 오갔고, 철길을 따라 석탄이 도시로 빠져나갔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여러 탄광촌에서 벌어진 변화였습니다.

    그 중심에 석탄이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연료가 필요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석탄 생산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1951년 국내 석탄 생산량은 약 16만 톤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뒤 생산시설이 복구되고 증산정책이 추진되면서 1955년에는 131만 톤, 1960년에는 535만 톤으로 늘었습니다. 1965년에는 1,025만 톤, 1975년에는 1,759만 톤에 이르렀습니다.1)

    숫자가 커지는 동안 나라의 사정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전쟁 뒤에는 무너진 생산시설과 교통망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산업을 움직일 에너지가 필요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할 연료도 필요했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연료만 바라보기 어려운 형편에서 국내에서 캘 수 있는 석탄은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를 중점과제로 두었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경영합리화와 석탄 증산을 제시했습니다.2)

    하지만 생산량이라는 숫자만 보고 있으면 그 시대의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석탄은 저절로 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광부의 출근길은 땅속으로 이어졌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출근길은 땅 아래로 향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챙긴 뒤 갱도로 들어갔습니다. 갱 입구를 통과했다고 일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작업장이 깊은 곳에 있으면 막장까지 이동해야 했습니다.

    석탄층까지 길을 만들고 갱도를 뚫고, 무너지지 않도록 지보를 세우고, 석탄을 떼어내고, 캐낸 것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기계와 전기설비를 다루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뒤에는 석탄과 함께 섞여 나온 돌과 불순물을 가려내는 일이 기다렸습니다.

    광부 한 사람이 곡괭이를 들고 석탄을 캐는 장면만으로 탄광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탄광의 하루는 낮에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갑방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을방은 오후 4시부터 자정, 병방은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일하는 3교대 생활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근무조는 일주일 단위로 바뀌었습니다.3)

    한 작업조가 갱 밖으로 나오면 다음 작업조가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저녁밥을 먹는 시간에 출근하는 광부가 있었고, 마을이 잠든 자정에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출근은 회사 문을 열고 책상에 앉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차를 타고 경사진 갱도를 따라 지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과정도 하루 일과의 일부였습니다.3)

    이렇게 보면 석탄 생산량 뒤에는 톤으로 표시되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밤과 낮을 바꾸어 일한 사람의 시간입니다.

    석탄을 골라내는 사람도 있었다

    막장에서 캐낸 것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석탄은 아니었습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돌과 불순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를 골라내고 상품으로 쓸 석탄을 가려내는 선탄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탄광의 일을 남성 광부의 모습으로만 기억하면 땅 위의 선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탄광 기록에는 갱외부의 직무를 선탄부·운반부·전기기계부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선탄부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4)

    석탄산업은 막장에서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땅속에서 캐는 사람과 땅 위에서 가려내는 사람, 설비를 움직이는 사람과 운반하는 사람이 차례로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앞의 일이 멈추면 뒤의 일도 멈췄습니다.

    한 덩어리의 석탄이 상품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석탄을 캐는 것만큼 나르는 일도 중요했다

    땅 밖으로 나온 석탄에는 다음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송입니다.

    아무리 많이 캐도 필요한 곳까지 보내지 못하면 석탄은 산 아래 쌓여 있을 뿐입니다.

    전쟁 뒤 석탄 증산과 함께 철도망 확충이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이 개통됐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철도 확충이 석탄 수송 여건을 크게 개선했으며, 특히 영암선이 오늘날 태백 일원의 석탄 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기록합니다.5)

    철길이 열리자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대량으로 다른 지역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탄광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철도에서 다시 시작됐습니다.

    석탄을 화차에 실어야 했습니다. 열차를 운행해야 했고 선로와 차량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도착지에서는 다시 석탄을 내려 다음 운송수단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생산과 운송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석탄을 더 캐려면 더 많이 나를 길이 필요했고, 수송 여건이 좋아지면 탄광은 더 넓은 시장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검은 돌 하나가 철길을 필요로 했고, 철길은 다시 새로운 일을 불러왔습니다.

    정부도 석탄을 더 캐려고 했다

    석탄 증산은 탄광회사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도 제도와 정책을 통해 생산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대한석탄공사는 1950년 11월 1일 발족했습니다. 이후 1950년대에는 석탄 증산계획이 추진됐고, 1961년에는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에는 「광업개발 조성법」이 마련됐습니다. 인접 광구를 묶어 규모 있게 개발하기 위한 탄좌회사 설립도 이어졌습니다.6)

    석탄은 어느 한 탄광의 상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산업을 키우고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다뤄졌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전력과 석탄을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라는 이름으로 함께 다룬 것도 같은 흐름에 있었습니다.2)

    땅속에 묻혀 있던 검은 돌이 정부의 산업계획, 철도와 기업, 수많은 노동자의 일과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일자리가 생기자 사람이 모였다

    탄광이 커지면서 산골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누군가는 혼자 왔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이 늘어나면 탄광 밖에도 일이 생깁니다.

    사람은 먹어야 했습니다. 잠잘 집이 필요했습니다. 옷과 신발, 생활용품도 사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학교가 필요했고 몸이 아프면 의료시설과 약국을 찾았습니다.

    광부가 받은 월급은 광부의 주머니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쌀을 사는 돈이 되고 아이의 학용품 값이 됐습니다. 식당의 매출이 됐고 가게 주인의 수입이 됐습니다.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에게도 일이 돌아갔습니다.

    석탄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의 생계도 탄광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탄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속도는 마을이 준비되는 속도와 늘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따라 먼저 사람이 들어오고, 그 뒤에 생활에 필요한 공간과 장사가 따라붙었습니다. 탄광을 중심으로 생긴 지역을 볼 때 생산시설만 살펴서는 변화의 크기를 알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도구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먹고 쉬어야 했고, 다시 다음 교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습니다. 장을 볼 곳과 아이들이 다닐 곳, 몸을 씻고 생활을 이어갈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탄광은 두 겹의 일터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석탄을 직접 캐고 고르고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도록 받쳐주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영역을 모두 석탄산업의 직접 고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식당 주인이나 상점 주인이 석탄회사 직원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탄광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거나 규모가 훨씬 작았을 장사와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석탄 한 덩어리가 몇 개의 직업을 만들었다’고 숫자를 만들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 고용과 주변 상권, 운송과 생활서비스를 어디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탄광의 고용이 갱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산업의 일자리는 광산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모이면 그들의 생활을 받치는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석탄을 따라가면 광부에서 선탄부로, 선탄장에서 철도로, 철도에서 탄광촌의 가게와 식당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검은 돌 하나가 사람의 이동과 생활의 자리까지 바꾸고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세 개의 시간이 흘렀다

    탄광촌의 하루는 탄광의 교대시간과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갑방 광부가 출근하는 아침에 병방 광부는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갑방과 을방이 엇갈렸고, 자정이 되면 병방이 다시 갱도로 향했습니다.3)

    누군가에게 아침인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퇴근 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한집에서도 생활시간이 달랐습니다. 낮에 자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은 소리를 줄여야 했고, 저녁 무렵 출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식사시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마친 광부에게는 몸에 묻은 탄가루를 씻는 일도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탄광 생활 기록에는 퇴근한 광부들이 목욕탕을 이용했던 모습도 전합니다.3)

    탄광촌을 단순히 ‘광산 옆에 생긴 마을’이라고 부르면 이런 시간이 빠집니다.

    탄광의 교대시간은 광부만의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잠과 식사, 상점과 식당의 손님이 움직이는 시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탄광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시절, 마을에는 서로 다른 하루가 겹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석탄의 값어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석탄산업이 계속 한 방향으로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생산이 빠르게 늘면서 석탄은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7)

    에너지의 중심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석탄의 역할이 곧바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은 수입 석유에 대한 부담을 키웠고 국내 석탄의 중요성을 다시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내 석탄 생산량은 1970년 1,239만 톤에서 1975년 1,759만 톤으로 늘었습니다.1)

    이 변화는 숫자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석탄 수요가 늘면 탄광이 바빠졌습니다. 생산이 늘면 운송량도 늘어났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이 들어오면 탄광촌의 생활도 커졌습니다.

    반대로 다른 에너지원이 석탄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 역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과 지역의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연료를 선택하는가는 멀리 떨어진 산골의 일자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돌을 캐는 데는 대가도 따랐다

    석탄이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이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땅속의 일은 위험했습니다.

    갱도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고 발파와 운반 과정에서도 사고가 날 수 있었습니다. 탄가루와 암석 먼지가 가득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일한 광부에게 진폐증은 심각한 직업병이었습니다.

    산업이 성장했다는 말 뒤에는 그 산업을 몸으로 떠받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석탄 생산량이 몇백만 톤 늘었다는 통계와 한 사람이 막장으로 내려가는 장면은 같은 역사의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한쪽만 보아서는 그 시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그 에너지를 캐기 위해 땅속으로 내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땅 위에서 석탄을 골라낸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실어 나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돌아갈 집과 함께 살아갈 마을이 있었습니다.

    석탄산업의 역사는 이 모두를 함께 보아야 사람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는 몇 사람의 일이 들어 있었을까

    검은 석탄 한 덩어리를 손에 올려놓으면 그저 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돌이 땅속에 있을 때부터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갱도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을 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갱도를 지키고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캐낸 것을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고 석탄과 돌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 밖에는 철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고 선로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탄광촌에는 밥을 파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집을 짓고 고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탄 한 덩어리에 정확히 몇 사람의 일이 연결돼 있었다고 하나의 숫자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숫자를 억지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땅속에서 한 사람이 캐낸 석탄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졌습니다. 선탄장을 지나 철도에 실렸고, 다시 필요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받은 임금은 탄광촌의 생활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한 산업이 다른 산업과 생활을 만나면서 일의 사슬이 길어진 것입니다.

    석탄은 연료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일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월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게의 손님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검은 돌의 여행은 탄광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길을 타고 도시로 온 석탄은 다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잘게 부서진 석탄은 일정한 모양으로 찍혀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료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 장, 두 장씩 세어 샀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석탄은 이제 연탄이라는 이름으로 골목 안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연탄을 만드는 사람, 싣는 사람, 파는 사람, 그리고 집집마다 나르는 사람입니다.

    탄광에서 시작된 일의 길이 도시의 골목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석탄은 어떻게 연탄 한 장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한 장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리의 아궁이 앞까지 왔을까.


    각주

    1.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국내 석탄 생산량을 1951년 16만 톤, 1955년 131만 톤, 1960년 535만 톤, 1965년 1,025만 톤, 1970년 1,239만 톤, 1975년 1,759만 톤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2. 대한민국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주요 시책으로 ‘전력, 석탄 등 에너지공급원의 확보’를 제시하고, 광업 부문에서는 석탄공사의 개편·경영합리화와 석탄증산을 명시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와 방침」. 우리역사넷 원문 자료
    3.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탄광」의 탄광 생활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3교대 작업과 갱내 이동, 작업 후 생활 모습을 확인했다. 국가기록원 「탄광」
    4. 국가기록원의 탄광 관련 기록물에는 탄광의 직무를 사무·채광·전기·선탄·공작·노무·갱외·기계 등으로 구분하고, 갱외부의 선탄부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탄광 관련 기록물 상세내용. 국가기록원 기록물 상세내용
    5. 국가기록원 「석탄산업」은 1955년 영암선과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의 개통으로 석탄수송 여건이 크게 개선됐으며, 특히 영암선이 현재 태백시 일원의 석탄개발 확대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6. 대한석탄공사는 대한석탄공사법에 따라 1950년 11월 1일 발족했다. 이후 1961년 「석탄개발 임시조치법」, 1962년 「광업개발 조성법」 등이 제정됐으며 인접 광구를 통합한 탄좌회사 설립도 추진됐다. 국가기록원,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대한석탄공사 기관연혁 국가기록원 「석탄산업」
    7. 국가기록원 「석탄정책」은 석탄이 1965년 1차 에너지에서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확보했으나 1968년에는 석유에 그 위치를 내주었다고 설명한다. 국가기록원 「석탄정책」
  • 돌은 어떻게 시멘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었을까

    돌은 어떻게 시멘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었을까

    산을 바라보면 돌이 먼저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능선이 보입니다. 산허리를 깎아놓은 채석장에 들어가서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돌이 숨어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 가운데 석회석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회색빛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을 캐고 부수고 뜨거운 가마에서 구운 뒤 다시 곱게 갈면 전혀 다른 물건이 됩니다.

    시멘트입니다.

    오늘은 시멘트를 쉽게 만납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도 있고, 학교와 병원에도 있고, 우리가 달리는 도로와 다리에도 있습니다. 터널과 댐, 공장과 항만에도 들어갑니다.

    너무 흔해서 우리는 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멘트는 한때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했던 회색가루를 스스로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풍경도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다시 세우려면 먼저 재료가 필요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집은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끊어진 길도 이어야 했습니다. 학교와 공장, 철도와 항만도 복구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돌아와도 사람이 살아갈 공간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세우려면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목재도 필요했고 철도 필요했습니다. 유리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시멘트가 필요했습니다.

    1950년대 한국은 필요한 시멘트를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기존 생산시설까지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엔한국재건단은 전후 복구사업 가운데 하나로 삼척의 시멘트 생산시설을 복구했고, 생산능력을 연 6만 톤에서 10만 톤으로 늘렸습니다. 이어 문경에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시멘트공장이 들어섰습니다. 1957년 준공된 문경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약 20만 톤이었습니다.¹⁾

    지금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공장이 생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공장을 조금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공장 하나만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생겼습니다.

    돌을 캐는 곳에서 일이 시작됐다

    시멘트공장은 아무 곳에나 세울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료인 석회석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했습니다.

    산을 조사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석회석을 캐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단단한 암반을 뚫고 발파하고, 떨어져 나온 돌을 모으고, 큰 돌을 잘게 부수고, 그것을 공장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굴착기와 운반장비가 필요했고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고치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했고 연료가 필요했습니다.

    한 덩이의 돌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이미 여러 사람의 일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1970년 국립영화제작소가 남긴 시멘트공업 기록도 이야기를 석회석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기록은 석회석을 시멘트의 중요한 원료로 소개하면서 채굴에서 생산과 출하, 건설현장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²⁾

    석회석은 공장에 도착했다고 곧바로 시멘트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돌을 부숩니다.

    다른 원료와 적절하게 섞습니다.

    곱게 갈아 가마로 보냅니다.

    가마 안에서는 매우 높은 온도로 원료가 구워집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덩어리 모양의 클링커가 만들어집니다.

    클링커를 식힌 뒤 석고 등을 더해 다시 곱게 갈면 우리가 아는 시멘트가 됩니다.

    공정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생산설비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었고, 가마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료를 검사하고 제품의 품질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기설비를 관리하는 사람, 기계를 정비하는 사람, 공장 안에서 원료와 제품을 옮기는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멘트 한 포대는 이미 이 긴 과정을 지나온 물건입니다.

    부족했던 시멘트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변화의 속도는 빨랐습니다.

    1962년 국내 시멘트 생산능력은 약 73만 톤이었고 실제 생산량은 약 51만 톤이었습니다.

    1971년에는 생산능력이 약 692만 톤, 실제 생산량이 약 687만 톤까지 늘어났습니다.

    10년도 되지 않는 사이 실제 생산량이 열 배를 훌쩍 넘게 증가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시멘트를 수입해야 했던 나라가 1971년에는 약 94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습니다.³⁾

    숫자만 보면 생산량이 늘어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보면 조금 다릅니다.

    새 공장이 생겼습니다.

    채석장이 커졌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제품을 옮길 철도와 화물차가 필요해졌습니다.

    시멘트를 저장하고 나누어 보내는 시설이 생겼습니다.

    건설현장에서는 더 많은 시멘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시멘트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그 앞뒤에 붙어 있는 일도 함께 커졌습니다.

    포대 하나에도 다른 산업이 들어 있었다

    예전 시멘트 하면 종이포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포대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종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시멘트를 담아도 쉽게 찢어지지 않는 포대가 필요했습니다.

    포대를 만들고 인쇄하고 접착하고 검사해야 했습니다.

    완성된 포대는 다시 시멘트공장으로 운반됐습니다.

    시멘트가 포대에 담기고 나면 창고로 갑니다.

    다시 화차나 화물차에 실립니다.

    도착지에서는 내려야 합니다.

    판매하는 사람이 있고 현장으로 배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포대의 무게를 사람이 직접 어깨에 지고 옮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설 규모가 커질수록 포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시멘트를 포대에 넣지 않고 대량으로 운반하는 벌크 방식이 확대됐습니다. 저장 사일로와 전용 운송장비가 필요해졌고, 소비지 가까이에는 분쇄·포장·레미콘 시설도 늘어났습니다.³⁾

    물건이 바뀌자 운반방법이 바뀌었습니다.

    운반방법이 바뀌자 다시 새로운 설비와 일이 생겼습니다.

    시멘트는 공장 밖으로 나가면서 더 많은 일을 만들었다

    공장에서 나온 시멘트는 그 자체로 완성된 건물이 아닙니다.

    물과 골재가 필요합니다.

    모래가 필요하고 자갈이 필요합니다.

    철근과 거푸집도 필요합니다.

    콘크리트를 만들고 운반하고 타설하고 다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로를 만드는 곳으로 갔습니다.

    다리를 만드는 곳으로 갔습니다.

    댐과 항만으로 갔습니다.

    공장과 학교를 짓는 데 들어갔습니다.

    집을 짓는 데도 들어갔습니다.

    1970년에 제작된 정부 기록영상에는 당시 시멘트가 댐, 항만, 제방, 터널, 철도침목, 교량, 고속도로, 고가도로, 지하도와 아파트 건설 등에 사용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²⁾

    여기서 시멘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시멘트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 하나가 다른 산업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시멘트공장 노동자의 일이 끝난 곳에서 건설노동자의 일이 시작됐습니다.

    광산과 제조업이 운송업을 만나고, 운송업이 건설업을 만났습니다.

    하나의 산업이 다른 산업을 불러냈습니다.

    회색 포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시멘트가 들어간 곳은 거대한 국가시설만이 아니었습니다.

    1970년 정부의 새마을가꾸기사업 추진 기록에는 전국 3만3267개 행정리동에 마을마다 시멘트 336포대를 지원하는 계획이 나옵니다.

    그 시멘트는 마을길을 넓히고, 작은 하천의 둑을 손보고, 공동우물과 공동빨래터를 만드는 데 사용됐습니다.

    이후 사업성과가 좋은 1만6600개 마을에는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했습니다.⁴⁾

    여기서는 평가보다 장면 하나가 중요합니다.

    시멘트가 공장에서 나와 기차와 화물차를 타고 어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포대를 내렸습니다.

    그 시멘트를 가지고 길을 고쳤습니다.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하수구를 손봤습니다.

    흙과 돌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기간산업을 세우던 재료가 어느 순간 평범한 사람이 사는 마을의 골목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시멘트가 바꾼 것은 건물의 크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바닥의 모습까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시멘트라고 모두 같은 시멘트는 아니었다

    건설이 늘어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디에나 똑같은 시멘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건축물에 필요한 성질과 거대한 댐에 필요한 성질은 달랐습니다.

    바닷물이나 황산염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도 달랐습니다.

    추운 날씨에 공사를 해야 하거나 짧은 시간 안에 초기 강도를 확보해야 하는 현장에서는 또 다른 성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포틀랜드 시멘트도 용도와 특성에 따라 보통, 중용열, 조강, 저열, 내황산염 등으로 나뉩니다.

    여기에서 시멘트산업은 단순히 많이 만드는 산업에서 필요한 성질을 만들어내는 산업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옥천의 당재터널은 이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재터널은 당시 경부고속도로 터널 가운데 가장 긴 난공사 구간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지』 자료에는 이 터널 공사에서 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⁵⁾

    약한 지반과 싸우며 공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런 현장에서는 콘크리트가 단순히 단단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시간 안에 강도를 내야 했습니다.

    당재터널 공사에서는 빠르게 초기 강도를 발현하는 조강시멘트가 사용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기업이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장이 시멘트에 새로운 성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시멘트는 더 이상 회색가루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요구되는 성능이 달라지는 기술제품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콘크리트가 굳는 시간까지 다루기 시작했다

    시멘트가 물과 만나면 반응이 시작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굳고 강도를 얻습니다.

    처음에는 단단하게 잘 굳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조물이 커질수록 문제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시멘트가 물을 만나면 단순히 젖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멘트 속 여러 성분이 물과 화학반응을 시작합니다. 이를 수화반응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서 시멘트 입자들이 서로 결합하고, 처음에는 부드럽던 콘크리트가 차츰 굳어 강도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화학반응에서는 열도 발생합니다. 이것이 수화열입니다. 작은 구조물에서는 발생한 열이 비교적 쉽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만, 댐이나 대형 기초, 두꺼운 교량 부재처럼 콘크리트의 부피가 커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열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콘크리트 내부의 온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과 밖이 똑같이 식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표면은 외부 공기와 접해 먼저 식는데 내부에는 열이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온도 차이로 콘크리트 안에 변형과 응력이 생기고, 조건에 따라 균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콘크리트를 다루는 기술자에게는 얼마나 강하게 만들 것인가만큼이나 얼마나 뜨거워지고, 언제 굳으며, 어떻게 식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타설한 부분이 너무 일찍 굳어버린 뒤 새로운 콘크리트가 이어지면 두 부분이 제대로 일체화되지 못하는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늦게 굳으면 다음 공정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현대의 콘크리트 기술은 강도만 설계하지 않습니다.

    혼화제와 혼화재, 배합과 타설순서 등을 이용해 응결과 경화의 진행도 관리합니다.

    국토교통 분야 건설기술 연구자료에서도 혼화재 사용량에 따라 초결과 종결시간이 달라지고, 필요에 따라 지연제나 촉진제를 사용해 응결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⁶⁾

    교량이나 거대한 구조물을 생각하면 이 기술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아침부터 콘크리트를 붓기 시작해 타설이 여러 시간 계속되는 구조물이라면 먼저 부은 콘크리트와 나중에 부은 콘크리트의 상태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현장 조건과 구조물의 특성에 따라 먼저 타설한 부분의 응결을 늦추고 뒤이어 들어오는 콘크리트와 일체성을 확보하도록 계획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콘크리트의 강도뿐 아니라 콘크리트의 시간까지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돌을 부수어 시멘트를 만들던 단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강해진 콘크리트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건물이 높아지자 콘크리트에는 다시 새로운 요구가 생겼습니다.

    더 큰 하중을 견뎌야 했습니다.

    기둥과 벽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더 큰 힘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강도 콘크리트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높였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한 콘크리트는 배합에 따라 점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높은 곳까지 펌프로 보내야 합니다.

    촘촘한 철근 사이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굳은 뒤에는 필요한 강도를 내야 합니다.

    화재와 장기간의 변형도 고려해야 합니다.

    롯데월드타워에는 80MPa급 고강도 콘크리트가 사용됐습니다.

    2015년에는 150MPa급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지상에서 309m 높이까지 수직 압송하는 시험에도 성공했습니다.

    관련 기술자료는 높은 점성 때문에 배관 막힘과 압송 지연 가능성이 있어 배합설계부터 제조와 펌프압송까지 함께 해결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⁷⁾

    여기서 우리는 아주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에 있던 석회석은 사람이 캐야 움직이는 돌이었습니다.

    그 돌을 부수고 구웠습니다.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물을 섞었습니다.

    콘크리트가 됐습니다.

    사람은 그 콘크리트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굳는 시간을 조절했습니다.

    흐르는 성질을 조절했습니다.

    마침내 수백 미터 위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돌이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시멘트 한 포대 뒤에는 몇 사람의 일이 있었을까

    여기까지 따라오면 처음의 질문이 다시 생깁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만드는 데 도대체 몇 사람의 일이 필요했을까요.

    석회석을 찾는 사람.

    돌을 캐는 사람.

    발파하는 사람.

    쇄석기를 움직이는 사람.

    가마를 관리하는 사람.

    기계를 정비하는 사람.

    전기를 관리하는 사람.

    품질을 시험하는 사람.

    포대를 만드는 사람.

    시멘트를 포장하는 사람.

    화차와 화물차로 운반하는 사람.

    창고와 사일로를 관리하는 사람.

    레미콘을 만드는 사람.

    펌프를 운전하는 사람.

    거푸집을 만드는 사람.

    철근을 조립하는 사람.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다지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

    재료를 연구하는 사람.

    강도를 시험하는 사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멘트공장의 기계를 만든 사람까지 따라가면 또 다른 산업이 나타납니다.

    가마 안을 견디는 내화재를 따라가도 새로운 산업이 나옵니다.

    시멘트 포대의 종이를 따라가면 제지산업이 나옵니다.

    화물차를 따라가면 자동차와 정비와 연료가 나옵니다.

    철도를 따라가면 또 다른 직업의 세계가 열립니다.

    건설현장 뒤를 따라가면 아파트와 학교와 공장과 도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까지 이어집니다.

    어디까지를 한 포대의 시멘트가 만든 일이라고 볼 것인가는 경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섣불리 숫자를 하나 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시멘트 한 포대는 혼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돌 하나를 따라가자 시대가 보였다

    처음에는 산에 묻힌 돌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돌의 쓸모를 알아냈습니다.

    돌을 캐는 일이 생겼습니다.

    공장이 생겼습니다.

    철도가 연결됐습니다.

    화물차가 달렸습니다.

    건설현장이 커졌습니다.

    마을길이 바뀌었습니다.

    집이 바뀌었습니다.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높아지면서 사람은 콘크리트의 강도와 흐름과 굳는 시간까지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길 아래에도 그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벽과 기둥에도 있습니다.

    다리를 건널 때도, 터널을 지날 때도 우리는 그것을 지나갑니다.

    너무 흔해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시멘트의 역사를 생산량 몇 톤으로만 읽으면 이 많은 사람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사람의 일을 따라가면 숫자 뒤에서 시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산에서 돌을 캐던 사람과 가마 앞에서 일하던 사람, 포대를 나르던 사람, 철근을 묶던 사람, 콘크리트를 붓던 사람, 배합을 연구하던 사람은 서로 다른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한 줄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돌 하나가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그 돌에서 가능성을 찾아내고, 캐고, 굽고, 갈고, 나르고, 시험하고, 부어 굳힌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일로 먹고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시멘트를 다시 들여다보는 까닭은 회색가루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만은 아닙니다.

    평범한 물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일을 만들고, 그 일이 다시 사람의 생활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시멘트 한 포대를 끝까지 따라가면 그 뒤에 또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그 한 포대 뒤에는 과연 몇 사람의 일이 연결되어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각주

    1.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UNKRA의 업적」, 1957,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073;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콜터장군」, 1958,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154.
    2. 국립영화제작소, 「산업시리즈(시멘트 공업)」, 1970,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3511.
    3.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멘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대통령비서실, 「새마을가꾸기 사업추진 상황보고(2차)」, 1970.9.22.,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EA0007016; 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기록물」.
    5. 한국도로공사,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지』, 1974, 국가기록원 소장자료 C11M24673; 국가기록원,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
    6. 국토교통 분야 건설기술 연구자료, 「친환경 콘크리트 기준 개정 보고서」, 2022, 건설기술정보시스템(CODIL).
    7. 롯데건설, 「국내 최초 150MPa 초고강도 콘크리트 수직압송 성공」, 2015.4.22.

  • 사람들은 왜 논밭을 떠나 공장으로 갔을까

    사람들은 왜 논밭을 떠나 공장으로 갔을까

    아침이 되면 일터로 가는 것이 지금은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자동차를 몰고, 지하철에 올라 회사나 공장으로 갑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한 달 동안 일한 뒤 월급을 받습니다. 어느 직장에서 일하는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일터는 논과 밭이었습니다. 집과 일터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날이 밝으면 일을 시작했고 계절이 바뀌면 해야 할 일도 달라졌습니다. 씨를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가 있었고, 비가 너무 와도 걱정이었고 오지 않아도 걱정이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땅과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

    1960년 우리나라 취업인구 가운데 농림어업에 종사한 사람은 66.0%였습니다. 제조업 종사자는 6.79%였습니다.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넘는 사람이 농림어업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¹⁾

    불과 몇십 년 뒤 이 모습은 크게 달라집니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방법을 둘러싼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처음부터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농촌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장소에 거주한다는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집이 있었고 논과 밭이 있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가까이 살았고 이웃집 사정도 대강 알고 지냈습니다. 어느 집에 일손이 부족한지, 어느 논에 물이 필요한지 서로 알고 살았습니다.

    사람의 일과 생활과 관계가 한곳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주소 하나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생활 전체를 두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도시의 고용기회가 늘어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향하는 인구이동이 뚜렷해졌습니다. 농촌에서는 절대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도시에는 사람이 집중되었습니다.²⁾

    사람이 고향을 떠난 이유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농사만으로 생활을 꾸리기 어려운 집이 있었습니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다른 벌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학교를 더 다니고 싶은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먼저 도시로 간 친척이나 고향 사람을 따라 길을 나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에서 사람을 밀어내는 힘과 도시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함께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두 힘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났습니다.

    나라가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며 수출과 고용을 늘리는 일이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경제를 성장시키고 기술을 축적하며 산업을 키우려는 계획이 실제 공장과 도로, 발전시설과 산업단지의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계획표에 적힌 산업은 결국 땅 위의 시설이 되어야 했습니다.

    공장을 지으려면 땅이 필요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했습니다.

    원료를 실어 나를 도로와 철도가 필요했고 제품을 내보낼 항구도 필요했습니다.

    공장을 짓는 데에는 철과 목재와 유리와 시멘트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장이 완성되면 그 안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1962년 울산공업지구가 지정되었습니다. 서울 구로에서는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이 시작됐고, 1967년 4월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 준공식이 열렸습니다. 이후 여러 지방도시에도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³⁾

    지도 위에 공업지구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그곳에는 공장만 들어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일터가 생겼습니다.

    사람이 움직일 이유가 하나씩 더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거대한 기계가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공장을 떠올리면 자동화된 생산라인과 로봇을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초기의 수출공장은 모습이 달랐습니다.

    당시 산업의 상당 부분은 많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구로공단에는 의류와 봉제제품 업체가 많이 들어왔고 전자·음향기기, 전기·광학기기 등의 업체도 자리 잡았습니다. 생산량이 늘어나려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⁴⁾

    옷 한 벌을 만드는 데에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천을 다루고 재단하고 봉제하고 검사하고 포장해야 했습니다.

    전자제품을 만드는 데에도 부품을 조립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완성된 물건을 검사하고 포장하고 옮기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공장 하나가 문을 열면 공장 안의 일자리만 생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료를 가져오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제품을 운반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기계를 고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 밥을 파는 곳이 생기고 물건을 파는 가게가 생겼습니다. 방이 필요했고 교통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한 산업의 성장은 그 산업의 울타리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이동을 불렀고, 이동한 사람이 다시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움직였다

    숫자로 보면 변화의 크기가 더 분명해집니다.

    1961년부터 1966년 사이 시·도 및 시·군 경계를 넘어 이동한 사람은 약 148만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약 113만 명, 76%가 도시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경우만 따로 보아도 전체 이동인구의 41%였습니다. 서울로 들어간 사람은 약 69만 명으로 전체 이동인구의 47%에 이르렀습니다.⁵⁾

    이것은 단순한 주소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 바뀌면서 일하는 곳도 달라졌습니다.

    농사짓던 집의 아들과 딸 가운데 누군가는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군가는 건설현장과 운수업으로 갔고 장사를 시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로 왔다고 모두 안정된 일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시가 받아들인 사람의 수만큼 좋은 일자리가 곧바로 생겨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안정한 벌이로 생활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업화가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길을 내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인구이동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의 인구이동을 연구하면서 농촌과 도시 사이의 이동뿐 아니라 이동한 사람의 성별과 연령, 교육수준, 경제활동, 산업과 직업까지 분석했습니다.⁶⁾

    우리나라의 직업지도가 사람의 이동과 함께 다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먼저 움직였다

    이동에는 세대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인구이동 자료를 보면 가족 전체가 함께 움직이는 경우와 달리 혼자 이동한 사람 가운데 젊은 층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특히 여성 단독 전입자 가운데 15세에서 24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이르렀습니다.⁷⁾

    농촌의 젊은 여성이 도시와 공장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당시 산업화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류봉제업 노동자의 생애를 추적한 연구에서는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제한된 기회, 농촌에서 느낀 앞날의 제약, 진학에 대한 바람 등이 노동자가 되는 과정과 함께 나타납니다.⁸⁾

    먼저 도시로 간 사람의 소개를 받아 공장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장으로 갔다고 곧바로 더 나은 생활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는 얻었지만 노동환경은 거칠었습니다.

    오랜 시간 일해야 하는 곳도 있었고 임금이 넉넉하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숙소가 부족했고 여러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과 생활이 나아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움직였지만 그 가능성에 도착하기까지 또 다른 어려움을 지나야 했습니다.

    공장 옆에는 사람이 살 집이 필요했다

    구로공단의 변화는 이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1967년 말 공단 가동 초기 구로공단 근로자는 2,460명이었습니다.

    1978년 말에는 11만 4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⁹⁾

    십여 년 사이 엄청난 수의 사람이 한 지역의 일터로 모여든 것입니다.

    11만 명이 넘는 사람이 공장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끝나면 돌아가 잠을 자야 했습니다.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옷을 빨아야 했고 필요한 물건을 사야 했습니다.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했고 고향에 갈 때는 버스나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공단에서는 미혼 여성 근로자를 위한 기숙사와 생활관 건립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늘어난 노동자를 충분히 수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공단 주변에는 작은 방들이 밀집한 이른바 ‘벌집’ 형태의 주거가 나타났습니다.¹⁰⁾

    공장의 역사를 공장 안에서만 보면 이 장면이 빠집니다.

    기계와 생산량과 수출액만 남습니다.

    공장 문 밖으로 한 걸음 나오면 사람이 보입니다.

    좁은 방에서 아침을 맞고 공장으로 걸어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월급을 받아 생활비를 남기고 고향집에 돈을 보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할 길을 찾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업화는 숫자로 기록되었지만 그 숫자를 움직인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논밭의 시간과 공장의 시간은 달랐다

    사람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오면서 바뀐 것은 직업의 이름만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농사의 시간에는 계절이 중요했습니다.

    모내기할 때가 있었고 김을 맬 때가 있었고 수확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의 일도 날씨와 햇빛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공장의 시간은 달랐습니다.

    출근시간이 있었습니다.

    작업 시작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해진 공정과 생산계획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시간뿐 아니라 시계와 생산계획에 맞추어 움직여야 했습니다.

    돈을 받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농사는 한 해의 수확과 농산물 가격에 생활이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면 노동의 대가를 임금으로 받았습니다.

    이 변화는 돈의 형태만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의 계산법도 바꾸었습니다.

    한 달에 얼마를 벌고, 방값으로 얼마를 쓰고, 밥값으로 얼마를 쓰고, 얼마를 모으고, 얼마를 고향집으로 보낼지를 계산하는 생활이 커졌습니다.

    오늘날 너무 익숙한 월급생활이 수많은 사람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도 달라졌다

    도시로 간 사람만 바라보면 변화의 절반만 보게 됩니다.

    사람이 빠져나간 농촌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이 빠져나가면 농촌에 남은 가족이 맡아야 할 일이 달라집니다.

    한 집의 노동력이 줄어듭니다.

    마을의 연령구성도 달라집니다.

    도시의 공장이 사람을 얻는 동안 농촌에서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1960년 취업인구의 66.0%였던 농림어업 비중은 1970년 50.83%, 1980년 37.81%로 내려갔습니다.

    같은 기간 제조업은 6.79%에서 14.27%, 다시 22.06%로 올라갔습니다.¹¹⁾

    숫자 두 줄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의 일터가 바뀌었습니다.

    그 변화는 어느 날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습니다.

    먼저 도시로 간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뒤이어 가족이나 고향 사람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도시가 커지자 새로운 일이 생겼다

    사람이 모이면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이 생깁니다.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면 그들을 태울 교통수단이 필요합니다.

    집이 필요하면 건설의 일이 늘어납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시멘트와 철근과 유리와 목재가 필요합니다.

    그 재료를 생산하고 운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구가 늘어나면 시장과 식당과 상점이 늘어납니다.

    돈을 벌고 모으는 사람이 늘어나면 금융을 다루는 일도 커집니다.

    제품 생산이 늘어나면 창고와 운송과 판매의 일이 따라옵니다.

    이렇게 보면 공장노동자라는 하나의 직업만 생긴 것이 아닙니다.

    공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권이 만들어졌고 그 생활권 안에서 수많은 일이 함께 자라났습니다.

    앞선 글에서 보았던 시멘트도 여기서 다시 만납니다.

    시멘트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 재료였습니다.

    도로와 다리와 주택을 만드는 재료였고 도시가 넓어지는 데 필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사람이 도시로 움직였고 도시가 커지면서 건설재료가 더 필요해졌습니다.

    재료를 더 만들려면 다시 공장과 광산과 운송이 필요했습니다.

    하나의 변화가 다른 변화를 불렀습니다.

    직업은 사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했다

    우리는 시대가 바뀌면 흔히 어떤 직업이 없어졌는지를 먼저 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변화를 따라가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의 일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의 자리가 크게 이동했습니다.

    논밭에서 하는 일이 줄어드는 동안 공장에서 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공장이 늘자 건설과 운송의 일이 커졌습니다.

    생산량이 늘자 판매와 유통의 일이 늘었습니다.

    도시가 커지자 도시생활을 유지하는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이 농민에서 공장노동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의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서 사는지가 바뀌었습니다.

    누구와 하루를 보내는지가 바뀌었습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바뀌었습니다.

    돈을 버는 방법이 바뀌었습니다.

    자녀에게 기대하는 미래도 달라졌습니다.

    직업의 변화는 생활 전체의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또 다른 곳으로 갔다

    공장으로 향하던 길이 영원히 같은 방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1960년 6.79%였던 제조업 취업 비중은 1970년 14.27%, 1980년 22.06%, 1990년 27.43%까지 높아졌습니다.

    이후 제조업 취업 비중은 낮아졌고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¹²⁾

    어떤 집에서는 부모가 논밭에서 일했고 자녀가 도시의 공장으로 갔습니다.

    그다음 세대 가운데서는 사무실과 상점, 병원과 학교 같은 서비스 일터로 향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이후 컴퓨터가 거의 모든 일터 안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그 컴퓨터 안으로 인공지능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일터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찾아올 때마다 사람 앞에 놓인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1960년대 고향을 떠나던 젊은이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새로운 기술 앞에 서 있는 사람도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논밭을 떠난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

    우리가 지금 그 시절을 들여다보는 것은 산업화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변화가 사람에게 어떻게 찾아오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공장은 지금 우리가 보는 오래된 산업시설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먹고살 길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였고 누군가에게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활을 돕는 월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노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같은 공장 문을 통과했어도 사람마다 그 문이 가진 의미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산업의 역사를 생산량만으로 읽으면 사람이 빠집니다.

    수출액만으로 읽어도 사람이 빠집니다.

    경제성장률만으로 읽어도 사람이 빠집니다.

    그 숫자 사이에는 고향집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 기차를 타고 도시로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장 기숙사에서 잠을 청한 사람이 있었고 좁은 방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낯선 기계를 처음 배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월급봉투를 받아 일부를 고향으로 보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우리나라의 일자리 지도가 움직였습니다.

    먹고사는 길은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

    논밭에서 공장으로 향했던 길을 따라가 보면 한 가지가 보입니다.

    직업은 혼자 태어나지 않습니다.

    원료가 달라지고 기술이 생깁니다.

    돈이 투자되고 공장이 세워집니다.

    도로와 철도가 놓입니다.

    물건을 만들고 옮기고 팔기 시작합니다.

    그곳으로 사람이 움직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집과 시장과 학교와 교통이 따라옵니다.

    새로운 생활이 만들어지고 그 생활이 다시 새로운 직업을 만듭니다.

    1960년대의 사람들은 이 거대한 변화를 ‘산업구조 전환’이라는 말로 살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저 집을 나섰습니다.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도시로 갔습니다.

    처음 보는 기계 앞에 섰습니다.

    하루를 일했습니다.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일터로 갔습니다.

    그 평범한 하루가 수없이 겹치면서 나라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도시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출근길도 그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논밭을 떠나 공장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먹고사는 방법을 바꿀 때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옮기고 다시 만들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장으로 향했던 길 뒤에 또 다른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던 일 가운데 일부를 기계가 맡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변화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각주

    1. 국사편찬위원회, 「산업구조 변화」, 『광복 60년; 한국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희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표 1> 「산업구조변화, 1949~2003」. 1960년 농림어업 취업비중 66.00%, 제조업 6.79%. 자료는 각년도 센서스 및 경제활동인구 관련 통계를 토대로 작성되었으며 시기별 산업분류체계에는 차이가 있다.
    2. 한국학중앙연구원, 「인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구이동’ 관련 항목. 산업구조 변화와 도시지역 고용기회 증가에 따른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농향도형 인구이동과 농촌지역 인구감소를 설명한다.
    3. 국가기록원, 「1960년대 산업단지 개발」, 『산업단지』 기록콘텐츠; 국가기록원, 「구로공단」,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울산공업지구 지정 및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준공 과정에 관한 기록.
    4. 국가기록원, 「구로공단」,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구로공단의 주요 입주 업종과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 관한 기록.
    5. 한국학중앙연구원, 「인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6년 특별인구조사를 토대로 한 1961~1966년 국내 인구이동 분석. 총이동인구 약 148만 명 가운데 약 113만 명이 도시지역으로 전입했으며 농촌→도시 이동은 전체의 41%, 서울 전입은 약 69만 명으로 제시되어 있다.
    6. 김대영·이효구, 『우리나라 인구이동의 특징, 1965~70』, 한국개발연구원 연구보고서 제76-01권, 1976.5.1. 연구는 농촌·도시간 이동, 성·연령, 교육, 경제활동, 산업 및 직업별 이동을 분석한다.
    7. 한국학중앙연구원, 앞의 「인구」. 단독 전입인구에서 미혼 젊은 연령층의 비중이 높으며 여성 단독 전입자의 경우 15~24세가 60%를 차지한 것으로 설명한다.
    8. 김귀옥, 「1960,70년대 의류봉제업 노동자 형성과정―반도상사(부평공장)의 사례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제61호, 비판사회학회, 2004, pp.10-41.
    9. 국가기록원, 앞의 「구로공단」. 구로공단 근로자 수는 1967년 말 2,460명에서 1978년 말 11만 4천여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국가기록원, 앞의 「구로공단」. 미혼 여성 근로자를 위한 기숙사·생활관과 급격한 노동인구 증가에 따른 공단 주변 ‘벌집’ 형태 주거에 관한 기록.
    11.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산업구조 변화」, <표 1>. 농림어업 취업비중은 1960년 66.00%, 1970년 50.83%, 1980년 37.81%; 제조업은 같은 시기 6.79%, 14.27%, 22.06%로 집계되어 있다.
    12.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 제조업 취업비중은 1990년 27.43%까지 높아진 뒤 2003년 20.15%로 낮아졌고, 같은 기간 서비스 관련 산업의 취업비중은 확대되었다.

  •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살아 왔을까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살아 왔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일을 만납니다.

    불을 켭니다.
    수돗물을 씁니다.
    휴대전화를 확인합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옷을 입고, 자동차나 버스에 오릅니다.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지금은 흔해서 눈길조차 가지 않는 물건 가운데 상당수는 한때 귀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것은 있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물건이 하나 들어오면 그 물건만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만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원료를 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기계를 만들고 고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완성된 물건을 옮길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창고에 쌓고, 가게에 진열하고, 사람들에게 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물건이 달라지자 일이 달라졌습니다.

    일이 달라지자 사람이 사는 곳도 달라졌습니다.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돈을 버는 방법과 쓰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언제나 먹고사는 방법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땅 가까이에 있었다

    오랫동안 먹고사는 일은 땅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논과 밭에서 곡식을 길렀습니다.
    산에서는 나무를 얻었습니다.
    바다와 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땅속에서는 돌과 광물을 캐냈습니다.

    집과 일터의 거리도 지금처럼 멀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을 직접 생산하는 집이 많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 가운데 상당수도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마을 안에서 품을 나누었고, 장이 서는 날이면 농산물과 생활용품이 한곳으로 모였습니다.

    그 시절에도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대장장이, 목수, 옹기를 굽는 사람, 베를 짜는 사람, 물건을 나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이 커지면서 물건 하나가 만들어져 사람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거리가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 곳에서 원료를 가져왔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먼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원료와 공장 사이에는 운송이 필요했습니다. 공장을 움직이는 기계가 늘어나자 기계를 만들고 고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전기를 사용하는 공장이 늘어나면 발전과 송전이 필요했습니다.

    생산량이 많아지면 창고가 필요했습니다.

    물건을 전국으로 보내려면 철도와 도로와 항만이 필요했습니다.

    상품을 안전하게 옮기려면 포장도 필요했습니다.

    거래 규모가 커지면 금융과 보험도 따라붙었습니다.

    한 사람이 만들고 한 사람이 팔던 물건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거대한 연결망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폐허를 다시 세우는 데에도 물건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산업시설과 철도, 도로를 복구해야 했고 학교와 병원, 공공시설과 집도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세우려면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철이 있어야 합니다.

    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멘트가 필요했습니다.

    전쟁 뒤 시멘트 생산시설의 복구와 확충은 국가 재건사업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유엔한국재건단은 삼척시멘트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을 6만 톤에서 10만 톤으로 늘렸습니다. 문경에는 새로운 시멘트공장이 들어섰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1957년 기록에 따르면 문경공장은 그해 11월 생산을 시작했으며 연간 2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¹⁾

    당시 문경공장 하나의 생산능력은 전국 시멘트 수요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²⁾

    지금은 공사현장에서 흔히 보는 회색 가루가 그때에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중요한 산업재였습니다.

    공장 하나를 세운다는 것도 공장 건물 하나를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석회석이 필요했습니다.

    광산이 필요했습니다.

    연료와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원료를 나를 길이 필요했습니다.

    기계를 설치하고 운전하고 고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완성된 시멘트를 전국으로 옮길 철도와 차량이 필요했습니다.

    시멘트라는 물건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주변에서 다른 일도 함께 움직였습니다.

    수입하던 시멘트를 우리가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1961년 말 국내 시멘트 생산능력은 약 72만 톤이었습니다.

    1962년 생산능력은 약 73만 톤이었지만 실제 생산량은 약 51만 톤이었습니다. 이후 공장이 늘고 설비가 확충되면서 1971년에는 생산능력 약 692만 톤, 실제 생산량 약 687만 톤에 이르렀습니다.³⁾

    여기서 생산능력과 실제 생산량은 구별해서 봐야 합니다.

    공장이 1년에 73만 톤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만큼 생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산업의 변화를 볼 때는 큰 숫자 하나만 보는 것보다 그 숫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더 눈여겨볼 변화가 있습니다.

    한때 시멘트를 계속 수입해야 했던 한국이 1971년에는 94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습니다.³⁾

    필요한 물건을 밖에서 들여오던 나라가 공장을 짓고 설비를 늘리고 기술을 익혀 해외에 내다파는 단계까지 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야기는 아주 반듯해 보입니다.

    수입하던 나라가 생산국이 되고, 생산국이 수출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산업의 역사는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수출하던 나라가 다시 시멘트를 수입했다

    1980년대 말 건설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상황이 다시 달라졌습니다.

    주택과 건물, 도로와 각종 개발사업이 한꺼번에 늘어나자 국내 생산만으로 필요한 물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990년에는 이것이 이른바 ‘시멘트 파동’으로 번졌습니다.

    당시 보도를 보면 그해 시멘트 수요는 3,637만 톤으로 예상됐지만 공급능력은 3,509만 톤이었습니다. 상반기에만 수요가 1,654만 톤에 이른 데 비해 공급은 1,593만 톤에 그쳐 약 60만5천 톤이 부족했습니다.⁴⁾

    숫자보다 당시 현장의 모습이 더 선명합니다.

    40kg 한 포대의 대리점 판매가격은 2,100원이었지만 건재상이나 공사현장에서는 5,000원을 넘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1990년 7월부터 시멘트 수출을 전면 중단하고 수입을 확대했습니다.⁴⁾

    그해 9월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습니다.

    수해로 일부 공장의 가동이 중단되고 운송에도 차질이 생기면서 시멘트 한 포대에 1만 원 이상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일부 건설현장에서는 시멘트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습니다.⁵⁾

    한때 수입하던 시멘트를 국내에서 만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수출까지 했던 나라가 다시 해외에서 시멘트를 급히 사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중국산 시멘트가 대량으로 들어왔습니다.

    1990년 수입된 시멘트는 219만 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산은 208만 톤으로 약 95%를 차지했습니다. 1991년 들어서도 상황은 이어졌습니다. 그해 5월 말까지 수입한 185만 톤 가운데 약 178만 톤, 96%가 중국산이었습니다.⁶⁾

    당시를 살아온 사람 가운데에는 중국산 시멘트를 둘러싼 품질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억을 그대로 사실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90년 수입된 중국산 등 외국산 시멘트가 KS 허가기준은 넘었지만 국내산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실공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⁴⁾

    기억과 기록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시멘트가 모자랐습니다.

    가격이 뛰었습니다.

    수출을 중단했습니다.

    해외에서 물량을 들여왔습니다.

    중국산 시멘트가 대량으로 들어왔습니다.

    품질을 둘러싼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멘트 부족은 시멘트업계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1년에는 벌크시멘트 부족으로 레미콘과 콘크리트파일 등 시멘트를 원료로 사용하는 업체들이 조업을 줄였고, 출하량이 평소보다 40~50% 이상 감소했다는 당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⁷⁾

    시멘트 하나가 부족했는데 레미콘 생산이 줄었습니다.

    건설현장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격이 움직였습니다.

    수입이 늘었습니다.

    항만의 하역과 운송도 문제가 됐습니다.

    물건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시멘트 한 포대에는 몇 사람의 일이 들어 있을까

    시멘트 한 포대를 앞에 놓고 보면 회색 가루를 담은 종이포대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포대를 거꾸로 따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먼저 석회석을 캐야 합니다.

    광산이 필요합니다.

    암반을 뚫고 깨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캐낸 돌을 옮겨야 합니다.

    돌을 부수고 원료를 배합합니다.

    높은 온도의 가마에서 굽습니다.

    다시 분쇄합니다.

    품질을 검사합니다.

    공장의 기계와 전기설비를 관리합니다.

    완성된 시멘트를 저장합니다.

    포대에 담습니다.

    그런데 포대도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인쇄가 있습니다.

    접착제가 필요합니다.

    포대를 만드는 기계가 있습니다.

    완성된 포대를 시멘트공장까지 가져오는 운송도 있습니다.

    시멘트공장을 떠난 포대는 다시 움직입니다.

    트럭을 탑니다.

    철도를 이용합니다.

    배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창고와 대리점을 거쳐 공사현장으로 갑니다.

    포대에 담지 않고 벌크 상태로 레미콘공장에 들어가는 물량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1965년 레미콘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벌크 출하가 시작됐고, 1987년에는 내수 시멘트 사용량 가운데 레미콘용 비중이 절반을 넘었습니다.³⁾

    레미콘공장에 간 시멘트는 모래와 자갈과 물을 만납니다.

    건설현장에서는 다시 철근과 벽돌, 유리와 목재, 배관과 전선 같은 전혀 다른 산업의 물건들과 만납니다.

    이쯤 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시멘트 한 포대와 연결된 직업은 몇 개일까.

    숫자를 먼저 정해 놓고 셀 수는 없습니다.

    석회석을 캐는 사람과 시멘트를 만드는 사람까지만 셀 것인지, 운송과 판매까지 포함할 것인지, 기계를 만드는 사람과 포대를 만드는 사람까지 포함할 것인지에 따라 숫자는 달라집니다.

    도로와 학교와 아파트와 공장이 세워지면서 생긴 일자리까지 계산한다면 범위는 훨씬 넓어집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몇 개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한 포대의 시멘트가 얼마나 많은 산업과 사람의 일을 이어 놓고 있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멘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장이 들어오자 사람도 움직였다

    1960년대부터 한국의 산업구조는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전후 복구를 지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섬유와 의류, 합판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수출산업으로 성장했고, 이후 산업의 중심은 점차 더 넓은 제조업으로 이동했습니다.⁸⁾

    공장이 세워지면 공장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업용수가 필요했습니다.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도로가 필요했습니다.

    항만이 필요했습니다.

    공장을 건설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기계를 설치하고 운전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생산된 물건을 창고로 옮기고 다시 시장으로 보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움직였습니다.

    농촌을 떠나 도시와 공업지역으로 향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주소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는 일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시간이 달라졌습니다.

    농사철과 날씨에 맞춰 움직이던 생활에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로 옮겨간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월급이라는 형태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가정도 늘었습니다.

    처음 보는 기계를 배워야 했고 낯선 도시에서 살 집을 구해야 했습니다.

    ‘산업화’라는 큰 말은 한 사람의 하루에서는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사는 곳이 바뀌고, 하는 일이 바뀌고, 돈을 버는 방법이 바뀌는 일이었습니다.

    철과 석유와 전기가 뒤따랐다

    시멘트만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강산업이 성장하면 철을 사용하는 산업이 함께 커집니다.

    기계를 만듭니다.

    배를 만듭니다.

    자동차를 만듭니다.

    공장을 세웁니다.

    건물의 뼈대를 만듭니다.

    석유도 자동차의 연료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정제와 저장과 운송이 필요했습니다.

    석유화학산업의 원료가 되었고 수많은 생활제품으로 갈라졌습니다.

    전기는 또 다른 길을 열었습니다.

    공장의 기계를 움직였습니다.

    도시의 밤을 밝혔습니다.

    가정 안으로 새로운 전기제품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때부터 한 직업을 그 직업만으로 설명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동차회사가 있다고 그 사람의 일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철강이 있어야 합니다.

    고무와 유리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부품이 필요합니다.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 필요합니다.

    공장설비와 전기가 필요합니다.

    완성된 자동차를 옮길 물류가 필요합니다.

    판매점이 필요합니다.

    정비소가 필요합니다.

    도로가 필요합니다.

    보험과 금융도 따라옵니다.

    주유소도 생깁니다.

    자동차 한 대가 세상에 나오면서 서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한 연결망 안으로 들어옵니다.

    직업은 혼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기계가 들어오자 사람의 일이 움직였다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더 빠르고 일정하게 물건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기계가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기계가 들어오자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기계를 설치해야 했습니다.

    운전해야 했습니다.

    고쳐야 했습니다.

    전기를 공급해야 했습니다.

    생산공정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변화는 한 번 더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직접 기계를 움직이던 일 가운데 일부가 줄어드는 대신 기계를 설계하고 제어하고 정비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현장에서 하던 일이 제어실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직업 이름은 그대로인데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가 보입니다.

    기술이 바뀐다고 사람의 일이 언제나 통째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사라집니다.

    어떤 일은 줄어듭니다.

    어떤 일은 기계로 넘어갑니다.

    어떤 일은 다른 직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전에 없던 일이 생겨납니다.

    세상의 변화는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만드는 방법 다음에는 파는 방법이 바뀌었다

    물건을 만드는 방법만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파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장터가 있었습니다.

    상점이 커졌습니다.

    전문점이 생겼습니다.

    백화점과 슈퍼마켓, 대형마트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이 나타났습니다.

    가게에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도 물건을 팔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순간 또 다른 일이 생겨났습니다.

    상품을 화면에 올리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주문을 처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결제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물류센터에서 수많은 상품을 분류해야 했습니다.

    상자에 담아야 했습니다.

    전국의 집 앞까지 가져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스마트폰은 이 변화를 다시 밀어붙였습니다.

    상점이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은행도 들어왔습니다.

    신문도 들어왔습니다.

    카메라도 들어왔습니다.

    음식점도 들어왔습니다.

    택시를 부르는 일도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물건과 서비스를 사는 방법이 달라지자 사람들이 돈을 버는 방법도 다시 달라졌습니다.

    사라진 직업의 이름만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기술이 새로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떤 직업이 없어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졌다면 그 사람이 하던 모든 일도 함께 사라졌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타자수라는 직업이 줄었다고 글자를 입력하는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은행 창구를 찾는 사람이 줄었다면 금융업무가 없어진 것인지, 그 업무 가운데 일부를 고객이 직접 하게 된 것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사진관이 줄었다고 사람들이 사진을 적게 찍게 된 것도 아닙니다.

    직업은 사라져도 그 직업이 하던 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기계로 갑니다.

    소비자에게 갑니다.

    다른 직업으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산업 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직업의 변화를 보려면 직업의 이름만 세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제 기계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큰 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입니다.

    과거의 기계가 주로 사람의 힘을 대신했다면 지금의 기술은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하고, 그림을 만들고, 계산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장 안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사무실 안의 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 역시 화면에 보이는 프로그램 하나만 놓고 보면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반도체가 필요합니다.

    데이터센터가 필요합니다.

    전력이 필요합니다.

    통신망이 필요합니다.

    냉각설비가 필요합니다.

    연구개발이 필요합니다.

    투자가 필요합니다.

    설비를 만들고 설치하고 운용하고 고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AI 역시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도 “AI가 몇 개의 직업을 없앨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하던 일 가운데 무엇이 기계로 옮겨가는지 봐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그 변화에 필요한 원료와 에너지와 기술과 돈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봐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의 전체 모습이 드러납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산업의 역사를 읽다 보면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몇 톤을 생산했습니다.

    몇 대를 만들었습니다.

    몇 달러어치를 수출했습니다.

    몇 퍼센트 성장했습니다.

    몇 명이 취업했습니다.

    모두 필요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처음 올라온 사람에게 산업화는 경제성장률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는 기계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방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공장으로 가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기술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에게 자동화 역시 생산성이라는 숫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잘하던 일의 일부를 기계가 가져가는 경험이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기술을 익힌 사람에게 변화는 전에 없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산업이 커지는 동안 누군가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 뒤편에서는 다른 산업이 줄었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일을 배워야 했고, 누군가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산업의 변화에는 늘 사람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물건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다시 시멘트 한 포대를 바라봅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 안에는 석회석이 있습니다.

    광산이 있습니다.

    공장이 있습니다.

    불과 전기가 있습니다.

    기계가 있습니다.

    운송이 있습니다.

    판매가 있습니다.

    건설현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 사람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한 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바닥만 한 기계 안에 광물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와 배터리와 통신망과 소프트웨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한 대도 그렇습니다.

    쌀 한 톨도 그렇습니다.

    택배 상자 하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먹고살았는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물건이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면 왜 어떤 일이 줄고 새로운 일이 생겼는지도 보입니다.

    먹고사는 방법은 계속 바뀌었다

    몇 세대만 나란히 놓아도 변화는 선명합니다.

    한 세대가 평생 해온 일을 다음 세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평범한 직업 가운데 이전 세대가 젊었을 때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일도 있습니다.

    원재료가 달라졌습니다.

    에너지가 달라졌습니다.

    기술이 달라졌습니다.

    돈이 몰리는 곳이 달라졌습니다.

    만드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옮기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파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달라졌습니다.

    그 변화가 겹친 자리에서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때마다 다시 먹고살 방법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배웠습니다.

    하던 일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팔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변화를 먼저 이용한 사람도 있었고 뒤늦게 따라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익힌 기술의 가치가 갑자기 달라지는 일을 겪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산업에서 전혀 다른 기회를 얻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기록될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상적인 업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대.

    로봇이 공장 안에서 더 넓은 영역으로 움직이던 시대.

    물건뿐 아니라 지식과 경험도 디지털 공간을 통해 거래되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 결말을 알지 못합니다.

    결말을 미리 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앞에서는 늘 무언가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새로운 원료를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돈이 투자됐습니다.

    생산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도로와 철도와 항만이 열렸습니다.

    판매방법이 바뀌었습니다.

    소비자의 선택이 달라졌습니다.

    그 뒤를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때로는 밀려서 움직였고, 때로는 새로운 기회를 보고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앞선 세대가 먹고살았습니다.

    우리 세대가 먹고살았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도 자기 시대의 방법으로 먹고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먹고살아 왔는지를 살펴본다는 것은 오래된 직업 이름을 모아놓는 일이 아닙니다.

    산업의 연대표를 외우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이 움직일 때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들고 다시 만들어왔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그 길에는 논밭이 있습니다.

    광산이 있습니다.

    공장이 있습니다.

    시멘트가 있습니다.

    철과 석유와 전기가 있습니다.

    시장과 상점이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공지능이 그 길 위에 들어와 있습니다.

    시대마다 물건은 달라졌고 기술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오래도록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아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각주

    1)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UNKRA의 업적」, 1957,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073. 삼척시멘트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이 6만 톤에서 10만 톤으로 증가했으며 문경시멘트공장이 1957년 11월 생산을 시작해 연간 20만 톤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됐다는 기록. 검색일 2026. 9. 23.

    2)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콜터장군」, 1958,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N0002154. 1957년 9월 문경시멘트공장 준공 및 연간 생산능력 20만 톤, 당시 전국 수요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기록. 검색일 2026. 9. 23.

    3)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멘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1년 말 생산능력 72만 톤, 1962년 생산능력 73만 톤·생산량 51만 톤, 1971년 생산능력 692만 톤·생산량 687만 톤·수출량 94만 톤 및 1965년 이후 벌크 출하와 레미콘 관련 내용을 수록. 검색일 2026. 9. 23.

    4) 정종석, 「시멘트품귀 수그러들 기미 없다/‘파동’의 문제점과 전망」, 『서울신문』, 1990. 7. 26., 7면. 1990년 시멘트 수급 전망, 상반기 부족량, 가격 상승, 수출 중단, 수입 확대 및 당시 수입시멘트의 품질 문제에 관한 보도.

    5) 「시멘트품귀에 건설공사 중단 속출」, 『서울신문』, 1990. 9. 26., 6면. 수해에 따른 생산·수송 차질과 시멘트 가격 상승 및 건설현장의 공급난에 관한 보도.

    6) 정종석, 「몰려오는 중국 상품… 국내업계 ‘비상’」, 『서울신문』, 1991. 6. 7., 6면. 1990년 수입시멘트 219만 톤 가운데 중국산 208만 톤, 1991년 1~5월 수입시멘트 185만 톤 가운데 중국산 약 178만 톤이라는 당시 수입실적 보도.

    7) 「시멘트 품귀현상 심각/본격 건축성수기… 각종공사 중단위기」, 『서울신문』, 1991. 6. 2., 7면. 벌크시멘트 부족으로 레미콘·콘크리트제품 생산업체의 조업이 줄고 출하량이 평소보다 40~50% 이상 감소했다는 보도.

    8) 한국학중앙연구원, 「산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2~1971년 노동집약적 경공업인 섬유·의류·합판 등을 중심으로 한 수출산업화와 산업정책의 변화에 관한 내용. 검색일 2026.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