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해봅니다.
특별한 약속은 없습니다. 어디 멀리 갈 일도 없고 시간을 맞춰 만나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달력을 봐도 오늘 칸은 비어 있습니다.
이런 날은 마음이 조금 느긋합니다. 오늘은 별일 없겠구나 싶습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 쪽으로 갔다가 수납장 문을 엽니다. 건전지를 찾으려던 참입니다. 안쪽에 공구함이 보입니다.
언제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공구함입니다.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여니 드라이버와 펜치가 뒤섞여 있고, 줄자 밑에는 전선 조각이 끼어 있습니다. 작은 통에는 크기가 다른 나사와 못이 한데 들어 있습니다.
하나씩 꺼내놓습니다. 쓸 만한 나사는 따로 모으고 굳어버린 접착제는 버립니다. 거의 다 쓴 절연테이프도 치웁니다.
그러다 밑바닥에서 작은 드라이버 하나를 발견합니다. 한동안 찾았던 것입니다.
“여기 있었네.”
드라이버를 손에 들자 며칠 전부터 흔들리던 책상 서랍 손잡이가 생각납니다. 공구함을 열어둔 채 책상으로 갑니다. 나사 하나를 조이고 손잡이를 몇 번 당겨봅니다.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드라이버를 내려놓으려는데 이번에는 방문 아래쪽 나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도 한번 조입니다.
건전지를 찾으려고 수납장 문을 열었을 뿐인데 공구함을 정리하고, 서랍 손잡이를 고치고, 방문 나사까지 조였습니다.
다시 공구함 앞으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전화를 받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십여 분이 지나 있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시계를 보다가 오전에 처리하려던 은행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 나가야겠습니다.
공구함을 대충 마무리해 넣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은행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니 점심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며칠 전 택배로 받은 물건 하나를 반품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납니다.
어차피 나온 김입니다. 반품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릅니다. 우유가 떨어졌고 과일도 조금 사야 합니다. 몇 가지만 사려고 들어갔는데 매장을 돌다 보니 필요한 것이 하나씩 더 생각납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집에 돌아와 산 물건을 제자리에 넣고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잠깐 앉아 있으려는데 아침에 열어놓았던 수납장이 보입니다. 공구함을 제자리에 넣고 바닥에 떨어진 작은 나사 하나도 주워 담습니다.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오후에도 일은 하나씩 생깁니다. 아침에 온 문자에 답하고, 확인할 것이 있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다른 연락 하나를 처리합니다. 집 앞에 잠깐 나갔다 돌아오고 미뤄두었던 전화 한 통도 합니다.
큰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계는 자꾸 앞으로 갑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습니다. 아침부터 가만히 있었던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떠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내가 뭘 했지.
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공구함을 정리했고 손잡이도 고쳤습니다. 은행에 다녀왔고 반품할 물건도 보냈습니다. 마트에도 다녀왔습니다. 전화도 했고 필요한 연락도 주고받았습니다.
하나씩 적으면 제법 됩니다.
그런데 하루 전체를 손에 올려놓고 보면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분명 바빴는데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루 종일 바빴는데 왜 한 일이 없는 것 같을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오전에 책을 두 시간 읽었다면 그 시간을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책을 읽었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면 “친구를 만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에 다녀왔다면 그날은 산에 다녀온 날로 남습니다.
한 가지 일이 어느 정도 시간을 차지하면 그 시간에는 이름이 붙습니다. 나중에 하루를 떠올릴 때도 비교적 선명합니다.
오늘 오전은 다릅니다.
건전지를 찾고, 공구함을 열고, 드라이버를 발견하고, 손잡이를 조였습니다. 전화를 받고 옷을 갈아입고 은행으로 갔습니다. 기다렸다가 일을 처리했고, 반품을 맡긴 뒤 마트에 들렀습니다.
하나하나는 분명한 행동입니다.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한꺼번에 부를 만한 말이 없습니다.
‘공구함을 정리한 오전’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일을 너무 많이 했고, ‘은행에 다녀온 오전’이라고 하기에는 은행보다 그 앞뒤에 쓴 시간이 더 많습니다. ‘볼일을 본 오전’이라고 하면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뭉개집니다.
시간은 분명 지나갔는데 그 시간에 붙일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은 기억에서도 쉽게 흐려집니다. 오래 한 가지에 머문 시간은 덩어리로 남지만, 십 분과 이십 분씩 여러 일 사이를 옮겨 다닌 시간은 잘게 흩어집니다.
그래서 두세 시간이 지나 시계를 보면 놀랄 때가 있습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찾고, 조이고, 기다리고, 이동하고, 확인하고, 정리하는 사이에 나뉘어 들어갔을 뿐입니다.
하루 종일 바빴는데 무엇을 했는지 선명하지 않은 날에는 이런 이름 없는 시간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작은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
아침에 하려던 일은 건전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공구함을 정리할 계획도, 서랍 손잡이를 고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건드리자 옆에 있던 일이 따라왔습니다.
생활 속의 작은 일은 자주 이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마트에 가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우유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과일도 얼마 남지 않았고 다른 필요한 물건이 떠오릅니다.
택배 하나를 반품하러 나갔다가 어차피 나온 김에 다른 볼일을 봅니다. 휴대전화로 한 가지를 확인하다가 답하지 않은 메시지를 발견하고, 답을 보내고 나면 다른 연락 하나가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한 가지였습니다. 끝날 때에는 서너 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중 어느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쉽게 끼어듭니다.
한 시간씩 준비해야 하는 일이라면 오늘 할지 내일 할지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오 분이면 될 것 같은 일은 그냥 시작합니다. 그 오 분이 십 분이 되고, 거기에서 또 다른 십 분이 나옵니다.
시간을 쓰는 것은 일 자체뿐만이 아닙니다.
은행에서 실제로 일을 처리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도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이동하고 순서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훨씬 긴 시간이 듭니다. 반품 하나도 상자를 챙겨 들고 맡길 곳까지 가야 합니다. 마트에서 우유 하나를 사는 일에도 오가는 시간이 붙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하루를 떠올릴 때 가운데 있는 일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행 일, 반품, 장보기라고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하루가 실제로 사용된 곳은 그 사이까지 포함합니다.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는 시간, 차를 세우고 걷는 시간,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어느 것 하나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모아놓으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짧은 일을 많이 한 날에는 실제로 사용한 시간과 기억에 남은 시간이 크게 달라집니다.
오전에는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후가 되면 마음이 바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큰일 하나가 하루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과 그 사이의 시간이 빈 곳으로 계속 들어온 것입니다.
별일이 없었던 것이지, 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해놓고 나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아침의 공구함은 어수선했습니다. 필요한 드라이버 하나를 찾으려면 이것저것 들춰야 했고 나사와 못은 한 통 안에서 뒤섞여 있었습니다.
정리를 끝내고 뚜껑을 닫아 수납장 안에 넣습니다.
그 순간부터 공구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 뒤 다시 열었을 때는 필요한 것을 쉽게 찾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 오늘 아침에 들인 시간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공구함이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손잡이도 그렇습니다.
흔들릴 때에는 서랍을 열 때마다 거슬렸습니다. 나사를 조이는 데에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고치고 나니 더 이상 생각할 일이 없습니다.
잘해놓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생활에는 이런 일이 많습니다.
하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나는데 해놓으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일입니다.
떨어진 물건을 사다 놓고, 납부할 것을 제때 처리하고, 헐거워진 것을 조이고, 사용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다음에 필요할 것을 미리 챙겨두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놓기보다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합니다.
어수선했던 것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부족했던 것이 채워집니다. 신경 쓰이던 것이 더는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결과입니다.
그래서 일을 잘 끝낼수록 흔적도 함께 사라집니다.
반품하지 않은 상자는 현관에서 계속 보입니다. 흔들리는 손잡이는 잡을 때마다 느껴집니다. 우유가 떨어지면 냉장고를 열 때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처리하고 나면 그것들이 사라집니다.
문제가 사라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쓴 시간까지 함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런 일로 하루를 보낸 저녁에는 보여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새로 만든 것도 없고 눈에 띄는 결과물도 없습니다.
아침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달라지지 않도록 손을 쓴 것입니다.
일은 끝내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활은 조금 다릅니다. 해놓은 것이 눈에 띄기보다, 해놓았기 때문에 별일 없이 다음 시간이 이어집니다.
공구함은 닫히고, 손잡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필요한 것은 다시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도 사람의 시간이 들어갑니다.
그 시간을 계산에서 자꾸 빼놓으면 꽤 많이 움직인 날에도 “오늘은 한 일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끝난 것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계속 보인다
저녁이 되어 아침에 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하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납니다.
급한 일은 아닙니다. 내일 해도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오늘 끝낸 일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 하지 못한 것은 금세 떠오릅니다.
공구함은 이미 수납장 안에 있습니다. 반품한 택배 상자도 없습니다. 은행에서 처리한 일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끝난 일은 생활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습니다.
남은 일만 아직 앞에 서 있습니다.
아침에 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였고 그중 네 가지를 끝냈다고 해봅니다. 저녁에 눈앞에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만 보고 있으면 네 가지를 해낸 사람보다 한 가지를 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더구나 생활에는 완전히 끝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장을 봤다고 장보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며칠 뒤에는 다시 필요한 것이 생깁니다. 집 안 한 곳을 정리하면 시간이 지나 다시 흐트러집니다. 고장 난 것을 하나 고쳐놓아도 언젠가는 다른 것을 손볼 일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끝내놓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생활은 완성해놓고 진열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쓰고, 흐트러지고, 채우고, 다시 손보면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루만큼은 자꾸 완성품처럼 바라봅니다. 오늘 해야 할 것을 다 했는지 확인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어딘가 덜 끝난 하루처럼 느낍니다.
그 기준을 따라가면 하루는 좀처럼 완료되지 않습니다.
내일 할 일이 남았다는 사실과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도 말입니다.
바빴다는 것과 하루가 남는다는 것은 다르다
하루 종일 볼일을 보고 돌아온 날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이동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필요한 것을 사고 연락할 사람에게 전화를 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몸은 피곤합니다.
분명 바빴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시간이 그냥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대인 날도 있습니다.
오후에 친구를 만나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눈 날입니다. 한 일의 개수로 따지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금방 나옵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책을 오래 읽은 날도 그렇습니다. 동네를 천천히 걸었던 날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많이 처리한 날은 아닌데 하루에는 모양이 있습니다.
바빴다는 것과 하루가 채워졌다고 느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잘게 쓴 세 시간보다 한 가지에 머문 한 시간이 더 길게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빴던 날이 허전할 수 있고, 별일 없었던 날이 오히려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루가 허전하면 할 일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별로 한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내일은 좀 바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미뤄둔 일을 찾아내고 일정을 채웁니다.
하지만 이미 하루 종일 바빴는데도 허전했다면 일을 하나 더 넣는다고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일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작은 일 사이를 오가느라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던 하루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오래된 습관도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결과를 찾습니다.
무엇을 끝냈는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을 남겼는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한 시간에는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일을 맡았다면 끝내야 하고 약속한 것이 있다면 지켜야 합니다. 시작한 일을 어디까지 했는지 확인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자를 하루 전체에 대기 시작할 때 생깁니다.
친구와 나눈 이야기는 무엇을 끝낸 시간이 아닙니다.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신 시간에도 결과는 없습니다. 잠깐 창밖을 보거나 동네를 걷는다고 눈에 보이는 무엇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시간을 모두 빈칸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공구함 정리를 거창한 성과라고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마트에 다녀온 일을 훌륭한 하루의 증거로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평범한 일은 평범한 일인 채로 있으면 됩니다.
다만 평범하다는 이유로 없었던 일처럼 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에는 결과를 남기는 시간도 있고 생활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시간도 있습니다. 아무 결과 없이 그냥 지나가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함께 하루를 만듭니다.
그런데 결과가 남은 시간만 제대로 쓴 시간이라고 여기면 나머지는 기억에서 빠집니다.
그때 하루는 실제보다 훨씬 작아집니다.
내가 고른 삼십 분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갑니다.
무엇을 사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 걷고 싶습니다.
낮에 몇 번이나 지나갔던 길을 이번에는 천천히 걷습니다. 가게 불빛이 하나둘 켜져 있고, 낮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작은 화분이 가게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골목을 돌아 조금 더 걷습니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돌아서도 되고 한 블록 더 가도 됩니다.
낮에는 계속 다음 일이 있었습니다.
은행 일을 마치면 반품할 것이 생각났고, 반품을 하고 나니 마트에 들러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정리할 것이 보였고 휴대전화를 들면 답할 것이 있었습니다.
한 일을 끝낼 때마다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걷고 난 뒤에 무엇을 끝냈다고 표시할 곳도 없습니다.
삼십 분쯤 걷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사용한 시간을 따지면 은행에서 기다린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트에서 보낸 시간보다 짧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삼십 분은 이상하게 또렷합니다.
해야 해서 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해결하지 않았고 필요한 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걷고 싶어서 걸었습니다.
하루 종일 필요한 일에 반응하며 움직였다면 이 시간만큼은 내가 먼저 골랐습니다.
그 차이가 작지만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산책을 매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산책마저 ‘오늘 해야 할 일’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목록이 생깁니다.
어떤 날에는 책 몇 쪽일 수 있고,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공구함을 정말 정리하고 싶어서 꺼낸 날이라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으로 또 하나의 성과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간을 전부 다음 일에 밀려가며 쓰지는 않았다는 것, 잠깐이라도 내가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렀다는 것만 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습니다.
불을 켜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책상 앞에서 잠깐 멈춥니다.
아침에 고친 서랍 손잡이를 한번 당겨봅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란다 쪽 수납장 문도 닫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아침에 정리한 공구함이 들어 있습니다.
굳이 다시 열어보지는 않습니다.
냉장고에는 사온 우유와 과일이 들어 있고 현관에 놓여 있던 반품 상자는 없습니다.
오늘 손을 댄 것들은 대부분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한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잠시 생각합니다.
내일 하면 됩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다시 세어보지 않습니다.
공구함 하나, 은행 한 번, 반품 하나, 장보기 한 번을 목록으로 만들어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고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큰일 하나를 끝내지 못했다고 오늘을 빈칸으로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아침에는 별일 없는 하루가 될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찾고, 고치고, 기다리고, 이동하고, 사고, 정리하고, 이야기하고, 걸었습니다.
어떤 시간에는 이름이 있었고 어떤 시간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해놓자마자 흔적이 사라진 일도 있었고 아무 결과 없이 지나간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하루였습니다.
불을 끄기 전에 다시 한번 서랍을 봅니다.
손잡이는 가만히 제자리에 있습니다.
수납장 안의 공구함도 더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일 할 일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대로 둡니다.
다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루는 끝났습니다.
