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바쁘다는 말

  • 요즘 뭐 하세요?

    요즘 뭐 하세요?

    토요일 오전이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오래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사람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습니다.

    “형님, 오늘 뭐 하세요?”

    딱히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오늘은 좀 일이 있어.”

    전화를 끊고 나서도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만나자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미리 피한 것뿐이었습니다.

    씻고 나가는 것도 귀찮았고, 갑자기 생긴 약속에 몇 시간을 내주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조용히 있고 싶었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자 문자 하나가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TV를 조금 보다가 잠깐 졸았습니다. 일어나 보니 세 시가 넘었습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창밖을 보다가 아침 전화가 생각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했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혼자 조금 우스워졌습니다.

    바빠서 못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싫었던 것도 아닙니다. 만나면 반가웠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없는 일까지 만들어냈을까.

    며칠 뒤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요즘 바쁘세요?”

    “그냥 이것저것 하지.”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말이 걸렸습니다.

    이것저것.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려니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바쁘다는 말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정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돌아올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날도 있었고, 달력을 펴면 이미 약속이 들어 있는 날도 많았습니다.

    누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바쁘지.”

    그 한마디면 대충 통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아진 뒤에도 그 말은 남아 있었습니다.

    약속을 미룰 때도 그랬고, 전화를 짧게 끝낼 때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전화를 끊고 책상 위 달력을 보았습니다.

    그 주에는 적혀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동안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습니다.

    나는 누구한테 바쁘다고 한 거지?

    바쁘지 않은데 바쁘다고 말했다

    그 주 금요일, 토요일에 전화했던 사람에게 다시 연락했습니다.

    “지난번에 왜 전화했어?”

    잠깐 침묵이 있었습니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냥 형님 생각나서 밥이나 먹을까 했죠.”

    “오늘은?”

    이번에는 상대가 웃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일이 있어요.”

    “그래?”

    “다음에 제가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었습니다.

    조금 아쉬웠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만나자는 말이 나올까 봐 먼저 피했는데, 정작 상대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밥 한 끼가 아쉬워졌습니다.

    며칠 뒤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은 뭐 하세요?”

    이번에도 특별한 일정은 없었습니다.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럼 나오세요.”

    “어디로?”

    “나오시면 정하죠.”

    전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둘은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고, 누가 어디로 갔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매일 얼굴을 보던 사람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둘이 한참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그 사람 있잖아요. 맨날 제일 먼저 출근하던 사람.”

    “안경 쓴 사람?”

    “아니요. 그 사람 말고.”

    이름 하나를 놓고 한동안 헤맸습니다.

    겨우 생각났을 때는 그것만으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형님, 요즘은 진짜 뭐 하세요?”

    이번에는 ‘이것저것’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내.”

    “심심하지 않아요?”

    잠시 생각했습니다.

    “심심할 때도 있지.”

    말하고 나서 상대의 얼굴을 한번 보았습니다.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나도 쉬는 날은 그래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금 전 생각난 사람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그 짧은 대화가 오래 남았습니다.

    그냥 지낸다.

    심심할 때도 있다.

    말해버리고 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안쓰럽게 보지도 않았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데도 안 다닙니다

    며칠 뒤 은행에 갔습니다.

    번호표를 뽑으니 앞에 일곱 명이 있었습니다.

    빈 의자를 찾아 앉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이름을 불렀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동안 얼굴을 못 봤던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여기서 다 보네.”

    그 사람도 옆에 앉았습니다.

    자녀 이야기를 조금 했고,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물었습니다.

    “요즘 어디 다니세요?”

    예전 같으면 대답 뒤에 무언가를 붙였을 것입니다.

    준비하는 것이 있다거나, 이것저것 하고 있다거나, 요즘도 정신없이 지낸다는 말 같은 것들입니다.

    그날은 그냥 말했습니다.

    “아무 데도 안 다녀.”

    상대가 잠깐 저를 쳐다봤습니다.

    그 짧은 침묵이 예전 같으면 불편했을 겁니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잠시 뒤 그가 말했습니다.

    “좋으시겠네.”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뭐가 좋아?”

    “아무 데도 안 가도 되잖아요.”

    둘이 웃었습니다.

    마침 그의 번호가 불렸습니다.

    “먼저 갈게요.”

    “그래요.”

    그는 창구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저는 다시 번호표를 보았습니다.

    아직 두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 말이 몇 번 생각났습니다.

    아무 데도 안 가도 된다.

    저는 그동안 비슷한 생활을 전혀 다른 말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

    두 문장은 닮아 있었지만 듣고 나면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들었다고 다음 날부터 생활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료한 날은 여전히 무료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집 안을 서성이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예전처럼 일정이 빽빽했던 때가 그리웠습니다.

    다만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을 미리 준비하는 일은 조금씩 줄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며칠 뒤 그 사람과 다시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자 그가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요즘 바빠?”

    “죽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 전까지 제가 자주 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빠?”

    “이것저것 할 게 많아요.”

    웃음이 나올 뻔했습니다.

    이것저것.

    저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도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켰다가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런데 뭘 자꾸 봐?”

    “그냥 습관이죠.”

    음식이 나왔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물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집에 있는 전등을 바꿨고, 어제는 차를 정비소에 맡겼다고 했습니다. 건강검진 예약도 하나 잡혀 있었고, 주말에는 장을 보러 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죽을 만큼 바쁜 거야?”

    제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도 웃었습니다.

    “그러게요.”

    잠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사실 바쁜 건 아닌데요.”

    말끝이 조금 느려졌습니다.

    “집에 있으면 하루가 너무 길어요.”

    이번에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고요. 약속 하나 있으면 그날은 괜찮은데, 아무것도 없는 날은 아침부터 좀 그래요.”

    “뭐가?”

    “모르겠어요. 그냥 오늘 뭐 하지 싶죠.”

    얼마 전의 제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닮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할 일을 만들 때도 있어요. 차도 아직 더 타도 되는데 정비소 갔다 왔고, 멀쩡한 전등도 바꿨고.”

    “장을 보는 것도?”

    “그건 가야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둘이 웃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커피 마실래?”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시계를 보았습니다.

    “그러죠.”

    둘은 가까운 카페로 갔습니다.

    자리에 앉은 뒤에도 그가 먼저 시계를 보았습니다.

    “몇 시까지 가야 돼?”

    “아무 때나요.”

    “그럼 왜 자꾸 시계를 봐?”

    그가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습니다.

    “그러게요.”

    커피가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예전 직장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자녀 이야기가 나왔고, 한동안 가지 않았던 동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예전에 출장 갔다가 국수 먹은 데 기억나요?”

    기억이 났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들어갔던 작은 가게였습니다.

    “거기 국수 괜찮았는데.”

    “아직 있으려나?”

    그가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검색을 하더니 화면을 제 쪽으로 돌렸습니다.

    “있네요.”

    간판은 바뀌어 있었지만 가게는 남아 있었습니다.

    “한번 가볼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화면을 들여다봤습니다.

    차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지금?”

    그가 저를 쳐다봤습니다.

    “지금요?”

    “가자며.”

    “오늘?”

    “오늘 가면 안 돼?”

    그가 다시 시계를 봤습니다.

    이번에는 둘 다 웃었습니다.

    국수 한 그릇 먹으러

    계산을 하고 카페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였습니다.

    둘 다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 내려와서도 아무도 먼저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가게 이름을 넣었습니다.

    한 시간 십여 분.

    “진짜 가요?”

    “싫으면 지금 말해.”

    “아니요. 갑시다.”

    차가 출발했습니다.

    처음 삼십 분쯤은 조금 전 카페에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익숙한 도로를 벗어나자 말이 줄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둘 다 아는 노래였지만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창밖을 보다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국수 먹으러 이렇게 멀리 가는 사람들이었나?”

    “오늘부터 그런 사람인가 보지.”

    둘이 웃었습니다.

    조금 뒤에는 말이 끊겼습니다.

    굳이 무슨 이야기를 찾아내지 않았습니다.

    차창 밖으로 논과 낮은 건물들이 지나갔습니다. 신호에 걸리면 멈췄고, 다시 파란불이 켜지면 출발했습니다.

    예전에는 누군가와 차를 타고 이렇게 오래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어색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도착할 때까지 침묵이 길어지면 괜히 라디오 소리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동네는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전에 있던 주유소가 보이지 않았고 넓은 공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여기가 맞아?”

    “내비는 맞다고 하는데.”

    길을 잘못 든 줄 알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가게는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낡은 간판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문 앞에는 키오스크까지 놓여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도 예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맞아요?”

    그 사람이 작게 물었습니다.

    “주소는 맞는데.”

    둘은 국수를 주문했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한동안 말없이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맛이 이랬어요?”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는 엄청 맛있었는데.”

    “그때 배가 고팠겠지.”

    또 웃었습니다.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동네에도 국숫집은 많았습니다. 왕복 두 시간이 넘게 걸렸고 기름값까지 생각하면 꽤 비싼 국수였습니다.

    그렇다고 괜히 왔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차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근처를 조금 걸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건물이 하나쯤 남아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골목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우리 저쪽으로 갔던 것 같은데.”

    “나는 반대쪽 같은데.”

    “형님 기억도 이제 못 믿겠네요.”

    “네 기억은 믿을 만하고?”

    그날 있었던 일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운전했는지부터 달랐고, 왜 그 동네에 갔는지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국수를 먹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맛이 어땠는지는 이제 자신이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우연히 꺼낸 기억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우리가 찾던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커피나 한잔하고 갑시다.”

    “아까 마셨잖아.”

    “오늘 바쁘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근처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창가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갈 때보다 말이 적었습니다.

    피곤해서였는지, 더 할 이야기가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차 안에는 라디오 소리만 작게 흘렀습니다.

    한참 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다 갔네요.”

    창밖을 보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러네.”

    “국수 먹다가 하루 다 갔어요.”

    “그러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창밖을 보았습니다.

    저도 앞을 보았습니다.

    그날 하루를 어디에 썼느냐고 묻는다면 국수 한 그릇에 썼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늘 뭐 하셨어요?

    집에 돌아오니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습니다.

    아침에는 이런 하루가 될 줄 몰랐습니다.

    누군가 아침에 오늘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면 국수를 먹으러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갈 거라고는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습니다.

    몸은 조금 피곤했습니다.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을 늦게 먹었습니다.

    그날 밤 다른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물었습니다.

    “오늘 뭐 하셨어요?”

    국숫집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처음부터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냥 사람 하나 만나고 왔어.”

    “바쁘셨네.”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아니. 안 바빴어.”

    “그래요?”

    “응.”

    상대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대화는 그대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전화를 끊고 소파에 다시 앉았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사람을 만나 점심이나 먹고 들어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이 국수가 되었고, 국수가 한 시간 넘는 길이 되었고, 길 끝에서 오래전의 동네를 다시 보았습니다.

    하루는 계획한 것보다 길게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바빴다’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는 아무 약속도 없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신문을 조금 읽었습니다.

    점심 무렵에는 냉장고에 남은 것을 꺼내 먹었습니다.

    오후에는 잠깐 졸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네 시가 가까웠습니다.

    휴대전화에는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국수를 함께 먹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집 생각나네요.’

    웃음이 났습니다.

    ‘맛있어서?’

    잠시 뒤 답이 왔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한참 답이 없었습니다.

    저녁을 준비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습니다.

    ‘그냥 그날이 재밌었어요.’

    그 문장을 한번 읽었습니다.

    답장을 쓰려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저녁거리를 꺼냈습니다.

    그날은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멀리 가지도 않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TV를 켰다가 볼 만한 것이 없어 다시 껐습니다.

    밤이 조금 깊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뭐 하셨어요?”

    예전 같으면 잠깐 머릿속을 뒤졌을 것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모아 대답할 만한 것을 하나 찾았을 것입니다.

    그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늘?”

    창밖을 한번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상대가 웃었습니다.

    “팔자 좋으시네요.”

    저도 웃었습니다.

    “그런가 봐.”

    전화가 끝났습니다.

    탁자 위에는 아침에 읽다 만 신문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문을 접어 한쪽에 두었습니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습니다.

    컵을 씻어 엎어놓았습니다.

    거실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